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17대 황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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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적자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는 로마 제국이 16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의 아들로,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현직에 있을때인 161년에 출생하였기 때문에, 태어나서부터 황태자로서 로마 황궁에서 생활하며, 그에따른 대우를 받으면서 자랐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는 14명이나 되는 자식이 있었으나, 대부분이 어릴때 사망하여, 콤모두스는 외아들로서 명실상부 황제의 후계자로서 자랐다. 콤모두스가 황제로 취임한 후에 있었던 폭정들 때문에, 여러 안좋은 소문들이 많이 있으나, 기록에 이하면 그는 큰 키에 체격이 좋고 완력이 강했으나, 성격은 착하고 유순했다고 한다.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혈통을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기는 하겠으나, 그는 15대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손자이고, 현 황제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이며, 16대의 공동 황제였던 '루키우스 베루스'의 조카가 되기 때문에, 어렸을때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으며, 소위 정통성 있는 황제의 후계자로서 대우 받았다. 그래서 그는 단계를 밟아 공직경험을 쌓는 수순을 거치지 않고, 황실에서 소위 말하는 제왕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 미노르'가 사망한 이 후에는 정식 후계자로 선포되었고, 177년부터는 매우 어린 나이임에도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공동통치자로서 로마 북쪽의 '게르만족'을 견제하기 위한 전선에서 지내며 군경험도 쌓았다. 콤모두스가 폭군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아버지인 아우렐리우스를 살해하고 찬탈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지만, 이러한 점을 보면 생각하기 어려운 이야기인 것 같다. 동시에 생각해 볼만한 점은 상당히 이례적으로 어린 나이에서부터 공동 통치자로서 군 경험을 쌓는 등의 행적이 있는데, 이는 아버지인 아우렐리우스가 황제가 병약한 체질인데다, 어머니인 파우스티나가 사망하면서,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공고히 하기 위해 아우렐리우스가 조급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콤모두스가 어린 나이로 황제가 되었을때를 걱정한 아우렐리우스는 장녀인 '안니아 아우렐리아 갈레리아 루킬라'를, 당시 로마의 신참자였으나 뛰어난 장군으로 로마 군단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와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리고 아우렐리우스의 기대대로 퀸티아누스는 콤모두스의 연이은 폭정에도, 끊임없이 그를 위해 조언하였으며, 결코 아우렐리우스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콤모두스는 아우렐리우스의 기대를 완전히 져버린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로마에서도 유명한 폭군으로 평가되는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나 '네로'를 합친것 보다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황제 암살 미수 사건

180년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로마와 게르만족의 전선이었던 '빈도보나'(현제의 빈)에서 사망하였고, 전선에서 로마로 돌아온 콤모두스는 19세의 나이로 황제의 취임하게 된다. 이미 아버지가 황제였을때부터 정식 후계자로 선포되었을 정도로, 그의 제위는 모든 부분에서 준비되어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큰 이견이나 사건 없이 원로원의 승인하에 황제에 취임하였다. 곧바로 그는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평화협상으로 마무리 짓기로 하는데, 이에 대해 군부에서는 상당한 이견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게르만족과의 전쟁은 꽤 장기전이 되어있어, 그에따른 로마의 재정적 소모나 원로원의 불만도 있기는 했으나, 전쟁 자체도 상당히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끝을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후 게르만족과의 전쟁은 약 60여년 정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옳은 판단이었다고 평가되는 것 같다. 실제로 콤모두스가 즉위한 이후 약 2년여간은 치세 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젊은 황제 였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모난 행위를 하지도 않았고, 아우렐리우스 황제때부터 일해온 실무의 베태랑들이 요직에 두루포진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원래는 무난한 황제정도 였을 것이라고 재평가 하기도 하고, 황제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폭군이 되었을 거라고 이야기 한다. 그때까지는 그저 나이 어린 철없는 황제 정도로 평가 되었던 것이다. 콤모두스가 황제가 된지 2년이 지난 182년, 콜로세움을 방문하던 콤모두스는 암살자의 습격을 받았다. '원로원이 너에게 이 칼을 보내노라'고 외치느라 호위병들에게 잡힌 어리숙한 암살자였기 때문에 신체적 상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이 암살 미수 사건은 콤모두스에게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안기게 된다. 잡힌 암살범은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로 콤모두스의 매형이 되는 장군 퀸티아누스의 조카 였다. 이후 이루어진 고문을 동반한 조사 결과는 젊은 황제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돌아왔다. 암살의 주범은 바로 자신의 누이인 루킬라였다. 