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수나라시대 수나라 최고 권력자였던 문헌황후 「독고가라」
- 역사
- 2023. 10. 6.
선비족의 유력자 독고신의 딸
'독고가라'는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인 543년경 '서위'에서 태어났는데, 그녀의 아버지 '독고신'은 서위의 유력자로 대도독에 대사마의 직위에 있었다. 독고신은 선비족의 명문 출신인 것 같은데, 그는 선비족이 세운 북위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었고, 후에 본인은 '북주'의 유력자인 '우문호'에게 핍박받아 좋지 않은 말로를 걷게 되지만, 그 후손들은 중원을 호령하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 독고신은 특히 딸들을 잘 결혼시켰는데, 일곱 딸 중에 첫째는 북주의 황제인 '명제'의 황후가 되었으며, 넷째 딸은 당국공 '이병'에게 시집가 '이연'을 낳았고, 그는 수나라가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세우게 된다. 독고신의 일곱 번째 딸이 바로 독고가라인데, 독고가라는 14세의 나이로 대사공 '양충'의 아들 '양견'과 혼인하였고, 양견이 중원을 통일하고 수나라를 세우면서 독고가라는 수나라의 첫 황후가 되었다. 당시 중원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지만, 독고신은 뛰어난 안목으로 7명의 딸들 중 세 명이나 황실의 일원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그 끝이 다 좋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과장을 좀 보태자면 당시의 선비족이 장악한 중원의 반은 독고씨의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나라 최고의 권력자
독고가라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으며, 아버지나 남편이 상당한 권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고, 사치와 향락을 싫어하여 멀리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성격 덕분에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지만, 오히려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다. 반면에 질투심이 강하고 독선적인 면이 있어, 특히 후궁의 문제로 남편과 자식들 사이에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양견과 독고가라는 573년에 북주의 태자 '우문윤'에게 딸을 시집보냈는데, 578년에 우문윤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북주 제일의 실권자가 되었다. 게다가 이듬해인 579년에 우문윤은 아들인 '우문천'에게 제위를 넘겨주었는데, 당시 우문천은 7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외할아버지인 양견이 섭정으로 사실상 북주의 황제나 다름없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580년에는 우문윤이 사망하였는데, 이 때문에 양견과 우문천은 다른 우문씨 황족들의 정치적 위협에 노출되었나, 양견이 수완을 발휘해 황족들의 병권을 빼앗고 반란을 진압하는 등 선전하였고, 결국 581년에는 우문천에게서 선양을 받는 형태로 수나라를 건국하면서 북주를 멸망시키게 된다. 이때 양견은 외손자인 우문천에게서 나라를 빼앗는 것을 꺼려하였다고 하는데, 독고가라가 이미 천리를 달리는 호랑이 위에 올라탔기 때문에 내릴 수 없다며 결단을 강요하였다고 한다. 수나라가 건국된 이후에도 독고가라는 양견이 펼치는 정책을 살피며 잘못된 부분이 있으며 의견을 내었는데, 이러한 모습을 보고 대신들 사이에서는 양견과 독고가라를 묶어 궁중에 두 명의 황제가 있다고 이야기했으며, 백성들에게도 크게 존경받는 황후였다고 한다. 그러나 양견에게는 그리 좋은 아내 만은 아니었는데, 독고가라는 양견과 혼인할 때 맺은 자신 이외에 부인을 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거론하며 견제하였기 때문에, 양견은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후궁을 셋 이상 두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양견이 총애하는 후궁에 질투하여, 양견이 정사로 바쁜 사이에 그녀를 죽여 목을 베었고, 그 머리를 상자에 담아 양견에게 보내었다고 한다. 이때 충격을 받은 양견은 궁을 뛰쳐나가 산에 들어가 숨었으며, 그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많은 대신들이 나서야 했고, 그중 '고경'이라는 신하가 고작 부인의 일로 천하를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설득하여 돌아오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독고가라는 자신을 한낮 부인 취급을 했다며 고경에게 앙심을 품었고, 결국 후에 고경은 사약을 받아 목숨을 잃게 된다.
후계자 분쟁
본래 양견의 후계자는 장남 '양용'이었는데, 독고가라는 평소에 자신이 맺어준 황태자비가 아닌 후궁을 총애하는 아들에게 불만이 있었다. 그러던 와중 591년에 황태자비가 사망하였는데, 독고가라는 그녀가 죽은 이유가 양용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고, 이후 황태자를 바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양견의 둘째 아들인 '양광'은 본래는 양용처럼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성격이었지만, 야심이 많고 치밀한 성격으로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금욕적인 어머니 앞에서는 그러한 성격을 숨기면서 행동하고 있었다. 양광은 독고가라가 양용이 여색을 즐기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일부로 궁녀를 보내 술에 취하게 하는 등 여러 음모를 꾸몄고, 황태자비가 죽어 독고가라의 마음이 완전히 양용에게서 떠나자 그 틈을 노리고 아첨하여 600년에는 후계자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독고가라는 602년에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양광은 어머니가 죽자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피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하면서도, 집에 돌아가서는 본색을 드러내어 술과 고기를 즐기며 기뻐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이처럼 독고가라는 어질고 현명한 여성으로 수나라의 건국과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지만, 아내와 어머니로서는 편협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결국 후에 수나라를 멸망시키게 되는 양광을 황제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중국사에 등장하는 다른 여성 권력자들과는 다르게 국가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좋은 황후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