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영국 영국 의회 정치의 시작 「명예 혁명」
- 역사
- 2023. 11. 10.
위테나예모트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 여러 나라들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회의체를 갖고 있었는데, 대체로는 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유력자들이 모이는 귀족정의 형태였지만, 일부 일반 시민들에게도 열려있는 민회의 형태를 띠기도 하였다. 이 회의체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민주주의로 운영되던 그리스의 회의체들이며, 이웃나라인 공화정 로마의 원로원이나 민회들도 매우 유명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제가 회의나 신라의 화백 회의 등이 존재했다. 영국에도 이러한 회의체가 있었는데, 고대 브리튼인들 사이에서도 부족 간의 협의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43년경부터 로마가 브리튼 섬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적어도 로마인이 다스리던 지역에서는 로마식의 회의체가 운영되었을 것이다. 이후 점차 로마가 쇠퇴함에 따라 브리튼 섬에는 게르만족인 앵글로색슨족이 활발히 진출하였는데, 이들은 7세기부터 '위테나예모트'라는 일종의 귀족 회의체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는 고대 게르만족의 회의기관이나 민회인 '팅크'에서 시작되어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국은 다른 국가들과 다른 점이 있었는데, 고대에서 중세로 시대가 넘어가면서 많은 나라들이 왕권이 강화되어 의회가 사실상 왕의 자문기구 정도의 역할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영국의 특성으로 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영국은 선주민족인 켈트족 계열의 브리튼인과 로마 시대에 건너온 앵글로색슨족, 그리고 그 이후에 넘어온 노르만족까지 여러 민족이 차례로 패권을 차지하며 섞여 살게 되었고, 특별한 수도를 두지 않고 필요에 따라 자리를 옮겨 다니며 통치하였으며, 특히 '윌리엄 1세'를 시작으로 노르만 왕조가 시작되면서부터는 왕이 본토인 브리튼섬이 아닌 유럽 대륙인 노르망디에 기거하면서 양쪽을 왕래하면서 통치하였다. 이 때문에 왕은 효과적으로 영국을 통치하기 위해 토착 귀족들과 유력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영국에 영지를 하사 받은 귀족들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자치적인 방식으로 통치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전통은 이후 왕실이 프랑스 내의 영토를 모두 잃고 본토에서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로도 계속 유지되었고, 덕분에 의회에는 귀족들 뿐만 아니라 평민인 지역 유력자들도 참여하는 형태를 띠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대헌장과 권리청원
영국에서 이러한 의회의 권리, 즉 의회를 구성하는 귀족과 시민들의 권리가 명백히 보장된 것은 1215년 '대헌장'(마그나카르타)가 인정되면서부터 인데, 그 내용 자체는 전통적으로 보장되던 귀족들의 권리를 왕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에 불과하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 따지자면 왕의 권리가 귀족과 그 협의체인 의회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는 것으로 절대왕권이 부정된 것이다. 대헌장 자체가 시민이나 의회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왕이 가지고 있던 권한 중 징세권이나 인신구속권 등 일부분이 제한되어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이는 의회가 단순히 왕의 자문 역할을 하던 것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명시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후 본격적으로 의회가 구성되는 등 왕과 의회에 의한 통치가 실행되기는 하였지만, 당시 시대상의 한계로 의회는 여전히 왕의 통제 아래에서 제한적인 기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학구도는 점차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왕과 귀족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 부유한 평민들이 늘어났고, 그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의회와 자신들의 권리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 왕실은 반대로 재정적으로 큰 위기를 겪었는데, 왕은 이러한 재정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추가적인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시도하였고, 이러한 시도는 납세자이기도 했던 의회 구성원들에게 결코 호의적인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왕과 의회는 극심한 대립상황을 겪었는데, 이 때문에 '제임스 1세'는 22년 간의 통치기간 동안 의회는 겨우 4번만 개최하였다고도 한다. 다음 왕인 '찰스 1세'의 통치 기간에도 왕과 의회의 대립은 계속되었는데, 찰스 1세가 '주교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배상금 문제로 의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의회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권리청원'을 제출하여 다시 한번 의회를 인정하고 법과 절차에 따라 통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시대 영국에서 있었던 왕과 의회의 싸움은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세금을 더 달라는 왕과 세금을 더 주기 싫다는 의회의 싸움이었는데, 일방적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편법적으로 세금을 징수하던 왕에 대해 의회의 권리와 전통을 존중하라는 의회의 요구는, 나아가 왕이 귀족과 의회, 그리고 시민들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해석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과 요구들은 후에 현대 영국 사회와 의회 정치의 근간을 이루게 되지만, 당시에는 갈등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였고, 결국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나 왕인 '찰스 1세'가 평민인 '올리버 크롬웰'과 의회파에 의해 처형되는 사태를 불러오게 된다. 한때 올리버 크롬웰의 잉글랜드 연방은 공화제를 표방하기도 하였지만, 이내 군사독재 정부로 변모하였고, 그 결과 왕정복고가 일어나 영국은 다시 왕국으로 복귀하게 된다.
