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중원의 패자 「춘추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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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춘추시대의 패자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년경부터 기원전 403년경의 사이의 시기를 일컫는 말인데, 주나라가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를 말하는 '춘추전국시대'의 전반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춘추시대에는 중심이 되는 주나라 왕실의 권력이 약해지면서 각 지방 제후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주나라의 신하를 자청하며 그 질서 아래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나라에 대한 것으로 각 제후국들은 서로의 이익에 따라 침략하거나 동맹을 맺는 등 독자적인 국가로서 활동하였고, 이 때문에 중원 내부에서는 제후국들 간에 갈등이 격화되었으며, 약화된 중원을 노리는 외적인 이민족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도 어려워졌다. 이는 본래 주나라 왕실과 조정의 역할이었지만, 더 이상 이를 유지할 만한 역량이 주나라에 남아있지 않았고, 결국 이 역할을 제후국 중에 하나가 대신 행사하게 되었는데, 이를 '패자'라고 불렀다.

춘추오패

흔히 패자라고 하면 강력한 힘을 가진 승리자를 떠올리기 쉬운데, 사실 춘추시대에 처음 생겨난 패자라는 개념은 이에 부합하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었다. 패자는 어디까지나 주나라의 신하였으며, 같은 주나라의 신하인 여러 제후국들 간의 분쟁이나 불만을 조정하고, 주나라 왕실을 위협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외적을 응징하는 것이 그 역할이었다. 물론 패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력은 필수적이었지만 그만큼 외교력이나 명성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실질적으로 주나라라는 것은 이 제후국들을 모두 모았을때 성립하는 것으로 그만큼 얼마나 많은 제후국들의 찬동을 얻을 수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특히 이것은 외적인 이민족의 침략을 막을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얼마나 많은 제후국들로부터 인적, 물적 자원을 지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은 승패의 향방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최소한 패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적당한 수준의 군사력과 외교력, 그리고 명성이 필요하다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많은 역사가들이 이러한 패자의 조건을 충족하는 인물들을 추려냈는데, 여러 역사가들의 자신의 견해로 뽑은 춘추시대의 대표적인 패자 5명을 '춘추오패'라고 한다. 그러나 각 역사가들이 생각하는 패자의 조건이 상이하였기 때문에, 춘추오패는 실제 5명은 아니고 대략 8명로 추려 볼 수 있다.

모두가 인정하는 춘추오패

춘추오패에는 일반적으로 이 8명이 꼽히는데,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목공', 송나라의 '양공', 진()나라의 '문공', 초나라의 '장왕', 오나라의 왕 '합려', 오나라의 왕 '부차', 월나라의 왕 '구천'이다. 또 패자의 개념을 처음 정립한 정나라의 '장공'을 여기에 추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중에 제나라의 환공과 진()나라의 문공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춘추오패로 인정하기 때문에, 사실상 환공과 문공을 통해 여러 사람들이 패자에게 원한 덕목에 대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첫번째는 바로 정통성 일 것인데, 제나라와 진()나라는 모두 오래된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제나라는 주나라의 공신인 '강상'(태공망)이 시조이고, 진()나라는 주나라의 방계 왕족이 세운 나라로 왕성인 '희'성을 쓰는 나라였다. 그 다음으로는 국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두 나라 모두 당시 중견 이상의 국가로 타국의 침략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을만한 국력과 군사력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에 여러 인재들을 기용하여 국력을 상당히 신장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제나라는 산융족의 침략을 받은 연나라를 구했고, 진()나라는 당시 이민족으로 취급받던 초나라로부터 침략당한 송나라를 구했다. 그러나 이는 군사력 뿐만 아니라 동시에 외교력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당시에는 여러 제후국들이 각지에 산재해있었기 때문에, 멀리 있는 다른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있는 나라에 허가를 얻거나, 군사적으로 제압하는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진()나라는 강대국인 초나라로부터 송나라를 구하기 위해 여러 제후국들의 협력을 얻어 대항하였기 때문에, 진()나라가 주된 나라였을 뿐 사실상 연합작전을 펼쳐서 구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외교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바로 명성이 필요했다. 환공은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관이오'를 재상으로 중용하였으며, 공적인 자리에서 협박받아 맺은 약속도 지키면서 신의를 보였다. 그리고 문공은 긴 망명생활동안 입은 은원을 확실히 갚았으며, 곤궁할때 초나라와 맺었던 약속을 군주가 되어서도 잊지 않고 이행하였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두 사람 모두 패자의 자리에서 전쟁에 패하지 않아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점도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두 사람은 주나라 왕실의 신하로서 덕을 쌓아 명성을 얻었으며, 충분한 외교력과 군사력을 통해 여러 제후국들의 사이를 조정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 질서를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속된 말로 하자면 교과서적인 패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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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목공과 송나라의 양공

