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의 명장 「마원」
- 역사
- 2023. 8. 2.
중국 전국시대부터 이어져오는 명문가
'마원'(馬援)은 기원전 14년경 중국 한나라(전한) 말기에 태어났다. 마원의 집안은 본래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장 '조서'의 후손인데, 그가 '마복군'에 봉해지고 나서 후손들이 마씨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고대시대에는 이러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했는데, 당시에는 성이나 이름으로 쓰는 글자들이 많지 않기도 했기 때문으로, 서양의 로마 제국에서는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로 원정 간 이들 중에 코끼리와 싸워 이겼다는 의미로 성으로 '카이사르'로 변경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마씨 일족은 계속 번성했던 것 같은데, 한무제의 통치시기에 몰락하게 된다. 기원전 91년 '무고의 화'로 인해 태자의 일가가 몰살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후에 이것이 '강충'이라는 자의 음모였던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당시 마씨 일족 중에 '마하라'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강충과 가까운 사이었고, 그의 동생 '마통'은 무고의 화로 인해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마하라는 무고의 화의 음모가 밝혀서 강충이 처형당하자, 자신의 집안에도 화가 미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였다. 기원전 88년 마하라와 마통은 또 다른 동생인 '마안성'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는데, 그는 밤중에 품에 칼을 숨기고 궁궐에 진입하였다가 발각되었고, 마하라의 형제들은 모두 처형되었으며, 이로 인해 마씨 일족은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금지당하면서 몰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원은 부풍군의 독우관으로 있었는데, 한 번은 죄수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하루는 마원이 죄수를 호송하던 중 죄수들이 고통을 못 이겨 마원에게 호소하였는데, 마음이 약해진 마원은 죄수들을 풀어주었고,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북방으로 도망쳐버렸다. 북방에서 마원은 이민족들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가축을 기르면서 부지런히 일해 금세 수천 마리를 보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원은 부자가 되었지만, 그 돈으로 주위사람들을 도와주며, 부를 얻어도 베풀지 않으면 그저 수전노에 불과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낡은 옷을 입고 소박한 식사를 하며 검소한 생활을 하여, 주위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 또 마원은 항상 주변에 대장부가 뜻을 품었으면 어려울수록 굳세어야 하고 늙을수록 건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는데, 여기서 노익장이라는 말이 생겼다.
마씨 일족의 부활
8년에 '왕망'은 전한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신나라'를 세웠다. 이는 사실상 찬탈이었으며, 이로서 전한은 멸망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미 상당한 세력을 이루었던 마원은 왕망의 눈에 들었고, 왕망은 마원을 한중랑태수로 임명하여 포섭하였다. 이후 마원은 '외효'의 세력에 합류하였는데, 신나라가 멸망하고 이어 '현한'이 멸망하는 등 혼란이 극에 달했고, 각지의 군웅이 할거하자 외효는 당시 촉을 장악하고 있던 '공손술'과 손을 잡기 위해 마원을 보내었다. 그러나 막상 공손술을 만난 마원은 그의 오만방자한 행동에 실망하였는데, 마원은 다시 외효에게 돌아가던 중에 우연히 '후한'의 '유수'와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마원의 재능을 알아본 유수가 성심성의껏 대접하였고, 이에 마원은 그대로 유수의 휘하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이후 외효는 마원 등의 설득에 의해 한번은 유수와 손을 잡았지만, 공손술을 토벌하자는 유수의 권유를 계속 무시하였고, 결국 유수는 공손술을 토벌하기 전에 걸림돌이 되는 외효를 먼저 토벌하기로 하였다. 이때 마원이 유수 앞에서 진중에 쌀을 쏟아 일종의 지형도를 만들어서 부대의 진격로를 제시했다고도 한다. 후한에서 마원은 '태중대부'에 이어 '농서태수'에 임명되었고, 주로 감숙성 방면의 이민족인 '강족'이나 '저족'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이복파사
후한이 다시 중원을 통일한 이후에 교주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마원은 '복파장군'에 임명되어 이를 토벌하도록 명령받았다. 이 지역은 '남월'이라고도 불리는데, 지금의 북 베트남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쯩짝'과 '쯩니'의 두 자매가 인근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마원은 군대를 이끌고 내려가 이를 진압하였고, 그대로 지금의 하노이 부근의 '낭박'까지 진출하였다고 한다. 마원은 이 공으로 '신식후'에 봉해졌으나, 이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민족 토벌에 힘써 북방의 '흉노'와 '오환'을 견제하였다. 이후 49년경 다시 남방의 이민족을 토벌하러 출정하였다가 병에 걸려 그대로 사망하였다. 마원 사후에 마씨 일족은 다시 한번 몰락할 뻔했는데, 과거 마원이 남만을 평정할 때 남만인들이 풍토병에 강한 것에 착안하여, 남만의 율무 종자를 들여와서 키웠었다. 이후 마원이 죽자 평소에 그와 사이가 나빴던 '양송'이 마원이 남방에서 몰래 진주를 들여와서 사적이익을 취했다고 모함을 하였다. 이 일로 한때 마원 일가는 지위와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기도 하였지만, 이후 양송의 거짓이 드러나 다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원은 '노박덕'과 함께 복파장군의 지위에 있던 이들 중에 가장 유명한데, 사람들이 이를 일컬어 '이복파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마원의 딸은 마원 사후에 궁궐로 들어가, 후한 명제의 '명덕황후'가 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중국의 후한 말 삼국시대에 유명한 서량의 명장 '마등'과 '마초'가 마원의 후손이다. 마씨 일족은 마원 사후에도 이민족과 교류하면서 그들을 안정시켰던 것 같은데, 마등 같은 경우는 어머니가 강족으로 이민족과의 혼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