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국 첫번째 잉글랜드의 왕 「애설스탠」
- 역사
- 2023. 8. 1.
알프레드 대왕의 손자
'애설스탠'은 894년경 잉글랜드의 웨식스 왕국에서 '에드워드'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잉글랜드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고대 로마 시대로, 기원전 55년경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 중에 바다를 건너 침공하였고, 이후 기원전 43년경에 로마 제국이 본격적으로 잉글랜드로 진출하여, 선주민족인 '브리튼인'들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웨식스 왕국은 게르만족의 하나인 앵글로섹슨족의 나라였는데, 게르만족들은 로마가 잉글랜드를 지배할 때부터 조금씩 이 지역으로 흘러들어왔으며, 로마가 잉글랜드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이후에 유입이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브리튼인들은 사실상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하여 서쪽의 웨일스 지역으로 밀려났고, 브리튼섬 중남부의 잉글랜드 지역에는 앵글로섹슨족이 세운 7개의 왕국이 자리 잡게 되었다. 웨식스도 그중에 하나였는데, 앵글로섹슨족들은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패권다툼하면서 발전하고 있었지만, 이내 대륙에서 '데인족' 바이킹들이 쳐들어오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애설스탠의 할아버지인 '알프레드 대왕'이 집권하던 시기에 앵글로섹슨 7 왕국은 웨식스를 제외하고 모두 데인족에게 점령당해 버렸지만, 그는 끝까지 데인족의 공격을 막아내어 웨식스와 앵글로섹슨족을 지켜냈으며, 데인족의 위협으로부터 안정적으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여러 지역에 나뉘어 살던 앵글로섹슨족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개혁을 진행하여 훗날 대왕의 칭호를 받았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에드워드 왕은 개혁을 통해 성장한 국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데인족을 공격하여, 잉글랜드 북동부에 위치한 '요크' 왕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되찾아 올 수 있었고,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였으며, 안정적인 상태의 왕국을 후계자인 애설스탠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반석이라고 할 수는 없었는데, 당시의 잉글랜드의 앵글로섹슨족은 모두 웨식스 왕국에 속해있기는 하였지만, 완전한 왕권아래 하나로 통합된 것은 아니었고, 모든 이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애설스탠은 대관식을 하는데 1년 이상 시간을 들이게 되었다.
잉글랜드 통일
925년 애설스탠은 정식으로 웨식스 왕국의 왕위에 올랐는데, 926년에는 자신의 누이를 남부 노섬브리아에 자리 잡은 데인족 국가인 요크 왕국의 왕에게 시집보냈다. 이는 정략결혼으로 당시에 흔했던 혼인동맹을 맺으려고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듬해에 요크의 왕이 사망하자 즉시 요크로 쳐들어가서 점령하였다. 애설스탠이 처음부터 어떤 의도를 가지고 누이를 혼인시켰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애설스탠은 노섬브리아의 왕위까지 획득하여, 명실공히 잉글랜드 지역을 통일시킨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왕권은 어디까지나 잉글랜드에 속해 있는 것으로, 브리튼섬에는 아직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지역이 남아있었다. 그나마 브리튼인이 주로 거주하는 웨일스와는 오래전부터 관계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지만, 북쪽의 스코틀랜드와는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934년에 애설스탠은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였는데, 이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내용은 없다. 이 전쟁의 경과나 결과에 대해서도 전해지는 바는 전혀 없는데, 전쟁 개시 1년 전에 애설스탠의 왕권에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동생이 죽었기 때문에 나라 내부가 안정되어서라던가, 이 해에 아일랜드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더블린의 바이킹 왕국의 왕이 죽었기 때문에 견제 세력이 줄어서라던가, 혹은 스코틀랜드에 미치는 영향력을 두고 당시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카우산틴 막 아다'와 불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것이 진짜 이유였는지는 애설스탠 밖에 알 수 없었겠지만, 당시 새로 확보한 요크 왕국과 북부 노섬브리아 지역에서는 침략자에 해당하는 애설스탠보다 더블린에 있는 바이킹 왕국과 더 가까웠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북부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일전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이후 버킹엄에서 애설스탠이 행한 법령 공표 때 카우산틴은 신하로서 입회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스코틀랜드 원정은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도 완전히 굴복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 더블린 왕국의 왕인 된 '올라프 구트프리트손'은 자신의 딸을 카우산틴과 결혼시켜 관계를 돈독히 하였고, 두 세력은 연합하여 937년에 대대적으로 잉글랜드로 침략하였다. 이들은 전쟁 초기에 잉글랜드의 북서 지역을 장악하는 등 전과를 올렸지만, 이후 '브루넌버 전투'에서 애설스탠에게 패하면서 완전히 붕괴되었다. 올라프는 아일랜드로 도주하였고, 카우산틴은 이 전투에서 아들이 전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승자인 잉글랜드군도 막심한 피해를 입었는데, 애설스탠의 두 명의 조카와 사촌들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 한다.
위테나예모트와 대륙 외교
애설스탠이 집권하기 이전부터 잉글랜드에서는 조금씩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필요성은 영토가 늘어남에 따라 점점 더 대두되었다. 이 시기에는 따로 수도가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왕이 있는 지역에서 일종의 내각회의가 이루어졌다. 이를 '위테나예모트'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참석하는 이들은 고위 귀족들이나 주교 등 지역에 큰 영향력을 가지는 이들로 '위탄'이라고 불렀다. 위탄들은 위테나예모트를 통해 여러 안건들에 대해 회의하였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왕에게 조언하는 등의 활동을 하여, 혹자는 이를 영국 의회의 전신으로 보기도 한다. 애설스탠은 법을 제정하고 공표하는 등 법률을 정비하였고, 화폐의 제조와 보급에도 힘썼는데, 이를 통해 국가 내부의 통합과 결속을 꾀했다. 또 애설스탠은 교회에 매우 호의적이었는데, 교회를 통해 통치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학문의 증진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애설스탠의 통치기 동안 각국의 많은 신학자들이 방문했으며, 그의 학문 증진 활동에 대해 칭송하는 많은 시가 지어졌다고 한다. 그 외에도 대륙과의 외교에 힘을 기울였는데, 애설스탠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유럽의 여러 왕자들과 맺고 있던 양자 관계를 내세워서, 그들이 권력을 상실할 위기에 쳐했을 때 군대를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왕가의 여성들을 대륙의 왕족이나 귀족들과 결혼시켰는데, 이를 통해 내부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브리튼섬 외부에 대한 애설스탠의 관심의 정도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그가 왕실의 여자들을 휘하 귀족들이 아닌 외부의 귀족들과 결혼시킨 이유는, 국가 내부에서 왕권을 흔들 수 있는 세력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애설스탠은 자신의 이복누이를 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오토 1세'와 결혼시킬 수 있었고, 훗날 이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 독일 사이에 동맹이 맺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죽음
애설스탠은 939년경에 사망하였다. 그는 생전에 잉글랜드 왕국을 완전히 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그가 사망하자마자 요크 왕국은 올라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면서 분열되었다. 그러나 그는 통치 체계를 확립하고, 법률을 제정하는 중세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훗날 '이드리드' 왕이 다시 요크지역을 되찾으면서 웨식스 왕국은 잉글랜드 전역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또 유럽 대륙과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통해 잉글랜드가 브리튼 섬을 벗어나 유럽 전체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