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유」
- 역사
- 2023. 7. 23.
후한의 명문가
'주유'(周瑜)는 중국 후한말인 175년경에 태어났는데, 여강군 서현 사람으로, 자는 '공근'(公瑾)을 썼다. 주유는 태위 '주충'의 조카로, 집안 대대로 고위관료를 배출한 명문가의 자제였으며, 그 용모와 자태가 빼어나고 어려서부터 음악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184년경 '손견'이 '동탁'에 대항하여 거병하였을때, 아들인 '손책'과 가족들을 수춘으로 옮겨 살게 하였는데, 당시 10세였던 주유가 손책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 만났으며, 이후 손책에게 자신이 사는 서현으로 이사할 것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이후 주유는 손책에게 큰 저택을 주어 살게 하였고, 주유의 인맥을 통해 손책도 많은 사대부들과 친교를 쌓을 수 있었으며, 특히 주유와의 사이가 각별하여 두사람의 사이 좋음을 '단금지교'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후 손견이 사망하자 194년 손책은 원술 휘하에 합류하였는데, 이듬해인 195년에는 공을 쌓기 위해 '유요'와의 전쟁에 참전하기로 하였다. 이때 손책이 주유에게 도움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이에 주유는 군사를 모아 손책에게 합류하였다. 손책은 유요를 토벌한 후에 주유에게 단양을 지키도록하였고, 자신은 군을 이끌고 그대로 회계를 정벌하러 나갔다. 본래 단양의 태수는 주유의 숙부인 '주상'이었기 때문에 주유는 계속 단양에 있었던 것 같은데, 198년 원술이 자신의 사촌인 '원윤'을 새로 단양의 태수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주유는 다시 수춘으로 돌아왔다. 이때 원술은 주유를 보고 자신의 부하로 삼으려고 했는데, 주유는 원술의 인물을 보고 실망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이탈하여 손책과 합류할 수 있도록 거소현의 장을 자청하여 부임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주유는 거소현에서 노숙과 만나 친교를 쌓을 수 있었고, 이내 손책군에 투신하여 합류하였다.
강동 이교와 손책의 죽음
199년 원술이 죽은 후에 손책은 원술의 잔당이 의탁한 여강태수 '유훈'을 공격했다. 주유는 강하태수로 임명되어 함께하였으며, 여강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남은 원술의 가족들을 사로잡았다. 또 유훈을 기만하여 본진인 환성을 나가게 한 후에, 빈 성을 공격하여 장악하였는데, 이때 강동의 미녀로 유명한 '강동 이교' 자매를 사로잡아서 손책과 주유가 각각 아내로 삼았다. 근거지를 잃은 유훈은 도망쳐 '조조'에게 의탁하였으며, 손책과 주유는 그대로 유훈을 돕던 강하태수 '황조'를 공격하여 토벌하였다. 손책군은 예장과 여릉까지 평정했고, 강동에서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200년 강동을 장악한 손책은 중원을 도모할 생각을 하였던 것 같은데, 그는 천자가 있는 조조의 '허도'를 노리고 진군하였다. 당시 조조는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허도를 제압하는 일은 손책에게는 쉬운 일이었겠으나, 손책은 진군 도중에 자객의 습격을 받아 갑작스럽게 요절하였다. 손책은 유언으로 후사를 동생인 '손권'에게 맡겼으나, 당시 손권은 18세로 무능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실무는 '장소'와 주유가 도맡아했으며, 이들의 노력하에 손책이 남긴 세력이 온전히 손권에게 이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손권에게 휘하의 장수들이나 손님들이 가벼운 예절로 대하였는데, 오직 주유만이 신하로서 예절을 지켰다고 한다. 이후 하북을 평정한 조조는 그 위세를 이용하여 손권에게 자식을 볼모로 보내도록 요청하였는데, 중신들인 장소나 '진송' 등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어영부영하고 있자, 주유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이때 손권의 어머니인 '오부인'이 나서 그에 동조하면서, 손권에게 주유를 형처럼 대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후 206년에는 '마둔'과 '보둔'을 공격하여 승리하였으며, 황조의 공격을 막아내는 등 공을 세웠다.
적벽대전
손권은 강동을 손에 넣었고, 조조는 하북을 평정하였으나, 그 사이에는 형주의 '유표'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208년 유표가 사망하자 조조는 형주로 쳐들어갔는데, 유표의 아들인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여 형주를 넘겨주었으며, 이에 형주에 의탁하고 있던 '유비'는 도주하였다. 손쉽게 형주와 형주의 수군을 차지하게 된 조조는 강동을 다음 목표로 삼았고, 군을 훈련 시키는 등 전쟁에 대비하면서, 조정의 이름으로 손권에게 항복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때 많은 동오의 신료들이 조조를 두려워하여 항복을 권하였는데, 조조가 황제를 등에 업고 있으며, 이미 형주의 군함과 수군을 얻어 대적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그러나 노숙은 이에 반대하였고, 손권을 설득하여 당시 파양에 있던 주유를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주유는 여러 이유를 들어 동오가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조조는 황제를 이용하는 역적이며, 수상전에서는 동오의 군사들이 더 강하고, 선대가 일구어 온 이 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조조의 배후에는 서량과 서촉이 아직 있어 불안하고, 장기간의 원정으로 인해 병사들의 사기와 건강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손권은 주유의 말에 동의하였으며, 주유를 도독으로 삼고 3만의 군사를 주어 조조와 싸우도록 하였다. 조조에게 쫒기던 유비도 여기에 합류하였는데, 2만의 군사를 데리고 주유와 함께하였다고 한다. 이후 적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주유가 이끄는 군대는 화계를 사용하여 조조군을 대패시켰고, 후퇴하는 조조는 '조인'을 남겨 강릉을 지키도록 하였다. 연의에서는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정사에서는 제갈량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비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후 주유와 유비는 강릉을 공격하였는데, 조인은 1년이나 버텼지만 결국 패퇴하였고, 유비는 이후에 손권에게 형주 4군을 빌려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주유의 최후
주유는 '편장군', '강릉태수'가 되었고, 한중의 '장로'와 익주의 '유장'이 분쟁을 시작하자, 손권에게 서촉을 도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동오가 서촉까지 장악하고, 유비를 빼고 조조와 손권이 천하를 남북으로 나누어 갖는 '천하이분지계'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원정을 준비한 주유는 도중에 병에 걸렸고, 강릉에서 원정을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3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주유의 죽음으로 서촉에 대한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손권은 주유가 없었으면 자신은 제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며, 그의 죽음에 크게 슬퍼하였다고 한다. 주유는 죽기전에 자신의 후임으로 노숙을 추천하였기 때문에, 주유의 일은 노숙이 이어받았다. 동오는 손견과 손책, 손권의 실력으로 성장한 것도 있지만, 주유의 실력과 인맥의 영향으로 성장한 면도 상당히 많은 만큼, 진정한 동오의 공신 중 한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유의 죽음이 앞으로의 동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