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18대 황제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 역사
- 2023. 2. 14.
다섯 황제의 해의 첫번째 황제
일반적으로 고대의 신분제 사회에서는 평민이나, 하물며 노예가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물론 이러한 점은 현대사회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는 해방노예의 자식으로 로마 제국의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간 매우 드믄 예 중에 하나이다. 페르티낙스는 이탈리아의 북서부 도시인 '알바폼페이아'(현재의 알바)에서 해방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서, 거의 30세가 다되도록 가정교사로 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늦은 나이었지만 출세하기 위해 로마 군단에 입대하여 군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반 병사부터 시작하였지만, 부모의 옛 주인이었던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차츰 진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런 도움 뿐만 아니라 그의 개인 적인 능력이나 인품도 뛰어났던 것 같은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 시절인 161년에 벌어진 '파르티아' 전쟁에서는 공동 황제인 '루키우스 베루스' 휘하에서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 이 전쟁 이후로 페르티낙스는 원로원 의원이 되면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페르티낙스는 재무관이나 법무관의 공직을 거쳤고, 보결 집정관으로 짧은 지만 집정관도 역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러 속주에서 총독을 지내면서 행정 경험을 쌓았고, 그가 거친 속주들이 주로 로마의 최전선인 것도 있어 군 내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던 것 같다. 일병졸부터 시작하여 로마 군단의 사령관까지 지냈던 그는, 이런한 자신의 경력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는 후에 황제의 자리에 취임한 후에 독이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만들어진 황제의 자리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가 17대 황제로 취임한 이후에도, 페르티낙스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상당히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황제 암살 미수 사건 이후에도 숙청되지 않았으며, 계속 공직에 있으면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콤모두스 아래에서 권력을 쥐고 흔든 근위대장 '센스투스 티기디우스 페렌니스'와 해방노예이자 콤모두스의 시종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레안데르'에게 상당한 미움을 받은 것 같은데, 당시 그는 '브리타니아' 속주로 사실상 좌천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 성공적인 임무수행에도 불구하고, 공적을 인정받기는 커녕 불명예스럽게 사직하기도 했다고 한다. 페렌니스는 현직 근위대장이었고, 클레안데르가 스스로 근위대장에 취임했던 것을 보면 로마의 근위대와 페르티낙스는 상성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로마는 지중해를 기준으로 엄청난 규모의 영향권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일대, 이베리아 반도와 프랑스 일대, 영국의 일부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을 포함하며, 그리스와 터키를 포함하여 흑해 연안과 아라비아 지역까지 걸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는 공화정 때처럼 필요할때 군단을 모집하고 창설하는 것이 아니라, 각 속주에 상시 주둔하고 있는 군단이 있었다. 하지만 '프라이토리아니'라고 하는 근위대는 별도로 로마에서 황제를 호위하기 위하여 존재하였으며, 둘 사이에서 자부심이나 처우 등의 문제로 인한 심리적 갈등도 충분히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이유가 어찌되었던 간에 페르티낙스는 끝까지 근위대와는 사이가 좋을 수 없었던 것 같다. 192년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당하고, 주범인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는 당시 로마에 있던 페르티낙스에게 찾아가 황제가 될 것을 권유했다. 황제가 되면 로마의 시민들이나 근위병들에게 일정한 금액의 돈을 나누어주는 문화가 있었는데, 그는 근위대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근위병에게 12,000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후 콤모두스 황제에게 불만이 가득했던 원로원에 찾아간 그는, 전 황제의 사망 소식을 알리고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의 자리에 취임하게 되었다. 돈을 나누어주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혈통적 정통성이나 정치적 정통성이 전혀 없는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 근위대의 지지를 받기 위해 돈을 지불하기로 한 것이긴 하나, 황제의 암살범이 황제 사망 사실을 귀뜸해 주면서 한 약속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실상 황제의 자리를 돈으로 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런 약속이 없었다면, 약속을 한 다른 누군가가 황제가 되었을 것이 자명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실을 페르티낙스 본인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를 대장으로하는 근위대는 자신들이 페르티낙스를 황제로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리한 개혁
