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독일 독일 제국을 만든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 역사
- 2023. 11. 16.
혈기왕성한 청년시절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는 1815년에 프로이센 왕국 작센 주의 쇤하우젠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지역 지주에 해당하는 '융커' 귀족 집안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도 영지에서 농장을 운영하였다. 반면 비스마르크의 어머니는 베를린의 학자 집안 출신이었는데, 비스마르크와 형제들은 그녀의 교육 방침에 의해 어린 시절부터 기숙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해야 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언어에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의사소통 및 서신 교환이 가능할 정도였다고 하며, 그 외에도 영어와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지리나 통계학에 능했으며, 역사에도 관심을 두었던 것 같지만 대체로 공부에 큰 관심이 없어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1832년에는 하노버 왕국에 있는 괴팅겐 대학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학업을 등한시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즐겨 술과 도박에 빠져 큰 빚을 지기도 하였으며, 걸핏하면 결투를 벌여 재학 중에 총 25번의 결투를 벌이다가 수차례 학교 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괴팅겐 대학교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자퇴하였으며, 이후 베를린에 있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 시기 비스마르크는 정신을 좀 차렸는지 한동안 얌전하게 학업을 이어나간 것 같고, 1835년에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법관이 되기 위한 시험에 합격하여 법원 서기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금세 다시 본성을 드러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하엔과 포츠담에서 근무하는 동안 한 영국 소녀와 약혼을 하고 빚을 지었으며, 몇 주 동안이나 무단 결근하는 등 태만한 생활을 하다 면직당하게 된다. 곧 외교관 시험 동기의 도움을 받아 재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번엔 다시 영국 귀족 소녀를 따라다녔으며,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여행하기 위해 넉 달 동안 무단 결근하는 등 파행을 일삼게 된다. 이런 기행은 1838년 그 소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일련의 행동들과 그동안 쌓인 빚 때문에 일종의 도피성 입대를 하게 된다. 당시 프로이센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1년 동안 장교로 군 복무를 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체력과 결투에서 부상당했던 오른팔을 근거로 면제를 요청하기도 하였지만 거절당하였고, 사실상 반 강제로 그라이프스발트에서 예비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비스마르크는 군 생활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며 태만한 태도를 계속 유지하였지만, 다행히도 너그러운 상관을 만나 별다른 제재를 받지는 않았고,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에서 농업을 공부하는 등 무난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이듬해인 1839년에는 군생활을 끝내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농장으로 돌아가 농업에 전념하였다고 하는데, 꽤 수완이 있었던지 몇 년 만에 그동안 진 빚을 모두 갚았다고 한다. 1842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그는 영국과 프랑스, 스위스 등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고, 독서를 통해 역사와 철학 등을 공부하면서 정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정치 입문
비스마르크는 본래 종교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은데, 1844년 '요하나 폰 푸트카머'와 만나면서 개신교의 경건주의 신앙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그는 농장을 떠나 다시 도시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하려는 마음을 갖기 시작한 것 같은데, 1846년에 요하나와 결혼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고, 1847년에 당시 프로이센의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프로이센 통합의회를 열자 의원으로 출마하였다. 이때 비스마르크는 융커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의원으로 선출되는 데는 실패하였으나, 곧 지병으로 사퇴한 의원의 보결로 의회에 입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시기 프로이센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는데, 비스마르크와 융커들은 보수적인 왕당파 성향이었기 때문에 이들과 대립하였다. 특히 비스마르크는 왕과 귀족들의 권한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였기 때문에, 다른 의원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의원 대부분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요구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의회 자체가 일찍 해산하게 되었다. 이렇게 비스마르크의 첫 정치 활동을 생각보다 일찍 끝나게 되었지만, 그는 이번에는 쉽게 질리지 않은 것 같은데, 이듬해인 1848년 독일 각지에서 '3월 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강경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왕실 인사들을 찾아다니는 등 적극적인 왕당파적인 행보를 보였다. 결과적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교섭에 나서면서 사태가 일단락되었는데, 이때 비스마르크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직접 알현할 기회를 얻는 등 왕실과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1849년에는 프로이센 통합지방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가의 길을 걷기로 완전히 결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농장과 토지를 임대한 후에 베를린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철혈 재상
