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위나라의 오자양장 중 한명 「악진」
- 역사
- 2023. 10. 5.
일찍부터 조조와 함께한 악진
'악진'(樂進)은 중국 후한말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태어나 활약하였는데, 동군 위현 사람으로 자는 '문겸'(文謙)을 썼다. 그는 '조조'가 본격적으로 할거하여 반동탁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 즈음하여 조조 휘하에 합류하였는데, 처음에는 조조를 따라다니며 장하리를 맡았다고 한다. 장하리는 군대에서 지휘관을 보좌하는 역할로 일종의 행정병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악진의 용모와 체구가 작다고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면, 한눈에 봐서는 장수로 쓰기에 부적절해 보였던 것 같다. 그나마도 미덥지 못했는지 조조는 악진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병사들을 모아 오게 시켰는데, 양평에서 천여 명을 모집하여 데리고 돌아왔기 때문에, 조조는 그 공을 크게 사 그를 군가사마, 함진도위로 삼았다고 한다. 또 악진은 담력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본격적으로 조조의 휘하에서 종군한 그는 194년에는 복양에서 '여포', 195년에는 진류군 옹구현에서 '장초', 197년에는 예주 진국 고현에서 '교유'와 벌인 모든 싸움에서 선두에 서서 공을 세웠으며, 이 공으로 '광창정후'에 봉해졌다고 하니 일찍부터 큰 활약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계속해서 198년 형주 남양군에서 '장수'를 공격하고,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할 때도 공을 세웠으며, 199년에 사견에서 '수고'를 치고, 200년에는 예주 패국 패현에서 '유비'를 격파하는 등 모든 싸움에서 공을 세워 토구교위에 올랐다. 이처럼 악진은 특징적인 외모로 인해 인재를 잘 볼 줄 안다는 조조조차 한 번은 단념하려고 했을 정도였지만, 맡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었고, 이후 조조를 따라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워 위나라의 숙장이 된다.
관도 대전과 하북 평정
조조가 서주에서 모반한 유비를 치자 하북을 장악한 '원소'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원소군 선발대가 먼저 백마를 포위하였고, 원소의 본대가 합류할 것을 우려한 조조는 섣불리 공격하는 대신 악진과 '우금'에게 병마 5,000을 주어 하내 일대의 원소군 진영을 급습하여 시선을 끌도록 하였다. 이들은 황하 일대를 돌며 30여 개의 소규모 진을 불살라 파괴하였는데, 이때 죽거나 사로잡힌 원소군이 수천에 이르렀으며, '하무', '왕마' 등 20여 명의 원소군 장수가 항복하였다고 한다. 악진과 우금의 활약에 의해 원소는 하내로 향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사이 조조는 백마를 구원할 수 있었고, 악진과 우금도 무사히 퇴각하는 데 성공하였다. '관도 대전'에도 참전하여 원소군의 거점이었던 오소를 습격하는데 합류하였는데, 이때 적장인 '순우경'이 생포되었다가 처형되었는데, 악진이 전투에서 그를 베었다는 기록도 있다. 관도 대전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그대로 하북을 평정하는 임무를 수행하여, 202년 여양에서 원소의 아들인 '원담', '원상' 형제를 공격할 때 적장 '엄경'을 베었고, 그 공으로 유격장군을 겸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청주 낙안군의 황건적 장단을 토벌하거나, '장료'와 함께 기주 위군 음안현을 장악한 후에 그 백성들을 자신들의 영향권 안에 있는 황하 이남으로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204년에는 업성 포위전에 참가하였고, 205년에 남피를 함락시킬 때는 앞장서서 동문을 통해 성내로 돌입하였다고 한다. 또 이때 유주 어양군 옹노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기도 하였다. 이 시기 광평 일대로 오환족이 쳐들와 이를 막기 위해 조조가 직접 출병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병주자사 '고간'이 반란을 일으켜 악진과 우금이 병사를 이끌고 이를 막아 호관에서 대치하였다. 두 사람은 호관을 함락시키기 못하고 있다가 후에 조조가 직접 와서야 함락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206년에 조조는 황제에게 표를 올려 악진과 우금, 장료를 칭찬하고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악진은 절충장군에 임명되었고, 우금은 호위장군, 장료는 탕구장군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또 악진과 '이전'은 청주 북해국 순우현으로 이동하여 해적 '관승'을 정벌하기도 하였다.
합비 공방전
형주를 평정할 때 악진은 양적, 우금은 영음, 장료는 장사에 주둔하였는데, 세 장수가 각자의 방식대로 독자적으로 군을 운용하였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지 않고 있었다가, 세 군대의 사무를 동시에 담당하게 된 '조엄'이 이를 조정해서 세 사람에게 깨우침을 주었다고 한다. 악진과 우금은 본래부터 조조의 휘하에서 군무를 시작하였지만, 장료는 적이었던 여포 휘하에 있었는데, 이 때문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며, 각자 군사를 운용함에 있어서 중요시하는 것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이후 형주를 평정한 조조는 악진에게 양양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적벽 대전' 이후 있었던 형주 공방전 때 악진은 문빙과 함께 남군 일대에서 '관우'를 격퇴했으며, '유비'를 공격하여 임저현장 '두보'와 정양현장 '양대'를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그 뒤 다시 조조와 함께 '손권' 정벌에 동행하면서 가절을 수여받았는데, 이는 전시와 평시를 가리지 않고 일정 이하의 관료를 즉시 처벌할 수 있는 권한으로, 악진은 그만큼 조조의 신임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원정을 마치고 돌아갈 때는 장료, 이전 등과 함께 합비에 남아 수비를 맡았다. 215년에 손권은 10만의 대군을 일으켜 합비를 공격하였는데, 당시 합비를 지키던 병사의 숫자는 7,000여 명에 불과하였다. 합비를 지키던 이들 중 '설제'는 사전에 조조에게 교서를 받아가지고 있었으며, 서신의 겉봉에는 적이 도착하면 뜯어보라고 적혀있었는데, 그 안에는 손권이 쳐들어 올 경우 장료와 이전은 나가서 싸우고 악진은 안에서 수비하며 설제는 참전하지 말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장료는 어차피 원군을 기다려봐야 시일을 맞추지 못할 터이니, 적이 정비를 마치기 전에 요격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다른 이들도 이에 이견은 없었으나 평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장료가 이점을 염려하였다. 이에 이전이 분개하여 국가의 큰일을 하는데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였고, 세 장수는 힘을 합쳐 오나라의 대군을 물리치고 합비를 지켜내었다.
위나라의 오자양장
악진은 조조의 휘하에서 오랫동안 종군하면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고 우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의 식읍이 1,200호가 되었는데, 그중에 500호를 떼어 아들 중 한 명을 열후에 봉해질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218년 악진이 사망하였으며, 그의 뒤는 아들 '악침'이 이었고, 사후에 '위후'의 시호를 내려받았다. 악진은 본격적으로 군웅할거가 시작된 초기부터 꾸준히 조조의 휘하에서 종군을 계속하며 공을 세웠지만,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아 미디어 등에서 저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상당히 유능한 장군이었다. '진수'가 쓴 삼국지에는 악진은 장료, 우금, '장합', '서황'과 함께 위나라의 으뜸가는 장수로 표현되며, 이들을 하나로 묶어 촉한의 '오호대장군'이나, 동오의 '강동십이호신'에 빗대어 위의 '오자양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