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의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 역사
- 2023. 2. 10.
황제의 자리가 약속된 남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는 15대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양자로서, 그의 사망 후 양형제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같이 황제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사실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는 14대 황제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가 안토니누스에게 양자로 들일 것으로 지정한 것으로, 하드리아누스가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볼 수 있다. 황제가 되었던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세운 후계자를 거부하고, 새로운 후계자를 세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온화한 성격 때문인지, 그러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약삭빠르게 행동한 모습도 보이는데, 하드리아누스가 안토니누스의 딸은 베루스와 약혼 시키고, 아우렐리우스는 베루스의 남매인 '케이오니아 파비아'와 약혼하였었다. 그런데 안토니누스는 딸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 미노르'(小 파우스티나)와 베루스 사이에서 약혼을 파혼시키고, 아우렐리우스와 결혼하도록 주선하였다. 실제로 황제의 자리에는 아우렐리우스가 베루스가 공동 통치의 형태로 같이 취임하였지만, 그것이 아우렐리우스의 배려에 의한 것임을 감안하면, 안토니누스는 딸이 확실히 황비가 될 수 있도록 미리 손을 써둔 셈이 된다. 아우렐리우스는 어렸을때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귀족식 교육을 받아왔는데, 황제의 후계자가 된 이후에는 '헤로데스 아티쿠스'와 '라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같은 이들을 스승으로 두고, 황제에 걸맞는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어렸을때부터 재능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유로 하드리아누스가 후계자로 내정 한 것이며, 안토니누스도 딸의 사윗감으로 점 찍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스승이었던 코르넬리우스 프론트 같은 경우에는 당대 제일의 지식인으로 불리웠으며, 로마에서는 그 유명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다음가는 인물 이라고 평가 받았다고 한다. 이런 좋은 스승을 둔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이자 동시에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이기도 했는데, 그가 저술한 '명상록'에는 사려깊고 공명정대한 성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도 있어 그는 후세에도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후계자의 특권
아우렐리우스는 안토니누스의 배려로 황제가 되기 전에 파격적인 공직경험을 쌓고 있는데, 불과 18세에 재무관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40년에는 19세의 나이로 집정관에 취임하였다. 이는 당시 로마가 제정이었음을 가만하더라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로마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과거 로마 공화정 시절에는 로마의 비상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영웅 '푸블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나이를 문제로 집정관 입후보을 거부당한 일이있다. 이러한 점에서 로마가 황제의 통치하에서 더 유연해 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황제와 그 측근들에게 특혜가 당연시 될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볼 수 있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오현제' 중에 한명으로 평가 받고 있지만, 그의 통치 시기에 흔들리는 국제정세를 포함하여, 이러한 점들을 보면 로마가 쇠퇴해가는 이유중에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과거 로마 왕국 시절부터 로마를 위해서는 출신이나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요시하던 것에 비해서, 이러한 특정 인물의 판단이나 인맥 등에 의해서 전통이 좌지우지 될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양형제인 베루스 또한 153년에 재무관을 지내고, 154년에는 24세의 나이로 집정관에 취임할 정도로 상당한 특혜를 누렸다. 아우렐리우스는 24세 무렵에 다시 한번 집정관을 지냈으며, 아내인 파우스티나와의 사이도 좋아서 14명이나 자식을 낳았다고 한다. 안토니누스는 딸 사랑이 각별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직 황비의 자리에 오르지도 않았던 파우스티나에게 통상 황제의 아내에게 주어지는 '아우구스타'라는 존칭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61년 안토니누스가 사망하면서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의 자리에 취임하게 된다.
고난의 연속
안토니누스가 사망하자 원로원은 아우렐리우스가 단독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승인하였는데, 아우렐리우스는 이를 거부하고 베루스와 함께 공동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원로원이 승인하면서, 로마 제국을 두 명의 황제가 통치하는 첫 사례가 된다. 이는 과거의 사례들을 보면 내부적으로 상당히 위험한 구조가 될 수도 있었지만,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 사이에서 서로를 향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시기 로마는 내부의 적보다는 외부의 적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 황제로 취임한 해인 161년은 기후가 좋지 않아 작황이 별로 였던 것 같은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테베레 강'이 범람하여 로마의 대부분을 침수시켰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많은 가축이 죽고, 도시는 기근상태에 빠졌다. 뿐만 아니라 '시지쿠스' 일대에서는 지진이 일어나고, '갈라티아' 일대에서는 가뭄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브리타니아 속주'의 반란이나, '게르만족'의 위협, '파르티아' 왕국의 근심거리에 비할 수 없었다. 안토니누스 황제의 집권기 동안 잠잠하던 파르티아 왕국은 '볼로가세스 4세'가 즉위하고, '아르메니아'와 '시리아'를 침공하였다. 당시 로마와 파르티아 왕국 사이에 위치한 '대아르메니아' 왕국은 양국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로마에서 인정받은 왕이 즉위하여, 로마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볼로가세스 4세는 대아르메니아의 왕을 쫒아내고, 자신의 가문 출신인 '파코루스'를 왕좌에 앉혔다. 당시 '카파도키아'의 총독은 '마르쿠스 세다티우스 세베리아누스'로 군 경험치 풍부한 갈리아 출신 인물 이었는데, 그는 쉽게 파르티아를 물리칠 것이라는 예언가의 말만 믿고, 한개의 군단만을 이끌고 진격하였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대장군에게 매복당하여 패배하였으며, 세베리아누스는 자결하였고, 그의 군단은 출정한지 3일만에 괴멸하였다. 이에 로마에서는 베루스를 총지휘관으로 하여 동방에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외부의 적에 대한 대응에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 황제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두 황제는 모두 군사적인 공직 경험이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두 황제 모두 군사적인 재능 또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황제는 자신이 직접 군단을 지휘하기도 하였지만, 상징적으로 출정하는 의미가 많았긴 한데, 베루스의 동방 원정은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주로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온천이나 유흥을 즐겼다고 한다. 그 때문에 현지에 파견된 사령관들은 전쟁의 방침을 정하고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로마의 아우렐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에서 파견된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나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같은 지휘관들의 활약으로 대아르메니아에서 파르티아를 몰아 냈으며, 곧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침공하여, '셀레우키아'와 '크테시폰'까지 점령하였다. 볼로가세스 4세는 로마와 평화협상을 하였으나, 메소포타미아의 서부지역을 로마인들에게 내어주어야 했다. 동방 원정을 성공하고 로마로 돌아온 군단은 개선식을 거행했지만, 이때 주목 받은 것은 실제 참전하지도 않은 두명의 황제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가족들도 개선식에 참가하였으며, 전쟁의 승리로 받은 칭호들 또한 황제들의 것이었다. 비록 아우렐리우스는 칭호를 거부하는 등 겸손의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군단의 지휘관이나 병사들의 기분은 좋지많은 않았을 것이다.
