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시대 거대한 반란을 일으킨 절도사 「안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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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외국인 안녹산

'안녹산'은 703년경에 태어났는데, 중원이 아닌 서역 출신으로 아버지는 소그드족으로 추정되며, 어머니는 돌궐족의 무녀였다고 한다. 본래 아버지는 강씨인데, 양부는 '안연언'이며, 어렸을 적에 이름이 '알락산'이었다고 하는 등 외국 출신의 안녹산에 대해서 정작 기록은 중국어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의 정확한 이름이나 출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어렸을 적에는 계속 어머니의 일족과 함께 생활했던 것 같은데, 716년에 일족이 장이 사망하고 인근 부족과 불화가 생기면서 중원으로 망명하였고, 이때 정식으로 안씨 성을 사용했다고 한다. 안녹산의 녹산은 소그드어인 '로흐샨'(빛나다)를 음차 한 것으로 추정되며, 성을 받을 때 이름도 중국식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외국인 태생으로 그것도 여러 국가 간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서역 출신인 점도 있어, 안녹산은 어렸을 적부터 6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하며, 이를 바탕으로 일종의 통역관인 호시아랑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고 한다. 732년에 안녹산은 양을 훔쳤다가 잡혀서 당시 유주절도사였던 '장수규'에게 끌려갔는데, 이때 장수규는 안녹산의 죄를 벌하기 위해 검을 들여 베어 죽이려고 했다고 한다. 이를 본 안녹산이 급히 소리쳤는데, 그는 장수규에게 양번을 멸하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양번은 거란족과 해족 등 이민족을 이야기하는데, 안녹산은 여러 민족의 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근 이민족들의 정보나 행태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수규가 안녹산의 기개를 가상히 여겨 풀어주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의 언어적 능력과 그가 가지고 있던 이민족에 대한 정보를 이용해 군공을 세울 요량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안녹산은 장수규의 휘하에서 군공을 세웠고, 장수규는 그가 충분히 쓸모 있다고 생각했는지 양자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는 그렇게 돈독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장수규는 안녹산이 살이 찌는 것이 싫어서 먹을 것을 많이 주지 않았다고 하며, 식량을 통해 어느 정도 통제를 하였던 것 같다. 이 때문에 안녹산은 장수규를 두려워하였다고 하고, 그와 별도로 중앙 조정에서 장수규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등 환심을 사 별도의 연줄을 마련해 두었다.

절도사 안녹산

장수규는 738년 패전을 숨겼다가 들통이 나서 몰락하였지만, 안녹산은 그와 관계없이 승승장구하였는데, 그는 변방에서 중계 무역을 통해 꾸준히 부를 축적하였고, 이 재산을 바탕으로 조정 대신들에게 뇌물을 아낌없이 주었다고 한다. 결국 안녹산은 당나라 황제인 '현종'을 직접 알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현종은 안녹산을 크게 마음에 들어 하였고, 안녹산은 742년 평로절도사로 임명되는 등 출세에 성공하게 된다. 안녹산은 눈치가 빠르고 아부를 하는 게 거침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는 당시 39세의 나이였음에도 16세나 연하였던 '양귀비'를 어머니로 모시고 스스로 양자가 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또 조정에 들어갈 때는 양귀비를 먼저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렸다고 하는데, 현종과 함께 있을 때에도 양귀비에게 먼저 인사를 한 후 현종에게 인사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 번은 현종이 이를 궁금해하여 안녹산에게 이유를 물었는데, 안녹산은 서역에서는 어머니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아버지에게 인사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는 안녹산이 양귀비를 아부를 하여 덕을 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양귀비를 총애하는 현종에게 아부를 하는 것으로, 현종의 눈에는 자신이 총애하는 양귀비를 극진히 모시는 안녹산의 모습이 안 좋게 비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안녹산은 자신은 어디까지나 외국인으로서 당나라 조정이나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현종과 양귀비에게 아부를 계속하였는데, 현종이 살이 많이 찐 안녹산에게 그 배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냐고 묻자, 오직 폐하에 대한 충성심뿐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외에도 양귀비를 양모로 모신 안녹산이 새로 아이가 된 축하 연회를 열고서는, 기저귀를 찾고 궁녀들이 짊어진 가마에 얹혀 들어오는 등 광대짓도 마다하지 않았고, 이를 본 현종과 양귀비, 그리고 궁중의 많은 이들이 이를 보고 즐거워하였다고 하니, 안녹산이 하는 아첨은 중원의 고관대작들과는 한 단계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을 것이다. 안녹산의 이러한 행적은 많이 과장되었기는 했겠으나, 그는 아첨을 일삼으며 현종을 기쁘게 해 그때마다 많은 재물을 상으로 받았으며, 744년에는 범양절도사를 겸했으며, 751년에는 다시 하동절도사를 겸하면서, 3개 지역 절도사를 혼자 담당하게 된다. 당시 안녹산의 세력이 당나라 전체 군세의 1/3을 차지한 정도라고 하니, 그야말로 천자의 자리를 노려볼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안녹산 본인의 군사적 재능은 아부하는 재능만큼 좋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751년에는 거란족을 공격했다가 패배하였고, 부장인 '사사명'이 겨우 막아내면서 한시름 돌릴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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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녹산의 난

