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
- 역사
- 2023. 7. 25.
관롱집단
'양견'(楊堅)은 541년 '서위'의 실력자 중 한명인 '양충'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견의 집안은 본래 '선비족' 출신으로 '전연' 때부터 관직에 종사하였는데, '북위'가 건국되면서 6진이 설치되자, 그 중 '무천진'으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한다. 이후 북위의 '효문제'의 한화 정책으로 한족의 성씨인 양씨성을 하사 받았고, 이때부터 흥농 양씨를 본관으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6진에 이주하여 북방 이민족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은 선비족의 호족들은 자부심이 매우 강해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들끼리만 혼인을 시킬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이들은 효문제의 한화 정책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불만은 점차 쌓이다가 523년에 반란의 형태로 폭발하였는데, '육진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6진 출신이었으나 반란 이후 6진을 배신한 '우문태'가 두각을 나타내었고, 이후 북위가 서위와 '동위'로 분열하면서, 서위를 건국할 때 우문태에게 협력한 양충은 '거기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우문태는 서위에서 계속 실권을 쥐고 흔들었고, 우문태 사후 556년에는 아들 '우문각'이 선양을 받아 '북주'를 건국하고 서위는 멸망하게 되는데, 이에 가담한 양충도 북주에서 '수국공'에 봉해졌으며, '주국대장군', '대작의'가 되었다. 이렇게 북위 말기부터 무력을 통해 권력을 잡아온 선비족 집단을 '관롱집단'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초기에는 선비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무력 집단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한족과 동화되었으며,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치면서 중국의 토착 귀족화 되었다. 양견도 전형적인 관롱집단의 일원으로 어릴때는 선비족식 이름으로 '금강나라연'이라고 하였으며, 16세에는 아버지의 동료로 같은 선비족의 무천진 출신인 '독고신'의 딸 '독고가라'와 혼인하였다. 북주에서 양견의 가문과 독고가라의 가문의 영향력은 막강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가문의 비호아래 양견은 젊어서부터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수나라의 건국
568년 양충이 죽자, 양견이 그의 지위를 이어받아 북주의 실권자가되었고, 573년에는 자신의 딸을 당시 태자인 '우문윤'과 혼인시켜 정치적 입지를 더 공고히 하였으며, '표기대장군', '대흥군공'의 벼슬을 받았다. 양견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 뿐만 아니라, 그 실력도 뛰어났던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의 성공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로부터의 정치적 공격 뿐만 아니라, 암살 시도 같은 물리적인 견제도 잘 버텨냈다고 한다. 또 실전에서도 북제의 군대를 물리치는 등 공을 세워 '주국대장군'까지 승진하였다. 578년에는 사위인 우문윤이 황제로 즉위하자, 황제의 장인으로 사실상 북주 제일의 실권자가 되었는데, 우문윤이 도성 밖으로 나가게 될 경우에는 항시 양견에게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문윤은 황제가 된지 9개월이 된 이듬해 579년에 갑자기 자신의 아들인 '우문천'에게 제위를 넘겨주었다. 우문윤은 은퇴하여 내궁에서 유흥을 즐기는데 열중하였으며, 당시 7세 밖에 되지 않았던 우문천은 제대로 된 통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양견이 섭정으로 사실상 북주를 통치하였다. 이러한 행태는 우문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인정되었을지 모르겠으나, 580년 우문윤이 사망하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는데, 우문윤의 동생인 '우문찬'을 비롯하여 우문씨 황족의 반발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양견은 먼저 우문찬에게 접근하여 다음 제위를 넘겨줄 것처럼 그를 속였고, 이후 황제의 조서를 이용해서 우문씨의 다섯 왕을 수도로 불러들여, 그들의 병권을 빼앗고 수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구금하였다. 이후로도 몇차례 반란이 있었으나 양견에게 진압되었고, 방해가 되는 우문씨 일족을 제압한 양견은 581년 선양의 형태로 제위를 받아 나라를 건국하여, 국호를 '수'로 하고 연호를 '개황'으로 하였다. 이로서 북주는 완전히 멸망하였고, 우문천은 선양 이후에 '개국공'으로 봉해졌으나, 이후 후환을 우려한 양견에 의해 그를 포함한 우문씨 황족들은 모두 몰살당했다고 한다.