역병과 루키우스 베루스의 사망
로마의 문제는 동방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에 의해 로마의 국경기지 중 한곳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게르만족과의 경계 지역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로마 군단들이 주둔해 있었고, 이에 따라 지역에 고착되어 뇌물을 받는 등 부패가 만연했던 것 같다. 여러 총독들이 황제의 친척들이나 친구들로 대체되었고, 이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아우렐레우스는 상당히 노력한 것 같다. 그러나 168년 게르만족 중 하나인 '마르코만니족'이 로마의 영토를 침입하였고 '다브뉴 강'(도나우 강) 근처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파르티아 원정에 참전했던 로마 군단은 복귀할때 전염병을 가지고 복귀하였는데, '안토니누스 역병'으로 불린 이 전염병은 로마에 상당한 피해를 입힌 것 같다. 이러한 전염병은 로마와 로마 군단을 약화시켰고 게르만족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북부 이탈리아 지역까지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고, 이에 아우렐리우스는 급하게 로마 군단을 이끌고 방어하였다. 당시 로마는 이미 계속되는 재난으로 국고가 바닥나 있었는데, 아우렐리우스는 황실의 재산을 팔아서 국고를 체웠다고도 한다. 로마 군단은 게르만족을 몰아내고 평화협상을 하였는데, 169년 전쟁에 참전하고 있던 베루스는, 로마로 복귀하던 도중 병으로 사망하였다. 건강하던 황제가 갑자기 사망한 것 때문에, 그도 안토니누스 역병으로 사망한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게르만족의 침입이 있었고, 아우렐리우스는 이를 방어하면서 안토니누스 황제의 긴 평화시대로 인해 저하된 로마 군단의 능력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는 동안 동방의 안정을 확실히 하기 위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시리아이 총독으로 임명하여 동방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 같은데, 175년 갑작스럽게 황제를 참칭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게르만족과 분쟁하고 있던 다브뉴 강 전선에서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듣고는, 그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동방 일대의 군대가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는 것을 보면, 그의 당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반란이었기 때문에, 황후인 파우스티나가 아들인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를 황제로 앉히기 위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부추긴게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당시에는 실제로 아우렐리우스는 상당한 병을 앓았던 것 같은데, 아들인 콤모두스가 너무 어릴때 황제가 사망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누군가를 황제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죽기를 바라지 않으며,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원로원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였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그의 출신지 문제도 있어, 동방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그를 지지한 군단이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동원할 수 있는 군단 보다 숫자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은 아우렐리우스가 군단을 모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공격한다는 소식에,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백부장 중 한명이 카시우스를 살해하면서, 겨우 3개월여만에 끝나게 된다. 아우렐리우스는 반란에 연루 사람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하였으며,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동방 순회를 계속 하였다. 그러한 동방 방문 도중 황후인 파우스티나가 사망하였고, 많은 자식들 중에서도 남자 형제들이 모두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외아들인 콤모두스만이 공식 후계자가 되었다.
게르만족 문제와 황제의 사망
아우렐리우스는 178년에 다시 게르만족 문제로 인하여 다브뉴 강 전선으로 향하였다. 잇따르는 문제로 인해서 게르만족 문제는 완전히 봉합되지 못하고 계속되었다. 평소에도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던 아우렐리우스는 이때 상당히 악화 된 것같은데, 그는 아들 콤모두스를 공동 통치자로 하여, 전선으로 불러들였다. 아마도 게르만족과의 전선을 정리하면서, 직접 후계자 교육을 챙긴 것 같다. 결국 아우렐리우스는 180년에 병사하게 되고, 그의 사망으로 콤모두스는 19세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아우렐리우스 치하에서는 워낙 로마 외부의 적이 커다란 이슈였기 때문에, 그의 법률이나 행정 활동에 대한 내용은 크게 다루어 지지 않는데, 많은 법률가들이 그를 '법률에 가장 노련한 황제'라고 칭찬하였으며, 원로원에서도 대단한 존경심을 표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의 행정 능력이나 인품은 상당히 훌륭했던 것 같다. 이러한 이유로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문제는 콤모두스를 차기 황제로 만들었다는 것 밖에 없다는 평가도 있다. 여담이지만 166년에 로마는 중국의 '한나라'와 접촉한 기록이 있는데, 이때 방문한 로마의 사절은 '대진'의 지배자 '안돈'의 대사라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는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혹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보낸 사절로 여겨지며, 이때 이미 서양과 중국간에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