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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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사진

미 육군 장교

'재커리 테일러'는 1784년 미국 버지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지역 유력자로 매우 부유하였으며, 여러 흑인 노예들과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후 켄터키 주 루이빌로 이주하였다. 테일러의 아버지는 '미국 독립전쟁'에 장교로 참전하였으며, 테일러는 아버지의 농장일을 도우며 군대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당시 켄터키 주의 교육 시스템이 확립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초기에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학교를 다니기도 하였지만, 상당히 산발적인 형태로 교육을 받았다. 테일러는 인디언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켄터키 주의 민병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고 하며, 1808년에는 정식으로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중위로 임명되었다. 1810년에는 대위로 승진하였으며, 1811년에는 인디애나 준주에서 근무하였는데, 이때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알게 되었다. 1812년 '미영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해리슨 요새'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 공으로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테일러는 군 복무를 하면서 짬짬이 농장 경영을 병행하였는데, 이쪽도 상당히 성공적으로 진행했던 것 같고, 소유한 흑인 노예와 농장의 규모도 상당했던 것 같다. 1819년에는 중령으로 승진하였고, 1832년에는 '블랙 호크 전쟁'에 참전하여, 대령으로 승진하였다. 1837년에는 플로리다로 향했는데, 테일러는 '제2차 세미놀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오키초비 호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그 공적으로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1838년부터는 플로리다에 주둔하는 모든 미군의 지휘를 맡아 2년간 세미놀 전쟁을 이끌었다. 이 시기부터 정치권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 같은데, 테일러는 휘그당의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1841년에는 미 육군 서부 사단 제2군관구의 사령관을 맡았고, 평온한 시기를 보내면서 자신의 농장과 사업에 대한 일에 관심을 둘 수 있었다.

미국-멕시코 전쟁의 영웅

1844년 텍사스 합병이 공식화되자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긴장이 흐르기 시작하였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녹스 포크'는 테일러에게 군대를 이끌고 텍사스 지역의 멕시코 국경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포크는 멕시코와 국경 획정에 대한 협정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테일러에게 일방적으로 '리오그란데 강'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하였고, 멕시코가 이를 침략행위로 받아들이면서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포크는 이를 빌미로 멕시코와의 전쟁을 선포하였고, 최전선에 있던 테일러는 적은 병력을 가지고 '팔로 알토 전투'와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하면서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도중에 포크는 테일러 부대의 병사들을 '윈필드 스콧'에게 넘기게 하고, 소규모 부대로 지역을 방어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휘그당과 가까운 테일러가 너무 많은 인기를 얻을까 두려워 견제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부에나 비스타 전투'에서 멕시코의 '산타 안나'가 이끄는 25,000명 규모의 대군을 4,500명가량의 병력으로 효과적으로 막아내면서 테일러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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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12대 대통령

테일러는 직업 군인으로 오래 복무했기 때문에, 정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 때문에 1848년에 있는 선거에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전쟁 영웅인 그가 대통령에 출마하면 당선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보다 그의 정치성향과 가까웠던 휘그당에서 적극적으로 그를 설득하였다. 결국 성립된 테일러와 휘그당의 관계는 일종의 정치적 거래관계였는데, 테일러는 휘그당과 문제가 있었던 '존 타일러'처럼 거부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휘그당에서는 테일러의 신념에 반대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관계가 성립되었다.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테일러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는데, 이는 그의 명성에 의한 것도 있지만, 민주당에서 나온 '마틴 밴 뷰런'이 새로 자유토지당을 만들어서 출마했기 때문에, 민주당의 표가 두 곳으로 나뉜 덕을 본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여담이지만 대통령이 된 테일러의 임기는 3월 4일 일요일부터 시작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상 일요일에는 할 수 없다며 취임식을 하루 미루었다. 그 결과 전임 대통령의 퇴임과 후임 대통령의 취임에 하루 공백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 하루 동안 대통령의 권한은 당시 상원의장 대행이었던 '데이비드 라이스 애치슨'에게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애치슨은 그냥 하루 종일 자고 있었다는 것으로 능숙하게 논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취임식은 요식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에 테일러가 일요일부터 대통령이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고 한다.

대통령 임기 중 사망

테일러는 정치 분야에서는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내각에 맡겼으며, 헌법과 의회의 결정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멕시코 전쟁의 승리로 새로 획득한 영토들의 노예제 허가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타일러가 노예제에 찬성해 줄 것으로 예상했던 남부주들이 그에게 실망하기도 하였다. 1850년에는 '헨리 클레이' 등이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노예주와 해방주 사이에 간극을 조절하고 있는 와중이었는데, 테일러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워싱턴 기념탑'에서 열린 기금 모금 행사에 참석하였다가, 이 자리에서 많은 양의 체리와 우유를 섭취하고나서 소화기관 장애를 앓았다. 결국 그는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병사하였는데, 그가 걸린 병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독살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후 그의 1991년에 그의 유해를 발굴하면서 확인한 결과 암살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그가 당선된 날짜가 맞지 않기 때문에, 항간에 떠도는 소위 '테쿰세의 저주'로 인한 죽음과도 연관이 없다. 이후 부통령이었던 '밀러드 필모어'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으며, 이는 타일러 이후로 두 번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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