안녹산은 당나라 최대의 군벌 세력이 되었지만, 당시 당나라의 중앙 조정은 다른 두 명의 간신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한 명은 '구밀복검'으로 불리는 '이임보'이고, 나머지 한 명은 양귀비의 친척인 '양국충'이었다. 이 시기에 조정에서 쉽게 벼슬을 하기 위해서는 이 두 명 중 한 명을 통해야 했는데, 안녹산은 이임보에게 뇌물을 주어 그와 함께 한 것 같고, 양국충에 대해서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양귀비의 힘으로 그 자리에 까지 오른 것을 보고 멸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당나라 조정을 장악한 것은 이임보가 아니라 양국충이었는데, 양국충은 양귀비의 힘을 빌어 차츰 이임보의 세력을 조정에서 축출하였고, 752년에 이임보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사실상 당나라의 실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는 안녹산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양국충은 큰 걸림돌이었던 이임보가 사라지자, 안녹산이 다음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현종에게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며 충동질하였다. 실제로 당시 안녹산은 대대적인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사실 양국충 이외에도 여러 신하들이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진언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양국충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반란을 앞당기게 만들었는데, 안녹산은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래 반란을 더 늦게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현종에 대한 양국충의 진언이 계속되자, 755년에 아예 간신 양국충을 타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켜버렸다. 행인지 불행인지, 양국충이 안녹산의 반란을 미리 알아챈 것이 그의 능력 덕분인지, 아니면 그냥 모함하다가 우연히 맞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안녹산은 급하게 반란을 일으키느라 제대로 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본의 아니게 양국충 본인이 다 해결해 주게 되었는데, 양국충 등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여기에 불만을 품은 많은 이민족 출신의 장수들이 안녹산에게 합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백성들도 양국충 타도에 호응하여 반란에 가담하였다. 안녹산은 범양(베이징)에서 거병하였는데, 본거지를 지키는 수비병력을 남겨두고도 15만 명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양국충 덕분에 많은 이들이 항복하면서 안녹산은 손쉽게 하북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고, 난을 일으킨 지 고작 한 달 만에 낙양을 함락시키기에 이렀으며, 안녹산은 낙양에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연'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당나라 조정에서는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현종은 급조한 적은 병력으로 훈련된 반란군의 대군을 상대로 시간을 끌며 잘 방어하고 있던 '봉상청'과 '고선지'에게 처형 명령을 내리는 등 실정을 저질렀고, 그나마 두 개의 절도사직을 겸임하고 있던 명장 '가서한'이 동관에서 이를 방어하였으나, 양국충이 그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가서한이 공을 세울 것을 두려워한 양국충은 현종에게 가서 그를 모함하였고, 그것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가서한이 동관을 나가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며 충동질했다. 결국 가서한은 동관을 나서 안녹산의 반란군과 맞붙었는데, 이때 가서한의 병력도 대군이기는 했으나 급조한 부대로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고, 결국 대패하였으며 가서한 본인도 포로로 잡히게 된다.

안녹산의 최후

안녹산이 낙양에서 황제를 참칭 하면서 많은 이들이 반란의 목적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등 반 안녹산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그사이 당나라 조정은 실정을 거듭하여 동관까지 빼앗기게 되었고, 현종은 양귀비와 그 일족 등 측근들만 데리고 장안을 버리고 도망치게 된다. 이때 현종은 급하게 도망치느라 제대로 준비도 하지 못했다고 하며, 장안 백성들에게 이러한 상황을 알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비겁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적어도 거짓말로 백성들을 속이진 않았으니 참작할 만은 하다. 그러나 피난하던 중 병사들의 불만이 폭발하였고, 결국 양국충과 양귀비 등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현종은 황태자였던 '이형'을 남겨 반란을 진압하게 하고 자신은 그래도 성도로 향했다. 이 시기 안녹산은 건강이 나빠져 시력을 거의 잃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매우 난폭해져서 마음에 안 드는 부하들을 함부로 폭행하여 죽였으며, 측근이나 가족들에게도 폭력을 휘둘렸다고 한다.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는 본래 안녹산의 후계자나 다름없었지만, 756년에 안녹산의 후궁인 단씨가 '안경은'을 낳자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는 말이 돌았고,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러한 소문을 들은 안경서는 이듬해인 757년에 부하 '엄장'과 '이저아'와 함께 안녹산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반란도 아직 끝맺지 못한 상황에서 이러한 행위가 좋게 보일리가 없었고, 당나라가 여러 이민족들의 지원을 받아 반격에 나서자 반란군은 낙양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핵심 인물이었던 사사명 등이 당나라에 항복하는 등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당나라는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당나라는 멸망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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