개황의 치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은 '개황율령'을 제정해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법을 간소화 하였으며, '균전제'를 실시하여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토지를 지급하였고,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조용조'를 실시하여 나라를 풍족하게 만드는 노력을 하였다. 한편 나라를 세울때까지는 관롱집단은 양견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만, 막상 나라를 세우고 나서는 관리하기 어려운 권력집단이 되었다. 양견은 이러한 관롱집단을 견제하고 황권의 지지기반이 되어 줄 새로운 인재들로 조정을 체우기 위해 '과거제'의 전신이 되는 '선거제'를 도입하였다. 또 587년에는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실상 신분제처럼 변질된 '구품중정제'를 폐지하였다. 그외에도 양견은 궁정에서의 소비를 줄이고 근검절약한 생활을 하였으며, 한때 '대운하' 공사를 착공하였으나, 백성들의 부담이 상당하였기 때문에 도중에 중단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귀족세력을 억제하면서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지방의 행정 체계를 개편하고 세금을 줄여주는 등 백성들의 생활 개선에 힘 썼기 때문에, 이 시기에 있었던 태평성대를 일컫어 '개황성세'라고 불렀다고 한다. 양견은 황제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식사할 시간도 없어서 호위하는 병사에게 회의장으로 식사를 날라오게 했다고 하여, '위사전찬'이라는 말이 생겼다. 또 한번은 '왕가'라는 형리가 70여명의 죄수들을 수도 '장안'으로 압송하고 있었는데, 죄수들은 칼을 차고 쇠사슬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매우 힘들어했다. 이에 측은함을 느낀 왕가는 호송하는 병사들을 해산시키고서는, 죄수들의 포박을 모두 풀어주고 일시를 정해 준 후 장안에서 모이도록 하였다고 한다. 만약 한 사람의 죄수라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다면 왕가는 사형에 처해졌겠지만, 한사람도 도망가지 않았고, 모든 죄수들이 약속한 날짜에 장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양견은 크게 기뻐하여 죄수들과 그 가족들을 궁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열어주었으며, 이들을 모두 사면해 주었다고 하는 일도 있으며, 후에 당나라의 '이세민'이 자신의 치적을 퍼트릴 목적으로 더 많은 죄수들을 데리고 비슷한 일을 했다고도 한다.
중원 평정
나라를 다져 반석에 올린 양견은 중원을 통일하기 위해 나섰는데, 583년에는 요서 일대에 남아있던 북제의 잔당인 '고보녕'의 세력을 멸망시켰으며, 587년에는 '후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589년에는 차남 '양광'에게 남쪽의 '진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로서 양견은 사마씨의 '진나라' 311년에 '흉노족'에게 중원을 빼앗긴 이후 계속된 난세를 평정하고, 다시 중원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589년에는 고구려가 수나라를 침공하기도 하였는데, 중원 평정을 눈앞에 둔 양견은 고구려에 서신을 보내 제후국으로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면서, 따르지 않을 경우 고구려를 정벌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많은 주변의 이민족들은 수나라의 위세에 밀려 이미 복속된 모양세 였는데, 고구려의 '영양왕'은 고구려군과 '말갈족' 기병 1만명을 동원하여 도리어 수나라를 침공하였다고 한다.이 전투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수나라는 양견의 아들 양광과 '양량'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싸웠으나 고구려군에 대패하였으며, 이에 분노한 양견은 두 아들에게 자결하라고 명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명령은 황후 독고가라가 중재하여 거두어 들여졌다.
불행한 최후
양견이 황제가 되어 시행한 많은 정책들은 이후로도 중국의 역대 국가들에 큰 영향을 주었고, 그의 통치 시기가 태평성대로 불리워질 정도인 만큼, 양견은 중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군주이지만, 그의 후계자 책정은 별로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하였다. 양견은 뛰어난 장수이자 황제였지만, 아내인 황후 독고가라에게만은 약했는데, 한번은 양견이 다른 후궁을 총애하자, 독고가라가 몰래 그녀를 죽여 목을 자른 후 상자에 담아 양견에게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양견은 매우 분노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혼자 말을 타고 산 속을 질주하였고, 놀란 재상와 신하들이 급히 쫒아와서 말려서 데리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처럼 독고가라는 양견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는데, 이를 알고 있던 양광은 차남인 자신이 후계자가 되기 위해 이를 이용하기로 하였고, 음모를 꾸며 형인 '양용'이 황태자 자리에 실각하도록 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후 602년에 독고가라가 사망하자, 이미 고령이었던 양견은 이에 충격을 받아 정사를 소홀히 하였고, 반면 양광은 슬슬 그 본색을 들어내기 시작하였다. 604년 양견이 중병에 걸려 누워있을때, 양광이 입궁하여 궁궐을 지키고 있었는데, 양광이 자신을 지지하는 신하들과의 사이에서 나눈, 양견 사후에 대비하는 내용이 적혀있는 밀서가 실수로 양견의 손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에 양견은 대노하여 양용을 다시 황태자로 책봉하겠다고 나섰고, 상황이 급해진 양광은 병사들을 동원해 황궁을 장악하였다고 한다. 이때 양견은 양광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는데, 그 진실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이후에 황제로 즉위한 양광이 바로 유명한 '수양제'로, 그가 진행한 무리한 토목사업과 고구려 정벌로 인해 수나라는 멸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