명예혁명
상기한 내용은 기본적으로 왕과 의회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세력이 더 끼어 있는데, 바로 전통적인 기득권층인 종교계이다. 당시 유럽은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뉘어 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영국에서도 몇 차례 분쟁을 겪은 후 개신교인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시대의 성직자들은 전통적인 기득권층으로 의회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특히 잉글랜드 내전이 경우는 '청교도 혁명'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의회파가 개신교내의 청교도들을 선동하여 혁명의 원동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의회보다는 주로 교회와 왕이 대립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왕정복고 이후 두 번째로 즉위한 왕인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였는데, 당연하게도 개신교를 국교로 삼은 영국에서는 그가 재위하기 전부터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임스 2세는 박해받는 가톨릭을 위한 정책들을 폈는데, 비록 그 정책은 상당히 온건하고, 또 가톨릭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개신교도들은 그것을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제임스 2세가 영국을 다시 가톨릭 국가로 되돌릴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결국 개신교도였던 제임스 2세의 딸 '메리 2세'와 남편인 네덜란드 오라녜의 공작 '윌리엄 3세'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1688년 윌리엄 3세의 군대가 영국에 상륙하였는데, 이미 영국 내부에서는 의회의 의원들을 비롯하여 많은 개신교도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제임스 2세가 군대를 이끌고 나가자 런던에서는 반 가톨릭 폭동이 일어나는 등 상황이 좋지 못하였고, 두 군대의 첫 접전은 매우 소규모로 사상자가 15명 정도에 불과하였는데, 이후 총사령관을 비롯한 여러 지휘관과 병사들이 제임스 2세의 진형을 이탈해 윌리엄 3세에게 가담하였고, 둘째 딸인 '앤 스튜어트'도 아버지를 배신하고 윌리엄 3세에게 투항하였다. 그 상태로 제임스 2세는 윌리엄 3세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되었고, 자신의 군대도 믿을 수 없게 된 제임스 2세는 군대를 해산하고 퇴각하게 된다. 결국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제임스 2세는 저항을 포기하고 프랑스로 탈출을 시도하였는데, 그마저도 어부에게 잡혀 런던으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이후 윌리엄 3세는 제임스 2세를 다시 프랑스로 탈출하도록 도왔는데, 이는 앞으로 영국의 정권을 잡기 위한 걸림돌을 없애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회는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도주하려고 한 행위를 영국의 왕위를 포기한 행위로 간주하였고, 이를 빌미로 왕위가 공석이라고 선포하였으며, 왕위 계승자였던 메리 2세에게 왕좌를 넘겨주고 윌리엄 3세를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권리 장전'이 승인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영광스러운 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고 하는데, 동양에서는 흔히 '명예혁명'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예롭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수이기는 하나 첫 접전에서 공식적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비공식적으로도 각지에서 일어난 개신교에 의한 반 가톨릭 폭동과 혁명 이후 일어난 가톨릭에 의한 폭동에 의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듬해에 제임스 2세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아일랜드에 상륙하면서 일어난 전투에서도 상당한 숫자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혁명이라고 부를 수 없는데, 이 행위를 통해 명백하게 통치 구조나 권력이 바뀌지도 않았고, 권리청원으로 의회에 의해 요구된 내용도 대부분 전통적인 의회의 권리를 존중하라는 기존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 덕분에 의회의 권리는 명확하게 정리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시민의 권리에 대한 부분도 추가되기도 하였다.
권리 장전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는 영국의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의회에 협력해야 했고, 의회는 그들에게 권리 장전을 승인할 것을 요구했다. 권리 장전의 기본적인 내용은 의회의 권리에 대한 것인데, 법률의 적용, 면제, 집행, 정지와 과세, 평시의 상비군을 편성하는 행위들은 모두 의회의 동의를 얻도록 했으며, 의회의 선거의 자유, 발언의 자유, 청원권 등을 보장하도록 했다. 또 의회의 소집을 강제하고, 의원들의 면책 특권이나 신제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도록 하는 등 의회 정치가 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이로서 영국은 '입헌군주국'으로 한발 나아가게 된다. 또 권리 장전에는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종교 문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왕위 계승자에서 가톨릭교도를 배제하게 함으로써 영국 내에서 개신교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헌장으로부터 시작하여 권리 청원, 권리 장전, 명예 형명 등은 이후 미국과 프랑스에 큰 역향을 미쳐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발생하는 토대가 되기도 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은 덕분에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 현대 영국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의회 정치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는데, 영국 의회의 하원 의원들은 국민들에 의해 투표로 결정되기는 하나, 직접 국가를 운영하는 총리와 내각은 국민들의 뜻과 관계없이 다수 당의 의사에 따라 구성되며, 상원의 경우는 투표와 관계없이 귀족들이나 왕이 임명한 의원들로 구성된다. 비록 입법 과정이 하원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하나, 형식적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상원에 의해 개정될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 왕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절차상의 문제로 현실적으로 민주주의에 가깝게 운영되기는 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형식을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또 영국에는 명확히 규정된 성문 헌법이 없는데, 이는 헌법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이전부터 운영된 영국 의회의 전통에 기인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의회에서 입법되는 법의 한계를 규정하지 못하는 것으로, 의회가 법을 규정하는 것으로 그 어떤 폭거를 저지르더라도 제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영국은 근대 민주주의의 모태가 되었고, 의회 정치를 열어 영국 의회가 '의회의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상당히 특이한 형태의 정치 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