중국 명나라의 개국공신 「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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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원나라시절 과거에 합격한 수재

'유기'(劉基)는 1311년 중국 원나라에서 태어났으며, 절강성 온주 문성현 남전 출신으로, 자는 백온(伯溫)을 쓴다. 유기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는데, 14살 때는 한번 배운 춘추를 줄줄 외웠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글로 써 다시 책으로 만들 수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333년에는 23세의 나이로 과거시험에 도전하여 진사시에 합격해 관직을 받았는데, 그가 상당히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당시 원나라에서 과거시험이 잘 열리지 않았을뿐더러, 그 와중에 남송 지역 출신자들이 상당히 차별받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재능이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원수부도사'의 직책에 있을 때, 남방에서 날뛰는 해적 '방국진'에 대한 대처방법의 문제로 상관과 갈등을 겪다가 좌천되었다. 당시 유기는 방국진 같은 이들을 엄히 처벌하여 기강을 바로 세워야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방국진이 유기에게 뇌물을 주려고 시도하였지만,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유기의 상관은 그를 회유하려고 하였고, 여기에 방국진의 뇌물을 받은 고위관료들의 입김이 더해져, 방국진은 원나라 조정에 투항하여 벼슬을 받았으나, 유기는 문책을 받고 좌천되었다. 이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유기를 불러들였는데, 도적을 토벌하라고 그를 총관부판에 임명하였으나, 정작 휘하의 병사는 주지 않았다. 이에 자신에 대한 조정의 심한 견제를 느낀 유기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기는 문인들과 어울려 다니면 서호에서 유람을 하였고, 당시의 세상과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욱리자'를 저술하였다.

관료에서 역적으로

1356년 홍건적의 일파였던 '주원장'이 금릉을 점령하였는데, 절동의 명사였던 유기, '장일', '섭침', '송렴' 등에게 합류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유기는 주원장의 권유를 한번 거절했지만 결국 받아들였고, 주원장 휘하로 합류하면서 '시무십팔책'을 주어 앞으로의 향방에 대해 논하였다고 하는데, 주원장은 이를 받아보고는 자신의 장자방을 얻었다면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에 원나라에 반기를 든 이들 중에는 주원장과 '진우량', '장사성' 등이 유력한 세력이었는데, 주원장은 유기에게 남부를 장악하기 위해 진우량과 장사성 중에 누구를 먼저 공략해야 하는지 물었다고 한다. 이에 유기는 진우량은 상관을 위협하고 부하들을 협박하여 실권을 잡았기 때문에 명분이 약한 데에 반해, 자신들보다 상류를 차지하고 있어 전략적으로 큰 위협이 되지만, 장사성은 돈과 지휘만 밝히는 자로 진우량을 공격해도 호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진우량을 먼저 공격하여 궤멸시키면, 고립된 장사성은 어렵지 않을 것이니, 두 세력을 토벌하여 남방을 장악하며 천하를 제패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문답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장사성은 원나라의 군대와 주원장의 군대의 공격에 번번이 패하였으며, 한때 세력의 존속을 위해 원나라에 투항하는 등 크게 위협적이지 못 한데 비해, 진우량은 장강 이남의 최대의 세력으로 상당한 위협이 되고 있었다. 1360년 주원장은 진우량과의 결전을 택해 먼저 공격하였고, 진우량이 장사성에게 동맹을 제의하면서 한때 주원장 세력은 항복자하는 이들과 도주하자는 이들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때 유기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후에 주원장이 따로 유기를 불러 의견을 묻자, 노기등등하게 항복과 도주를 주장하는 자들을 참수해야 한다면서 소리치고서는, 진우량의 세력을 깊숙이 끌어들여 힘을 뺀 후에 역슴을 가하면 쉽게 무너트릴 수 있다는 계책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후 주원장은 사방에 매복을 시켜놓고 계책을 꾸며 진우량의 부대를 끌어내었고, 기습공격하여 패퇴시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장사성도 진우량에 호응하여 군대를 보내기는 하였으나, 강음에서 '오량'에게 막혀 돌아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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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양호 대전