1851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독일 연방 의회 대사로 임명되어 프랑크푸르트로 향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능력 덕분이라기보다는 인맥과 일련의 행동들로 입증된 충성심 덕분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갑작스러운 출세 덕분에 여러 비난을 받기도 하였지만, 8년간의 대사 생활동안 정치적으로 상당히 성장할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극심한 보수주의적 성향에서 벗어나 좀 더 실용주의적으로 유연해졌으며, 독일 연방의 통일과 프로이센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1858년 임기가 끝난 후에는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대사직에서 물러났지만, 대신 이듬해인 1859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주재 공사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상당히 사이가 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의 황제인 '알렉산드르 2세'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임기 동안 상당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의 임기를 끝낸 후인 1862년에는 다시 프랑스 주재 공사로 근무하였고, 이 해 여름에는 영국을 방문하는 등 각 국을 돌며 '나폴레옹 3세'와 영국 총리였던 '헨리 존 템플'과 만나는 등 외교적 경험을 쌓았다. 그 사이 본국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뇌졸중으로 장애가 생겨 동생인 '빌헬름 1세'가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1859년 그는 '알브레히트 폰 론'과 '헬무트 폰 몰트케'를 중용하여 프로이센의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의회와의 논의 과정에서 마찰을 빚게 된다. 의원들은 근본적인 내용인 군사력 증강 자체에는 동의하였지만, 그 군사력이 남용되어 자신들에게 향할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렇게 빌헬름 1세와 의회가 옥신각신하는 동안 알브레히트는 이 일을 해결할 적임자로서 비스마르크를 급하게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1862년 프랑스에서 알브레히트의 전보를 받은 비스마르크는 즉시 베를린으로 출발하였으며, 베를린 인근에서 빌헬름 1세와 직접 만나 상의하였다고 한다. 빌헬름 1세는 서너 시간의 대화 끝에 비스마르크의 충성심에 대해 확신하였고, 그를 전격적으로 프로이센의 총리로 임명하게 된다. 비스마르크는 취임 연설에서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닌 피와 철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는데, 이 연설에서 그의 말을 따와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이 생겼으며, 그의 연설처럼 정책 또한 매우 강경하게 추진하여 의회와 헌법을 무시한 독재의 방식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다른 독재자들과 다르게 정적들을 물리적으로 숙청하는 방식을 사용하지는 않았는데,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부르주아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을 지원하기도 하였으며, 사회주의자들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자 복지 정책을 실시하여 그들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등 상당히 온건한 방식을 유지하였다. 또 전쟁을 통해 정책을 관철시키면서도 어디까지나 외교를 중시하는 자세를 잃지 않기도 하였다.
독일 제국의 성립
1863년 비스마르크는 관료 조직과 군대를 장악하였으며, 의회를 무시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등 강압적인 통치를 이어나갔으며, 수면 아래에서는 독일 연방의 주도권을 놓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듬해인 1864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덴마크와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을 벌였는데, 승리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각각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에 대한 지배권을 나누어 갖는 등 일견 화목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내 새로 얻은 영지를 이용하여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하였고, 물 밑에서 벌어지던 암묵적인 주도권 싸움은 점차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여 결국 1866년 오스트리아가 먼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사실 비스마르크가 파둔 함정이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는 재정난과 병력 손실에 시달리고 있었던데 반해 프로이센은 착실하게 전쟁 준비를 마친 상태였으며, 비스마르크는 미리 프랑스, 러시아 등과 접촉하여 전쟁에 개입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고, 개전 직전에는 이탈리아와 군사 동맹을 맺어두어 오스트리아를 남북에서 협공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었다. 그 결과 프로이센은 개전 3주 만에 홀슈타인 지역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어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괴멸시키면서 승리를 확정 지었다. 이때 빌헬름 1세와 프로이센의 장군들은 빈을 점령하여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려고 했다고 하는데, 비스마르크는 일부로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며 '프라하 조약'을 체결하여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주었다. 