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덴마크 북해 제국의 지배자 「크누트 대왕」
- 역사
- 2023. 8. 3.
잉글랜드와 덴마크, 노르웨이
'크누트 대왕'은 995년경 덴마크의 왕 '스벤 트베스캐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들은 '데인족'으로 불리는 바이킹으로 이 시기에는 윌란 반도를 중심으로 국가를 이루고 있었으며, 스벤은 덴마크와 노르웨이 지역에 지배권을 행사하였고,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끊임없이 잉글랜드 지역으로 침략을 이어가고 있기도 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왕은 '애설레드 2세'였는데, 그는 계속되는 덴마크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조공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그로 인해 얻은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1002년에는 '성 브릭티우스 축일의 학살'이라고 불리는 데인족 정착민에 대한 학살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1013년에 이르러서는 스벤은 아예 잉글랜드의 왕위를 탈취하기로 결심한 것 같은데, 대대적으로 원정을 감행하여 잉글랜드군을 쳐부수고 잉글랜드의 왕으로 인정받았으며, 패배한 애설레드 2세는 노르망디로 망명하게 된다. 이 원정에는 크누트 대왕도 참가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듬해인 1014년에 스벤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본국인 덴마크의 왕위는 장남 '하랄 2세'가 이어받게 되었고, 잉글랜드의 왕위는 차남인 크누트 대왕이 계승하게 되었으며, 노르웨이의 왕위는 사실상 '올라프 2세'에게 넘어가게 된다.
잉글랜드 장악
강력한 왕이었던 스벤이 죽고 젊은 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자, 점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악력이 약했던 잉글랜드에서는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다. 잉글랜드에 정착하고 있던 데인족들은 크누트 대왕을 왕으로 인정하였지만, 데인족보다 먼저 잉글랜드에서 국가를 이루고 살고 있던 앵글로색슨족의 귀족들은 애설레드 2세를 다시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앵글로색슨족의 귀족들의 행태는 민족적인 문제나 정통성에 기반한 이유보다는 더 실질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들은 애설레드 2세를 지지하는 대가로 자신들에게 불리한 제도들을 폐지하거나, 자신들과의 사적인 불화를 청산하는 등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에 기반한 것으로, 그들은 이 내용을 문서로 만들어 애설레드 2세에게 들이밀었다. 이는 사실상 반협박이나 다름없는 행태였지만, 애설레드 2세에게는 사실상 다른 선택권은 없었기 때문에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영국 역사상 왕과 신하 간에 문서로 남겨진 협약이 되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애설레드 2세는 귀족들의 협력을 받아 잉글랜드로 복귀할 수 있었고, 크누트 대왕은 이러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덴마크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015년에 다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불과 몇 달 만에 잉글랜드 대부분을 다시 차지하였다고 한다. 이후 1016년 애설레드 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에드먼드 2세'가 앵글랜드의 왕으로 크누트 대왕과의 싸움을 이어갔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잉글랜드군은 '애선던 전투'에서 패배하였는데, 이어진 평화협상에서 크누트 대왕은 머시아와 노섬브리아 지역을 확보하였고, 에드먼드 2세는 웨식스 지역의 지배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해가 지나기 전에 에드먼드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크누트 대왕은 '평화왕 에드거'의 계승을 선언하거나, 에젤레드 2세의 미망인인 노르망디공의 딸 '엠마'와 결혼을 하는 등 잉글랜드 지역에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것 같다.
북해 제국
이 당시 유럽의 전쟁은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영토를 획득하는 전쟁과는 조금 양상이 다른데, 간단히 말하자면 타이틀을 획득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예를 들면 덴마크의 왕 스벤이 노르웨이와 잉글랜드를 점령했다고 해서, 노르웨이와 잉글랜드가 덴마크의 영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벤이 덴마크의 왕이자, 노르웨이의 왕이며,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특정한 지역에는 일종의 행정구역처럼 고유의 영지가 형성되고, 그 영지를 다스리는 정통성이 타이틀로 붙는 것이다. 물론 그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일단 물리적인 힘으로 점령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만큼 그 지역과 인근 지역들의 유지들에 의해 타이틀을 인정받는 것도 중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조금 이상해 보이는 방식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 심해져서, 특정 지역의 영지는 왕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거나, 혈연을 이용해 전혀 연고가 없는 영지의 지배권을 주장한다던가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방식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이후 1018년에는 덴마크의 왕위를 이어받은 형 하랄 2세가 사망하면서 크누트 대왕이 덴마크의 왕도 겸하게 되었고, 1028년에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일부까지 정복하여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그레이트브리튼섬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크누트 대왕은 사실상 북해를 내해처럼 이용하는 거대한 영토의 소유자가 되었고, 그의 광대한 영토에 대해 '북해 제국'(앵글로-스칸디나비아 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국의 붕괴
크누트 대왕은 넓은 영지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영국을 웨식스, 머시아, 노섬브리아, 앵글리아의 4개의 백작령으로 재편하여 귀족들에게 통치를 맡기었고, 덴마크와 노르웨이, 영국을 잇는 북해 무역을 통해 국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또 직접 이탈리아로 여행하여 로마에 있는 교황을 만나거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의 대관식에서 참석하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북해 제국은 겨우 7년밖에 유지되지 못했는데, 1035년에 크누트 대왕은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크누트 대왕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요절하였는데, 막내인 '하레크누드'가 덴마크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왕위는 올라프 2세의 아들인 '망누스 1세'가 차지하였다. 이후 1042년에 하레크누드도 급사하면서, 덴마크의 왕위는 망누스 1세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잉글랜드의 왕위는 애설레드 2세의 아들인 '참회왕 에드워드'가 차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