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책략에 능한 군사 「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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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비상한 재치

'가후'(賈詡)는 중국의 후한말인 147년경에 태어났는데, 양주 무위군 고창현 사람으로 자는 '문화'(文和)를 썼다. 가후는 전한 시대 뛰어난 학자였던 '가의'의 12대손이라고 하는데, 가의가 출세운이 없었던 데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집안의 도움을 얻지 못한 것 같고, 가후도 젊어서부터 재능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 효렴으로 낭이 되었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하였다고 한다. 귀향하는 도중 가후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저족의 반란군에게 잡히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재치를 발휘하여 자신은 태위 '단경'의 외손자이니, 자신을 죽이거든 시체를 잘 보존했다가 큰돈을 받고 돌려주라고 하였다고 한다. 단경은 오랫동안 변방의 장수로 이름을 떨쳤던 사람인데, 이 말을 들은 저족들은 크게 겁을 먹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살해하였지만 가후는 그대로 돌려보내주었다고 한다. 가후는 실제 단경과 친인척 관계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 덕분에 생명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삼국지에서는 가후를 책략에 실수가 없고 사태 변화를 꿰뚫고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처럼 그는 큰 책략은 아니지만 비상한 재치와 판단력으로 자신과 주변에 닥치는 일들을 슬기롭게 해결하였다.

동탁의 부하

189년 대장군 '하진'과 십상시 사이에 알력다툼이 생겼는데, 이때 하진과 '원소'는 군사력으로 십상시를 압박할 생각을 하였고, 이에 여러 군벌 세력을 낙양으로 불러들였는데 그 안에는 '동탁'도 있었다. 그러나 곧 '십상시의 난'이 일어나 하진이 살해되었으며, 이에 분노한 원소는 동생 '원술'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환관들을 몰살시켰다. 이때 십상시 중 '장양'과 '단규' 등이 '소제'와 진류왕 '유협'을 데리고 도주하였는데, 환관들은 노식 등의 추격을 받아 사망하였고, 황제는 도중에 동탁과 만나 낙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동탁은 낙양에서 할 일이 없어졌지만 그대로 눌러앉았는데, 당시 그의 군세는 3,000여 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지만, 휘하에 있던 가후가 계책을 내어 동탁이 정권을 잡는데 일조하였다. 가후는 병사를 800명씩 3개로 나누어 편성하게 한 후에, 밤에는 몰래 성 밖으로 나갔다가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한 부대씩 다시 들어오게 하여 병력이 늘어나는 것처럼 꾸몄다. 이를 본 다른 이들은 동탁의 군대가 계속해서 도착하는 것으로 착각하였고, 동탁은 늘어난 위세를 이용해 죽은 하진의 부대를 흡수하는 등 낙양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공으로 가후는 태위연에 평진도위가 되었다가 토로교위로 자리를 옮겼고, 이듬해인 190년 '반동탁 연합'이 결성되고 장안으로 천도하게 됐을 때는 동탁의 사위인 '우보' 휘하에서 참모로 흥농군 섬현에 있었다. 192년 '여포'가 배신하여 동탁을 살해하였는데, 이후 우보도 여포에게 공격당하여 처형당하였으며, '이각', '곽사', '장제' 등 동탁의 핵심 부하들도 모두 도망칠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후는 동요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들을 설득하고 단결시켜 장안을 습격하여 정권을 다시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가후가 어떤 의도로 이러한 행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각과 곽사 등에 의해 희생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그는 크게 비판받기도 한다. 이후 이각 등이 가후의 공을 높이사서 높은 관직을 주려하였으나, 그는 단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였다며 한사코 거절하였고, 대신 관리를 뽑고 임명하는 자리를 맡았는데, 가후가 이름 있는 인물들을 등용하여 정치를 바로잡으려는 모습을 보이자 도리어 이각 등이 그를 꺼리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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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와 대결