1361년 대승을 거둔 주원장은 역으로 진우량을 공격하였는데, 그사이 원나라 조정의 군대로 인한 위협을 피하고자, '차칸테무르'와 손을 잡기도 하였다. 당시 원나라 말기에는 사실 원나라 조정과 반란군과의 싸움이라기보다는 반란군들끼리의 세력다툼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 안에서 주원장은 원나라의 군대에 대해 중립적이거나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많은 이득을 보기도 하였다. 이후 주원장의 군세에 계속 밀리던 진우량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단기 결전으로 끝내기로 정하였고, 휘하의 세력을 모두 모아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였다. 진우량은 마지막 결전에 앞서 높이가 십여 장에 달하고, 장갑이 3겹이나 되는 큰 누선을 수백 척 건조하였으며, 6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며, 후에 명나라 시절에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주원장도 이에 맞서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대항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 추정되며, 진우량의 군대가 주원장의 군대에 비해 더 큰 규모였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찌 되었든 파양호에서 벌어진 이 싸움에서 초반에는 주원장의 군대가 규모에서 밀리며 고전을 치렀지만, 바람이 동남풍으로 바뀌면서 주원장 측에서 화계로 공격하였고, 이후 지휘부가 혼란에 빠져 진우량의 군대가 무너졌다. 진우량은 파양호에서 후퇴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전투 중에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고 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두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내륙에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해전으로 승부를 내려고 했으며, 이 시기에 이미 화약무기가 상당히 발달해 있어 서로 화포를 쏘면서 싸웠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전투 도중에 바람이 동남풍으로 바뀌자, 주원장은 작은 배들 중 일부에 갈대와 화약을 실어 보내, 진우량의 큰 배에 인접시켜 폭파시켜 화계를 썼다는 점인데, 이는 유명한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떠오르게 하는 부분이다. 실제로 '삼국지연의'의 저자인 '나관중'은 이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 '파양호 대전'이 적벽대전의 모티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또 유기는 당대부터 '제갈량'에 비교되는 일이 많았으며, 전해지는 설화에 유기와 제갈량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은데, 이 때문에 유기가 삼국지연의의 제갈량의 모델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있다. 여담이지만, 유기는 파양호 대전이 한창 벌어지는 중간에 갑자기 강제로 주원장을 이끌고 다른 배로 옮겨타게 한 적이 있는데, 이후 포탄이 날아와 이전에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사실 유기가 파양호 대전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내용은 이것뿐이 아닌가 생각된다.

명나라의 건국

이후 1364년 남은 진우량의 세력에게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1366년에는 장사성의 마지막 거점까지 점령하고,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장사성을 처형하였다. 이렇게 남방을 평정하고 유력한 적대세력을 평정한 주원장은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같은 해 주원장이 보낸 북벌군이 원나라 수도인 '대도'(베이징)을 점령하면서, 원나라는 중원 북쪽으로 완전히 밀려났고, 다시 중원을 회복하지 못하고 몰락하게 된다. 그러나 중원 내부는 사실상 전란 상태가 계속되었고,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은 1382년까지 계속되었다. 유기는 명나라에서 '성의백'에 봉해져, '태사령', '어사중승'의 직위에 올랐는데, 사실 이러한 보상은 그가 세웠다고 알려진 공적에 비하면 많이 모자란 편이다. 이는 유기가 다른 공신들과 다르게 보상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과 더불어 그의 공정하고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원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명나라에서도 다른 관료들에게 상당한 정치적 견제를 받았다. 또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엄격한 법집행을 주장하고, 이를 강하게 밀어붙였다고 하는데, 앞서 나왔던 방국진이 원나라에 이어 명나라에서도 항복하여 벼슬을 지낸 것을 보면, 실상 조정은 별달리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한때 유기는 쏟아지는 중상과 비방을 피하기 위해 아내의 사망을 이유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기도 하였는데, 주원장이 다시 불러서 복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견제가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견제에 시달렸고, 말년에는 녹봉이 완전히 삭감될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은퇴해서 살던 도중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는데, 죽기 전에 주원장이 좌승상 '호유용'을 시켜 의원을 보냈기 때문에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와 관련해서는 호유용이 독살했다는 설과 주원장이 독살하도록 명령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소위 '호유용의 옥'으로 불리는 대숙청 사건의 하나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유기는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숙청하기를 꺼리지 않았던 주원장의 공신 중에서 이례적으로 숙청당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는데, 이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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