그리고 그녀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인 '루킬라 플라우티아'와 그 외에도 황제의 친인척들이 이름이 줄줄이 나왔고, 암살자가 밝힌 것처럼 원로원의 유력 의원들의 이름도 거론되었다. 뿐만 아니라 콤모두스가 총애하던 시종인 '사오테루스'가 별개의 사건으로 살해되었는데, 황제의 근위대장 중 한명인 '타루티에누스 파테르누스'가 연루된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콤모두스의 입장에서는 그야 말로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상태였을 것이다. 콤모두스는 이 사태를 계기로 성격이 180도 바뀐 것처럼 행동했다고 하는데, 어렸을때 착하고 유순했다고 평가받은 성격과 다르게, 아주 냉정하고 무자비했다고 한다. 암살 사건에 연루된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거나 추방당했는데, 주범인 누이인 루킬라와 그녀의 딸인 플라우티아는 명목상 '카프리 섬'으로 유배되었으며, 이후 사람을 보내 처형하였다. 당시는 적법한 절차도 밟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처벌 당했다고 할정도로 혼란스러웠던 것 같은데, 주범의 남편이었던 퀸티아누스는 조사 결과 범행과 무관한 것이 들어나서 숙청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은 자신을 가까운 친족들이 암살하려 한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아, 의심암귀에 휩싸여 과대망상 증이나 우울증을 앓았을 거라고 생각되기도 하는데, 반대로 조사로 인하여 생각보다 많은 가족들이 그의 암살 미수 사건과 무관하였음이 밝혀졌고, 그들이 계속 콤모두스에게 신임 받았다는 것을 보면, 그의 폭정이 단순히 암살 미수 사건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 암살 미수 사건이 그의 폭정을 일으키는 트리거 역할을 하였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는 사건 이후 암살을 두려워하여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피하고, 남은 한명의 근위대장인 '섹스투스 티기디우스 페렌니스'를 의지하여, 그를 통해 국정을 수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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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렌니스와 클레안데르

페렌니스의 출생이나 성장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그는 전부터 근위대에서 근무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단독 근위대장으로서 콤모두스와 황실의 호위를 책임지는 입장으로 콤모두스에게 상당히 의지되었던 것 같다. 페렌니스는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실권을 잡았으며, 이러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콤모두스를 정치와 멀어지게 하고, 유흥과 향락에 빠지도록 유도 했다고 한다. 이때 콤모두스는 애첩과 결혼하기 위하여 황후였던 '브루티아 크리스피나'를 누명을 씌워서 로마에서 추방하고, 이후 자객을 보내 살해하였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페렌니스는 제국 각지에서 미녀 300명과 미소년 300명을 선발해서 황궁으로 보내고, 매일같이 파티를 열게하여 콤모두스의 관심을 제국 운영에서 멀어지게 했다. 페렌니스는 많은 유력자들을 반역죄로 고발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착복하는 등의 행위를 일삼았지만, 생각보다 제국을 운영하는데에 있어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상 페렌니스의 로마 통치는 3년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185년 페렌니스와 그의 아들들은 콤모두스에게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페렌니스에게 불만을 품은 브리타니아 군단에서 1500명의 병사들이 대표로 로마로 찾아와 콤모두스에게 위험을 경고했다고 하는데, 페렌니스가 콤모두스를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하려고 했다고 하기도 하고, 브리타니아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페렌니스가 가혹한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그를 처단하기 위해 헛소문을 퍼트렸다고도 한다. 명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실권을 잡았던 페렌니스가 사라지면서, 콤모두스가 다시 정치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 졌지만, 콤모두스는 다시 자신의 시종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레안데르'(크레안드로스)에게 모두 맡겨버렸다. 클레안데르는 그리스 노예 출신으로 황궁에서 일하다가 행방된 해방노예였다. 이 그리스 출신의 해방노예는 정도를 몰랐던 것 같은데, 전임자인 페렌니스 보다 더 악평을 받고 있다. 그는 부를 축적하고 콤모두스를 로마와 격리하기 위해 매관 매직을 일삼았는데, 어느 해에는 로마의 집정관이 무려 25명이었다고 한다.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자리를 공공연히 판매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근위대장의 자리에도 올랐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안들거나, 자신을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누명을 씌워서 처형하는 것도 계속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폭정 속에서도 로마 시민들은 생각보다 큰 반발은 없었던 것 같은데, 결국 로마 시민들이 돌아서면서 클레안데르의 횡포도 막을 내리게 된다. 190년에는 로마는 곡물 부족에 시달리고 전염병까지 돌았던 것 같다. 이때 로마에 소문이 돌았는데, 바로 클레안데르가 곡물을 매점매석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클레안데르에게 불만이 있었던 그의 정적들이 퍼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금방 확실한 효과를 보여주었다. 성난 로마 시민들은 봉기하여 당시 콤모두스가 머물고 있던, 로마 남쪽의 '퀸틸리 빌라'까지 쳐들어갔고, 클레안데르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다. 놀란 콤모두스는 급히 클레안데르를 살해하여 민중들을 진정시켰다고 한다. 자신이 충신이라 믿었던 페렌니스에 이어 클레안데르에 의해 이러한 사태를 겪게된 콤모두스는 더 이상 대리인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콤모두스가 로마로 돌아오자 로마 시민들이 환호했다고도 한다.