이각과 곽사는 신분상으로는 가후보다 윗사람이었지만 내심 그를 두려워했던 것 같은데, 두 사람은 권력을 놓고 서로 싸우면서도 중간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가후에 대해서는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다. 195년 이러한 혼란을 틈타 '헌제'가 장안을 탈출하여 낙양에서 '조조'와 합류하게 되며, 이때 가후도 관직에서 물러나 장안을 떠났다고 한다. 이후 화음에 있던 동향사람인 '단외'에게 의탁하였으나, 이미 가후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어 단외는 자신의 지위를 빼앗길까 내심 불안해했고, 이를 눈치챈 가후에게 남양에 있던 '장수'가 사람을 보내자 그를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가후는 단외를 떠나면서도 가족은 그대로 남겨두었는데, 어떤 이가 이를 궁금히 여겨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에 가후는 단외가 자신을 의심하니 자신이 떠나면 오히려 즐거워할 것이지만, 동시에 외부에 지지자도 원하고 있으니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족들을 후하게 돌 볼 것이라고 답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 말대로 장수는 가후를 후하게 대접하였고, 단외는 가후의 가족들을 잘 챙겨주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또 장수의 휘하에서는 '유표'에 의지하여 도움을 얻도록 계책을 내었는데, 유표를 직접 만나본 가후는 평상시에는 삼공이 될 재주가 있지만, 난세에는 무능할 것이라고 평가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실제로 유표는 형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몰락하였다. 한편 이 시기 장수는 조조와 대치하게 되었는데, 처음에 장수는 조조에게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여겨 항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조조가 장수의 숙모가 되는 '추씨'를 희롱하고 측근 장수인 '호거아'를 회유하는 등의 행위를 하자 마음을 돌렸고, 이에 가후가 계책을 내어 조조의 군대를 급습하였는데, 이때 조조의 맏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 가장 총애하던 장수였던 '전위' 등이 전사하였으며, 조조 본인도 간신히 달아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후 대치를 이어가던 중 조조의 군대가 갑자기 퇴각하였는데, 장수는 이를 추격하려고 하였으나 가후가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장수는 이를 듣지 않고 추격을 강행하였고, 조조의 복명을 만나 크게 패배하고 돌아왔으나, 가후가 다시 와서 지금이 추격할 시기라며 다시 출전하도록 재촉하였다고 한다. 장수는 이에 반신반의하며 다시 조조군을 추격하였는데, 이번에는 대승을 거두어 많은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장수는 가후의 말을 들으면 승리하고, 듣지 않으면 패배하는 경험을 하면서 그에게 크게 감복하였다고 한다. 이때 조조는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며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였는데, 원소도 조조를 상대하기 위해 장수의 도움을 얻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가후가 도중에 사신을 꾸짖어 물리쳤다고 한다. 가후는 원소와 조조 중에 차라리 조조에게 귀순하는 것이 났다고 하였는데, 가후의 말을 들은 장수는 그것이 옳다고 여겨 장수는 조조에게 귀순하게 된다. 장수와 가후는 조조의 아들과 조카, 측근까지 죽인 원한을 가진 이들이었지만, 장수의 귀순은 당시 조조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고, 장수는 이후 조조와 사돈을 맺고 열후에 봉해지는 등 후한 대접을 받게 된다. 조조는 특히 가후가 합류한 것을 크게 기뻐하였는데, 그를 집금오로 삼고 도정후에 봉하도록 표를 올렸으며, 다시 기주목으로 삼는 등 중히 대했다.

조조의 휘하

가후는 조조의 휘하에서도 많은 계책을 내어 그를 도왔는데, '관도대전'에서도 조조를 독려하여 결단을 내리게 함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형주를 정벌한 조조가 동오를 공격하여 '적벽대전'이 일어날 때도 조조를 말리며 내실을 다질 것을 권하였다고 하는데, 비록 이것은 단순히 정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옳은 말이었기는 하나, 적어도 그가 동오를 정벌하는데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명확히 읽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조조가 관중 지방을 평정할 때 가후는 이간책을 내어 '마초'와 '한수'의 사이를 갈라지게 하여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하는 등, 가후는 여러 사람을 섬기면서 때에 맞는 요긴한 대책을 내어 그들을 도왔고, 주변의 분위기를 읽어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정확히 파악하는 책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조는 아들인 '조비'와 '조식' 사이에서 후계자 문제가 생겼을 때도 가후를 의지하였는데, 먼저 조비가 가후에게 의견을 묻자 몸가짐을 조심히 하고 자식 된 도리를 지키라고 조언하였으며, 조조가 의견을 물었을 때는 일부로 뜸을 들였다가 원소와 유표의 예를 생각했다며 넌지시 장자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권하였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민감한 문제는 충신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직언하기 어려운 것인데, 가후는 일부로 뜸을 들여 자신이 조심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어필한 후에, 원소와 유표의 예를 들어 조조 스스로 결정하도록 권한 것이다.

사려 깊은 처신과 말년

가후는 항상 지나칠 정도로 처신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조조의 휘하에 있을 때도 시기와 의심을 받을까 우려하여 문을 닫고 조용히 생활하며, 사사로운 교제를 하지 않도록 절제하였고, 자녀들도 고관대작들의 자녀가 아닌 일반 사람들하고 혼인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동탁 등 여러 사람을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큰 신변의 위협을 겪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며, 조조나 조비 등이 그를 의지하여 계책을 물었다. 220년 조조의 뒤를 이은 조비는 자신이 위왕이 될 수 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가후를 후하게 대했는데, 그를 태위에 수향후로 삼았으며, 장남인 '가목'은 부마도위로 삼고 어린 아들인 '가방'도 열후에 봉했다고 한다. 당시 실권은 대사마인 '조인'이 쥐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70세였던 가후에게 공으로 내리기에 충분한 명예였다. 이후 손권은 조비가 가후에게 삼공의 지위를 내린 것을 비웃으며, 주군을 진심으로 섬기지 않는 기회주의자라며 비난했다고 하는데, 이 말을 들은 가후는 즉시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했다고 한다. 사실 가후는 동탁의 부하로 있었으며, 이후에도 이각과 곽사를 따랐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위태로운 경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처세술로 신변을 관리하며 난세에 삼공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성공할 수 있었다. 최후에 손권에게 비난받아 자리에서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이미 충분히 고령이었고, 이후 한가롭게 살다가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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