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역사
- 2023. 7. 27.
버지니아의 정치가 집안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1773년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버지니아의 버클리에서 '벤저민 해리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630년대부터 버지니아에서 활동한 영국계의 저명한 가문이었고, 벤저민 해리슨은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버지니아 주 대표로 '대륙회의'에 참석하였으며,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명이기도 하다. 이후 버지니아 주지사와 하원의원을 지내는 등 정치계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해리슨도 어린시절부터 진압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1787년에는 '햄프던-시드니 단과대학'(Hampden-Sydney College)에서 학업을 이어나갔고, 도중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의학을 공부하였다. 1791년에는 아버지가 사망하였는데,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해리슨은 갑자기 학업을 그만두고 군대에 입대하였다. 당시 18세의 해리슨은 입대하자마자 소위로 임명되어 '북서 인디언 전쟁'에 참전하였고, 이듬해에는 중위로 진급하였으며, 1794년에는 '폴른 팀버스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1797년에는 대위까지 진급하였지만, 이듬해 퇴역하였고, 정치계로 자리를 옮겨 당시 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에 의해 '노스웨스트 준주'의 영토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799년에는 노스웨스트 준주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서부의 토지들을 더 세분화해서 작은 단위의 거래가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토지 개발에 대한 접근성을 성공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을 바탕으로 1800년 애덤스는 해리슨을 새로 만들어진 '인디애나 준주'의 첫 주지사로 임명하였고, 의회의 승인을 받은 그는 이듬해인 1801년에 정식으로 부임하였다. 해리슨은 12년간이자 주지사직을 수행하였는데, 그는 인디애나를 정식 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협상이라는 방식으로 인디언들의 영토를 빼앗았고, 이로인해 주변 인디언 부족들 사이에 불만이 쌓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미영전쟁
미국이 본격적으로 서부를 개척하면서 회유와 압박을 통해 계속해서 인디언들의 영토를 잠식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인디언들이 반발도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테쿰세'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등장하였다. 그는 동생인 '텐스콰타와'와 함께 부족의 고유한 삶의 방식으로 회귀 할 것을 주장하면서,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종속된 영토를 소수의 부족들이 처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나아가 미국과 각 부족들이 맺은 협정도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인들이 주로 의복과 총, 위스키 같은 것들을 대가로 소수 부족의 부족장들을 회유하거나 기만하여 영토를 빼앗았기 때문으로, 이들은 해리슨에게도 접근하여 협정의 무효성에 대해 주장하였지만, 대화는 결렬되었고 일촉즉발의 위기상황만이 남았다. 1811년 테쿰세는 자신들의 인디언 연맹을 확장하기 위해 남부를 방문하고 있었는데, 해리슨은 이를 기회로 보고 군대를 이끌고 행진하였으며, 도중에 '해리슨 요새'를 건설하는 등 사실상 무력시위를 하였다. 이후 테쿰세의 인디언 세력이 모여있던 '피라핏츠타운'을 향했는데, 마을에서 나온 한명의 인디언이 평화를 위한 회의 중이기 때문에 전투를 하루 미루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디언들도 해리슨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태였고, 텐스콰타와가 이끄는 인디언 무리가 밤중에 미군 주둔지를 습격하였다. 사실 이 전투의 시작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자료가 없기는 하지만, 해리슨은 인디언의 기습에 대해 효과적으로 방어하였고, 다음날 인디언들이 마을을 버리고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이 전투는 일반적으로 해리슨이 승리한 것으로 본다. 이 전투를 계기로 인디언들은 캐나다에 있는 영국군과 동맹을 맺었고, 미국 내에서는 인디언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서 1812년에 '미영전쟁'(1812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대통령인 '제임스 메디슨'은 해리슨을 노스웨스트군의 준장으로 임명하여, 그는 주지사직을 사임하고 다시 군에 복귀하게 되었다. 전쟁 초기에 미군은 야심차게 국경을 넘어 캐나다를 공격하였지만, 이내 캐나타와 인디언 연합군에 패해 디트로이트를 빼앗기는 등 열세에 몰렸다. 이에 해리슨은 부대의 단독 지휘권을 요구하여 획득하였고, 이듬해인 1813년 인디애나 준주와 오하이오에서 승리를 거두며 디트로이트를 탈환하였고, 국경을 건너 '어퍼캐나다'로 진출하여 '테임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해리슨은 큰 명성을 얻었다. 이 전투에서 테쿰세가 전사하였는데, 이로 인해 인디언 연맹 자체가 붕괴해버렸기 때문에 영국과 인디언 사이의 동맹도 소멸해 버렸다. 그러나 1814년 해리슨은 전쟁장관과 갈등을 겪었고, 다시 군을 나와 오하이오의 농장으로 돌아갔다.
대통령 당선과 사망
군에서 은퇴한 그는 지역활동을 활발하게 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816년에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1819년에는 오하이오 주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25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착실하게 정치경력을 쌓았다. 1828년에는 '그란콜롬비아'의 대사로 임명되었는데, '시몬 볼리바르'와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이듬해에 새로 대통령이 된 '엔드루 잭슨'에 의해 교체되었다. 1836년에는 '휘그당'의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는데, 당시에는 잭슨의 인기를 이어받은 '마틴 밴 뷰런'이 유력했을 뿐만 아니라, 휘그당 내에서 후보가 4명이나 출마했기 때문에 승산이 적었고, 결국 선거에 패배하였다. 그러나 1840년에 치루어진 선거에서는 해리슨은 휘그당의 단독 후보로 출마하였고, 당시 일어난 미국의 공황 때문에 밴 뷰런의 지지율이 급락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당선될 수 있었다. 해리슨은 이듬해인 1841년 3월에 취임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날은 쌀쌀한데다 비까지 오고 있어서 주변에서는 취임식을 하루 미루도록 조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 조언을 거절하였는데, 당시 해리슨은 68세로 이때까지 당선된 대통령 중에 최고령이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노인 이미지를 불식시킬 의도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모자와 코트까지 벗어두고 연단에 섰으며, 심지어 그는 아직까지도 가장 긴 것으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연설문을 읽었다. 결국 그는 그 직후에 병에 걸렸고, 대통령에 취임한지 한달만에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대통령 재임기간은 미국에서 가장 짧고, 아마 이후로도 그 보다 짧은 임기를 가진 대통령이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