로마의 헤라클레스

콤모두스는 로마로 돌아왔으나, 이미 거의 8년에 걸친 무질서한 통치로 인하여 제국을 다시 운영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동안 많은 관료들이 숙청당하였으며, 자신을 끝까지 지지하고 도와주었던 매형인 퀸티아누스도 건강을 이유로 은퇴하여 시골로 돌아가버렸다. 그나마 둘째 매형이었던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가 로마에 남아서 그를 도왔다. 로마로 돌아와서도 그는 애첩인 '마르키아 아우렐리아 세이오니아 데메트리아스'와 새로운 시종인 그리스 노예, 근위대장인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를 신뢰하고 의지했던 것 같다. 이미 오랜 유흥과 향락, 그리고 몇차례 있었던 암살과 농민봉기 등으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스스로 원로원에게 자신을 신격화 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을 '제우스'의 아들인 '헤라클레스'로 불러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어 자신을 헤라클레스로 묘사한 조각상들을 세우게 하고, 직접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과 싸우기도 하였다. 이것이 그의 정신적 문제가 심해진 것인지, 단순히 그가 표면에 등장함으로 인해 들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기행들을 본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가 정신나간 폭군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건장한 체격과 강한 완력으로 꽤 뛰어난 검투사 였던 것 같으며, 검투시합에서 그에게 희생당한 상대는 범죄자들로 전문 검투사들에게는 항복을 받아내는 것으로 승리하였기 때문에 희생자는 없었다고 한다. 그것이 그의 실력 탓인지, 아니면 그의 권위에 복종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기린과 얼룩말을 포획하고, 코끼리 3마리를 제압하였으며, 하루에 100마리의 사자와 곰을 때려죽인적이 있다는 것을 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검투사가 아니라 황제였다. 191년에는 로마에 큰 화재가 나서 로마의 거의 절반이 타버렸다고 하는데, 콤모두스는 많은 사재를 내어주어 재건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런 업적을 치켜세우며 로마를 자신이 다시 세웠다는 뜻으로 '콜로니아 콤모디아나'라고 명명하였다. 이런 소위 막장 황제를 로마 시민들도 달갑게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콤모두스의 최후는 자신의 행동만큼이나 막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황궁을 나가 검투사 숙소에서 살면서 아예 검투사가 되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에 그의 애첩인 마르키아와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가 이를 말렸는데, 화가난 콤모두스는 두 사람의 처형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결국 마르키아가 콤모두스의 음식에 독을 탔고, 독을 먹고도 죽지 않고 욕실에서 토하며 괴로워하던 콤모두스에게, 그의 레슬링 교관을 보내서 목을 졸라 살해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가 192년의 겨울이었는데, 로마에서는 콤모두스가 자신이 임명한 두명의 집정관을 살해하고, 검투사의 모습으로 원로원을 찾아가서 검투사 집정관으로 취임할꺼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내용을 보면 위 내용이 사실이었는지는 상당한 의구심이 생긴다. 실제로 이미 황제 암살 시도가 몇차례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암살에 콤모두스의 정적들이 도왔다는 내용을 보면, 그저 구실에 불과했거나 이유 자체가 날조 되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로마의 폭군은 암살되었고, 원로원에 의해서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로마의 쇠퇴는 시작에 불과했다. 콤모두스 사후 193년은 소위 '다섯 황제의 해'로 불리우는데, 무려 한해에 5명이나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그 첫번째가 바로 '푸블리우스 헬리우스 페르티낙스'인데, 해방노예 출신인 이 장군은 콤모두스의 측근인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의 지지를 받고 새 황제로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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