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해적의 황금시대 영국의 유명한 사략 선장 「헨리 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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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사략 해적

'헨리 모건'(Henry Morgan)은 1635년경에 태어났는데, 그의 출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영국의 웨일스 출신으로 부농의 자식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모건이 서인도 제도로 건너간 경위도 불분명한데, 그가 바베이도스에서 7년여간 계약노동자로 살았다는 설도 있으며, 1658년경에 자메이카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이 자메이카를 점령한 것은 1655년인데, 모건이 건너간 것은 그 3년 후로 영국의 자메이카 초기 이민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전히 이유나 행적에 대해서는 불분명 부분이 많으나, 모건은 이후 유명한 해적 선장 중 한 명인 '크리스토퍼 밍스'의 휘하에서 해적으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영국의 자메이카 총리가 독자적으로 사략 허가장을 발부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를 이용하여 '포트 로얄'을 거점 항구로 삼아 카리브해 일대에서 해적질을 이어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사략'이라는 방식으로 해상 약탈을 허가하였는데, 이를 통해 본격적인 전쟁을 회피하면서 상대국을 견제할 수 있었지만, 사실상 범죄행위로 국가 공인 해적질에 불과한 행위였다. 이들은 소속 국가의 항구를 이용할 수 있었고, 때에 따라 국가의 보호를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신 약탈품의 일정 부분을 일종의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으며, 국가 정책에 따라 약탈의 대상이 제한되거나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어찌 되었든 이 공인된 합법 해적 허가인 사략 허가는 쉽게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들은 일반적인 해적인 '파이렛'(Pirate)과 명확하게 구분되었고, 그중에서도 카리브해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사략 해적들은 '버커니어'(Buccaneer)라고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디까지나 해적이었는데, 잔인하고 악랄한 범죄자들이었으며,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국가 통제만 받는 사적인 무력 집단으로, 현대의 테러 조직과도 비슷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영국 소속의 버커니어 모건

1662년 모건은 밍스의 추천을 받아 독립하였는데, 자메이카의 영국 시민군 장교로 임명되었으며, 사략 허가를 받아 독자적인 해적단을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모건은 중앙아메리카 일대를 돌아다니며 주로 스페인의 도시들을 약탈하였는데, 그가 함선이 아닌 도시를 약탈한 이유는 사략 허가로 국가에 지불해야 되는 비용이 해상 약탈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모건은 해적답지 않게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재능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다른 흔한 해적들처럼 번 돈을 흥청망청 낭비한 것이 아니라, 자메이카에 있는 대규모 설탕 농장에 투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덕분인지 모건은 30세 무렵에 자메이카 부총독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적이라고 하면 범죄자의 이미지가 있고, 실제로 당시에도 일반적인 해적들은 잡히면 무조건 교수형에 처할 정도로 엄히 처벌하였지만, 버커니어는 어디까지나 국가 공인직으로 신분상으로 따지자면 공무원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렇게 경력을 쌓은 모건은 다른 해적 선장들에 비해 한층 더 유명해지게 되었고, 1668년에는 33세의 나이로 자메이카의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0척의 배와 500명의 병사들을 제공받았다고 한다. 모건은 당시 포트 로얄을 거점으로 두고 자메이카에서 활동하는 모든 해적들의 지도자로 '에드워드 맨스필드'를 임명했다고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모건이 이들을 통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이미 이 시점에서 그는 해적에서 한 단계 벗어난 상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후 모건은 사략 함대를 이끌고 파마나의 포르토벨로와 베네수엘라의 마라카이보 등 많은 스페인 식민지들을 약탈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육상전뿐만 아니라 해전에서도 크게 승리하여 여러 스페인 군함을 격파하였다고 하며, 많은 부와 명성을 얻어 36척의 함선과 2,000명 규모의 해적단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해적이었는데, 도시를 효율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먼저 수도원을 습격한 후에 그곳의 성직자들을 방패 삼아 앞세우고 진격하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고 하며, 그러한 악명도 그의 해적 명성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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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습격

당시 스페인은 페루 등지에서 나오는 귀금속과 보석들을 '파나마'에 보관하였다가 본국으로 운송하였는데, 모건은 이곳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파나마는 물자 운송의 거점 도시로 스페인도 상당히 강력하게 방비하고 있었는데, 1596년에 '프랜시스 드레이크'도 점령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곳으로, 당시 해적의 정점에 가까이 있던 모건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목표였을 것이다. 1671년 대규모 병력을 모은 모건은 먼저 인근의 '프로비덴시아 섬' 등을 점령하여 거점을 확보하였고, 육지에 상륙하여 강과 정글을 지나 육로로 파나마를 향했다. 파나마의 총독도 모건의 공격을 미리 알고 방어하였지만, 역부족으로 패배할 위기에 쳐하자 도시를 포기하고 정글로 후퇴하였다. 스페인군은 후퇴하면서 파나마를 불태웠는데, 이 때문에 모건도 전리품을 별로 얻지 못했다고 한다. 모건은 파나마를 점령하려고 하였지만, 파나마 도시 자체가 모두 불타 없어진 꼴이 된 것이다. 모건은 3주간이나 파나마에 체류하면서 도주한 주민들을 붙잡아 고문하는 등 약탈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만족할 만한 전리품을 획득하지는 못 한 것 같다. 그러나 영국은 이미 1670년에 스페인과 협정을 맺어 해적질을 중단하기로 하였었는데, 이 소식이 모건에게 도착하기 전에 파나마 공격을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는 모건이 이 내용을 일부로 무시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 되었든 이듬해인 1672년에 모건은 영국으로 송환되었는데, 명목상 그는 범죄자였지만, 런던에서는 영웅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1674년 모건은 무죄방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사로 서임되는 영광을 누렸고, 자메이카의 부총독으로 임명되어 돌아오게 된다.

은퇴한 해적

자메이카로 돌아온 모건은 정치인이 되었는데, 그는 자메이카의 방어와 해적의 유지 문제로 의회와 대립하였다. 모건은 한때 대리 총독을 맡아 자메이카 방어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기도 하였지만, 이후 부총독 지위에서 실각하기도 하는 등 정치 생활은 별로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외에는 대체로 풍족한 생활을 누린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노예를 부려 운영하는 대규모 설탕 농장을 세 곳이나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모건은 평화로운 은퇴생활을 누리다 1688년에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모건은 해적질로 성공한 인물들 중에서도 말년까지 부와 명예를 누리며 평화롭게 사망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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