진()나라의 목공은 제나라의 환공과 진()나라의 문공 다음으로 많이 춘추오패에 꼽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재라면 나이가 많은 '백리해'나 이민족인 '유여'도 마다하지 않고 중용하였고, 실패한 원정에도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며 신하들을 감싸고 용서하였다. 이러한 목공의 지휘하래에서 진()나라는 강성해 질 수 있었고, 이민족인 서융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등 대외적인 행보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또 배은망덕한 진()나라의 혜공에 대해서도 덕으로 대했으며, 결과적으로 패자가 되는 진()나라의 문공 또한 목공의 도움으로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목공이 정석적인 패자로 인정받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진()나라 주나라의 서쪽 변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원에서는 변방의 진()나라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했고, 이민족인 서융을 정복한 것도 중원의 평화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진()나라의 평화와 영토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또 후계자 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진()나라에 개입한 것도 진()나라 공녀 출신인 아내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후에 진()나라의 문공과 함께 주나라의 '양왕'을 도운 업적도 사실상 문공의 업적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저평가 되게 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목공이 사망하면서 많은 진()나라의 신하들이 함께 순장되었다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미 죽은 목공의 명령으로 순장을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과 인재들이 죽게되었고, 이로 인해 목공 사후에 진()나라가 쇠퇴하게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목공은 춘추오패로 평가받기에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역량을 벗어난 범위에서 저평가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나라의 양공은 이와 반대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제나라의 환공 사후에 후계자 분쟁으로 혼란스러운 제나라에 개입하면서 패자의 꿈을 키웠지만, 당시 송나라의 규모나 국력으로 보았을때 이는 상당히 무리한 꿈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공은 무리를 하며 패자의 기틀을 스스로 무너트리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회맹에 늦었다는 이유로 증나라의 군주를 삶아죽이는 무도한 짓을 하여 덕을 쌓기는 커녕 깎아먹었다. 이로인해 많은 소규모 제후국들의 인심을 잃었으며, 정면에서 반발한 조나라와 전쟁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체면만 구기게 되었다. 또 강대국인 초나라의 '성왕'과 패자의 자리를 두고 다투었는데, 그때 입은 치욕을 갚으려고 초나라의 동맹국인 만만한 정나라를 공격하는 소인배적인 모습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양공은 정나라를 구원하러 온 초나라의 군대와 대치하게 되었는데, 도하하는 초나라의 군대가 도하를 마치고 전열을 정비할때까지 기다려주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였다가 대패하였으며, 그 본인도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게 된다. 양공은 주나라의 신하로서 패자의 지위에 섰으며, 이민족인 초나라와 전쟁을 벌이 등 패자의 자격을 갖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의 행동이 패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오히려 양공 휘하에 재상을 지낸 이복형제 '목이'가 송나라의 군주였다면 패자가 되었을 것이라며 박하게 평가한다.

중원의 범위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초나라의 장왕

초나라의 장왕은 사실 제나라의 환공과 진()나라의 문공에 가장 가까운 패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궁궐에서 간신들을 몰아내고 인재를 등용하여 초나라를 다시 부흥시켰으며, 초나라는 이미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로 중원의 여러 제후국들이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다. 또 '절영지연'의 고사를 보면 그가 신하들에게 상당히 너그러운 덕을 쌓은 군주라는 점도 옅볼 수 있다. 그러나 중원의 패자가 되기에는 가장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주나라의 신하가 아니라는 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초나라의 군주는 일단 주나라로부터 봉작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제후국들이 주나라의 신하로서 어디까지나 '공'의 칭호를 쓰는데 반해, 초나라에서는 당시 주나라의 군주 밖에 쓸 수 없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또 장왕은 초나라를 안정시킨 후에는 북쪽으로 군사원정을 벌여 주나라를 위협하였고, 실제로 주나라 사신에게 주나라를 멸망시키겠다는 뜻의 협박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장왕은 주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그들의 질서 아래에 편입되어 패권을 다투었는데, 이점이 장왕이 춘추오패에 포함되는가 아닌가에 대한 견해가 갈리는 점일 것이다. 뭇 역사가들이 장왕이 춘추오패인가 아닌가를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떠나서 장왕은 중원의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초나라가 중원의 질서에 편입되면서, 중원의 개념이 장강 이남지역까지 넓혀지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만약 장왕이 주나라의 질서 아래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이후 득세하는 오나라나 월나라가 중원에 편입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오나라와 월나라

오나라와 월나라가 패자로 등장하는 시기에는 이미 중원의 패자에 대한 개념이 많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사실상 쇠퇴하던 주나라에 대한 명분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또 중원의 제후국들 간의 사이를 조정하면서 질서를 유지하는 조정자의 역할보다는 군사력을 통해 적국을 제압하는 현대적인 의미의 패자에 더 가까워진다. 오나라는 주나라 시조의 아들들이 세운 국가라고는 명분을 내세우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민족들의 나라로 시조로서 이주한 한족들의 후손이 남아있는지도 알 수 없는 국가이다. 그리고 오나라의 왕 합려는 명재상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국력을 크게 향상시켰고, 그 국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여러 제후국들을 아울러 초나라를 공격해 대패시켰지만, 이후 월나라를 공격하다가 부상을 입어 사망하는 등 군사적 공적 이외에는 뚜렷한 패자로서의 업적을 남겼다고 보기 힘들다. 하물며 합려의 아들 부차의 경우에는 월나라를 공격하여 제압하기는 하였지만 이는 자기들끼리의 분쟁이었으며, 이후 제나라나 노나라를 공격하는 등 군사적인 위세를 이용하여 회맹을 열어 억지로 패자로 인정받았고, 그 사이에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등 이러한 행위를 업적으로 봐야하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월나라의 구천도 이와 비슷한데 '범려'의 도움을 받아 월나라의 전성기를 열어 중원을 위협하는 오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지만, 이는 역시 개인적 혹은 개별 국가적인 원한에 의한 것으로 따로 대의를 따른 것이 아니면, 여기에서 궂이 이유를 찾자면 오나라도 월나라도 전대의 패자를 쓰러트렸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군사력을 이용해 전대의 패자를 제압하고 패자의 자리를 획득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인데, 이들이 춘추오패의 하나로 인정 받는다는 것을 보면, 역사가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른 패자의 역할의 변화를 고려했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초기의 패자들이 일종의 조정자에 가까웠다면, 후대의 패자들은 승리자에 더 가깝게 변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나타나는 전쟁의 양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춘추시대 초기의 전쟁들이 일정한 격식이나 예의를 차렸던데 반해, 전국시대에서는 점점 승리야 말로 정의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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