이 전쟁의 결과 독일 연방이 해체되고 오스트리아가 독일 통일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등 프로이센에게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프로이센 의회도 비스마르크에게 우호적인 보수파가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이전의 전횡들을 사후 승인 형태로 공식화할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북독일 연방을 새로 결성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느슨한 국가 연합체였던 독일 연방과는 다르게, 의장이 군사 지휘권을 갖고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등 특권을 가지고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단체였다. 이 북독일 연방의 의장은 빌헬름 1세가 되었으며, 연방의 수상에 비스마르크가 취임하면서 독일은 본격적인 통일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아직 커다란 걸림돌이 남아있었는데, 바로 인접 대국인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독일 남부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인접 지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독일 지역에 강력한 통일 국가가 생기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압도하기 시작하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이는 비스마르크에 의해 거절되었다. 1867년에 '런던 조약'으로 룩셈부르크에서 프로이센군이 철수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프랑스는 네덜란드로부터 룩셈부르크를 매입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이에 대해 북독일 연방의 동의를 얻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국제 여론이 나빠지면서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사이가 나빠지게 된다. 게다가 1868년에서는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부르봉 왕가'가 쫓겨나게 되었는데, 혁명을 주도한 자들이 빌헬름 1세의 친척인 '레오폴드 왕자'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하였다. 1870년 비스마르크는 독단으로 승낙 발표를 해버렸는데, 양쪽에서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한 프랑스가 극심하게 반발하였고, 프랑스 대사가 직접 빌헬름 1세가 머무르고 있던 엠스 온천까지 가서 이 결정을 철회받으려고 시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레오폴드 왕자는 스페인의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대사의 무례한 행동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발표하였고, 이 '엠스 전보 사건'으로 양국 관계가 극으로 치닫게 되면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또한 비스마르크가 사전에 의도한 전쟁으로, 프로이센은 사전에 철저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나폴레옹 3세는 개전한 지 2개월도 지나기 전에 스당에서 평화 협상을 제의하였지만, 비스마르크는 이 제의를 거부하고 계속 진격하여 이듬해인 1871년에는 수도 파리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때 빌헬름 1세는 점령 중이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에게 추대되는 형태로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였고, 이로서 독일은 통일되어 '독일 제2제국'이 성립되게 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평화협상에 합의하였는데, 이는 전쟁이 길어지면서 유럽 각 국의 태도에 변화가 생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맺은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방을 잃었으며, 50억 프랑의 배상금도 지불해야 했다.
은퇴와 말년
비스마르크는 1890년까지 독일 제국의 총리를 지냈는데, 이전까지의 강경한 자세에서 벗어나 좀 더 온건한 태도로 변화하였다. 사실 그는 독일을 통일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 같은데, 이를 위해서는 전쟁도 수단으로 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지만, 통일이 이루어지자 외교정책을 통해 유럽의 여러 세력들의 균형을 유지시켜 분쟁을 최소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켜 통일 완수에 방해받지 않으려고 했다. 내부적으로는 마르크를 통화 단위로 채택하고, 금본위 제도를 시행하는 등 제국 내부를 통합하는 일에 착수하였으며, 1875년에는 제국 은행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비스마르크의 통치 아래 독일 제국은 공업 분야가 유럽에서 가장 발전할 수 있었으며, 해외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늘리면서 영국과 프랑스 등 기존의 식민 대국과도 경쟁하였다. 또 '문화투쟁'을 통하여 가톨릭을 탄압하거나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기도 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주의자가 되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만들면서 독일 제국은 복지국가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88년 자신을 신임하던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3세'도 병으로 일찍 사망하면서 '빌헬름 2세'가 즉위하였는데, 그는 비스마르크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결국 비스마르크는 1890년에 총리직을 사임하고 은퇴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은퇴 후 프로이센의 영웅 취급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정치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신문 사설에 싣거나 회고록을 집필하는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비스마르크는 1896년부터 급격히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였다고 하며, 2년 후인 1898년에 사망하게 된다. 독일 제국은 비스마르크가 은퇴한 이후 그가 구도를 짜놓은 첨예한 외교 전략을 유지시키지 못하였으며, 이로 인해 유럽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결과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상이나 명분보다 실리만을 추구한 비스마르크의 정책은 반헌법적이고 비도덕적이기도 했으며, 진보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계속 유지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