사실상 어떤 정통성도 없는 페르티낙스가 황제로 취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에서는 별다른 반대가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전 황제인 콤모두스가 로마에서 인기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 될 것이다. 물론 페르티낙스는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 중심이 정치를 할 것을 선언하고, 콤모두스에 의해 고발된 자들을 사면해 주었으며, 로마 시민들에게 축하금을 지급하는 것도 잊지않았다. 이러한 로마가 언뜻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가는 듯한 모습에 사람들은 별다른 반발없이 안심하였던 것 같다. 로마의 시민들은 새 황제를 환영했고, 여러 속주의 총독들도 반기를 드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페르티낙스가 적극적인 지지를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으로 페르티낙스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커다란 오판을 하게된다. 로마 시민의 지지를 얻은 페르티낙스는 약속을 깨고 근위대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콤모두스 황제 시절의 폐단을 지적하며, 근위대를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그들의 권한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이에 반발한 근위대는 원로원 의원 중에 한사람을 골라 자신들 멋대로 황제로 선포하였으나, 이러한 혼란에 말려드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그 의원은 이를 페르티낙스에게 알려주고서는 로마를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페르티낙스는 이러한 대놓고 하는 반역적 행위에도 근위대를 직접적으로 제지하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이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으면, 동시에 과거의 경력을 바탕으로 로마 군단의 지지도 얻고 있기 때문에, 근위대가 쉽게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 한 것 같다. 페르티낙스는 근위대의 이러한 행위를 짓누르기 위해 오히려 로마 시민들의 더 강력한 지지를 얻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콤모두스 황제 시절, 페렌니스나 크레안데르의 부패와 막장 행보는 많은 로마 시민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을 이용하여 궁정의 행정관료들 중에, 특히 해방노예들을 중점적으로 횡령 등으로 고발하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페르티낙스의 의도대로 로마 시민들의 지지는 불러왔지만, 동시에 궁정의 관료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안 그대로 지지기반이나 정치적 기반이 부족했던 페르티낙스는, 우군을 만드기 위해서 적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 황제의 폭정으로 인해 고갈된 국고를 채우고, 제정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취한 조치가, 바로 전 황제가 했던 매관매직이었다. 이런 이중적 태도는 그의 평판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고, 원로원에서의 인기도 추락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두번째 쿠데타 시도가 있었는데, 페르티낙스가 정무를 위해 '오스티아' 항구를 방문 했을때, 근위대가 다시 한번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려고 한 것이다. 근위대는 콤모두스의 친척이 되는 '퀸투스 소시우스 팔코'를 황제로 내세우려고 했는데, 소시우스 팔코는 페르티낙스가 황제가 되면서 사면받은 은혜가 있어서, 원로원에 자진출두하여 음모에 대해 고백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한 결과로 소시우스 팔코는 사면되었지만, 일부 근위대 병사가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런 두차례의 근위대에 의한 쿠데타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몇주 후인 193년 3월에 약 300명에 달하는 근위대가 '팔라티노 황궁'을 급습하였다. 그러나 황궁의 호위병이나 관료들 중 아무도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문을 열어주고 황제를 죽이라고 독려했다고 한다. 일부 페르티낙스의 측근들만이 황제에게 자리를 피하라고 권유하였지만, 페르티낙스는 거부하였다. 로마 군단의 병사로 시작하여 여러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페르티낙스는 두려움없이, 반역 세력을 설득하거나 혹은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근위대는 황제를 보자마자 말할 틈도 없이 칼을 휘둘러 살해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폭군이 물러가고 취임한 새 황제는 겨우 3개월 남짓한 임기를 마치고 사망하였다. 이렇게 다시한번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에 이해 비어진 황제의 자리는, 다음 주인이 와서 사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