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왕을 만든 상인 「여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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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대상인 여불위

'여불위'(呂不韋) 중국의 전국시대 후반에 태어난 인물로, 그 태생은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사기'에 의하면 한나라 양적 출신이라고 하고, 전국책에는 위나라 복양 출신이라고 적혀있다.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천금의 부를 쌓아뒀다고 하는데,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는 행상으로 상당한 상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인 여불위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장사를 하였을 때,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진나라의 왕족 '영이인'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기이한 물건이니 사둘만 하다'(奇貨可居)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영이인은 당시 강대국이었던 진나라의 왕족이기는 하였으나, 아버지가 '소양왕'의 차남 '안국군'이었으며, 그나마도 서자로 형제들도 20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진나라의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조나라에서 조차 별로 가치가 없는 인질로 취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상인인 여불위의 입장에서는 값싼 물건으로 충분한 투자가치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소양왕의 장남이었던 '도태자'는 위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중 사망하였기 때문에 결국 안국군이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영이인은 안국군의 21명의 자식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어머니 하씨도 안국군의 총애를 잃은 지 오래되어, 평범한 시선에서 보았다면 별다른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불위는 남들이 보지 못하던 부분을 꿰뚫어 본 것 같은데,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왕을 만들겠다고 설득하였고, 영이인을 만나 그의 후원자를 자처하면서 오백금을 주었다고 한다. 이때 여불위가 영이인에게 자신이 성대한 집을 만들어 준다고 하자, 영이인은 자신의 집이나 잘 지으라며 물리쳤다고 하는데, 이에 여불위는 자신의 집은 영이인의 집이 성대해진 뒤에만 성대해질 수 있다고 문답하였다고 한다. 영이인 자신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여불위의 자신감에 기대를 걸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왕을 만들기 위한 투자

여불위는 먼저 자신이 준 오백금으로 화려한 마차를 사는 등 영이인의 겉모습을 꾸미고, 조나라의 유력자들을 방문하게 하는 등 소위 사교계에 데뷔를 시켰다. 이러한 행위는 조나라에서 영이인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영이인에 대한 관심과 소문은 자연스럽게 나라 밖으로 퍼져나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밖을 다진 여불위는 다시 오백금을 들고 진나라로 향했다. 안국군의 본래 정실부인은 '화양부인'인데, 그녀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안국군의 자식들을 사실 모두 첩을 통해 얻은 서자였다. 여불위는 이 점에 착안하였는데, 그는 영이인의 위치를 다른 자식들보다 한 단계 올리기 위해 화양부인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여불위는 화양부인에게 접근하여 영이인의 칭찬을 늘어놓았고, 화양부인의 측근을 포섭하였다. 여불위가 만난 측근은 사기에서는 화양부인의 언니라고 하고, 전국책에서는 동생이라고 하는데, 여불위는 그들을 꾀어 안국군이 죽은 이후에 의지할 대상으로 영이인을 추천하여 양자로 삼게 하였다. 이후 영이인은 화양부인이 초나라 출신인 것에서 따와 '자초'라 개명하였고, 안국군의 총애를 받는 화양부인의 영향력으로 무사히 후계자로 지명될 수 있었다. 여불위의 원대한 계획은 바야흐로 결실을 맺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진나라로 귀환

이제 영이인은 진나라로 돌아가 왕이 될 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지만, 가장 큰일이 하나 남아있었는데, 바로 진나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가 조나라에서 그의 위치는 진나라에 대한 인질이나 다름없었는데, 가치가 별로 없었을 때도 돌아가지 못했는데, 지금은 진나라의 후계자로 그 가치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이에 대해 전국책에서는 여불위가 직접 조나라의 왕을 알현하여 설득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는 영이인이 인질로 있어봤자 진나라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조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고, 영이인에게는 형제가 20명이나 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또 반대로 영이인을 진나라에 돌려줄 경우 후계자를 돌려준 조나라에 은혜를 느낄 것이지만,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을 빌미로 적극적으로 조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내용이다. 결과적으로 여불위의 설득으로 영이인은 조나라에서 풀려나 진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사기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이와 크게 다른데, 기원전 257년 진나라에서 군대를 보내어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공격하자, 그에 대한 복수로 조나라의 왕이 영이인을 처형하도록 지시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여불위는 600근에 달하는 황금으로 병사들을 매수하여 영이인을 탈출시켰고, 그대로 진나라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이윽고 기원전 252년에 소양왕이 재위한 지 55년 만에 사망하자, 아들인 안국군이 왕위에 올라 '효문왕'이 되었다. 그러나 효문왕도 오래 못 가 사망하였는데, 그는 250년 소양왕에 대한 상을 마치고 정식으로 즉위한 지 3일 만에 사망하였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너무 빨리 죽었기 때문에, 여불위가 암살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소양왕이 너무 오래 즉위했기 때문에, 효문왕이 즉위했을 때는 이미 상당하 고령이었고, 여불위의 계획은 이미 반석에 올랐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무리수를 둘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영이인은 효문왕의 뒤를 이어 '장양왕'으로 즉위하였고, 여불위는 이를 도운 공으로 진나라의 승상이 되었으며, 하남과 남양의 땅 10만 호를 하사 받아 '문신후'로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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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불위의 전성기와 조희

영이인에게는 '조희'라고 불리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사실 조나라에서 여불위가 영이인을 후원할 때 보낸 여인이다. 그녀의 태생에 대해서 알려진 내용은 별로 없지만, 여불위의 첩, 혹은 무희였다고 하며, 그 출신은 조나라의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집안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기에는 조희가 영이인에게 보내졌을 때에는 이미 임신했던 몸으로, 후에 아들 '영정'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사실은 여불위의 아이 일 수도 있다는 의혹이 있다. 그러나 전국책에는 이러한 내용은 기술되어있지 않고, 사기에서도 그는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명시하고 있기는 하다. 어쨌든 이들 모자는 영이인이 조나라를 탈출할 때도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화가 난 조나라 왕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숨어 지냈다고 한다. 이후 조희는 영이인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진나라로 가서 왕비가 되었으나, 영이인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34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조희는 태후가 되고 아들 영정이 왕위에 올랐다. 영정은 당시 13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이때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여불위가 암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불위는 왕을 보살피는 '상방'의 자리에 올랐으며, 왕의 아버지나 다름없다는 의미로 '중보'라고 칭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상 실권을 쥐고 있어 섭정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진나라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던 여불위는 거느리고 있는 식객이 3,000명에 달하였으며, 후에 진나라의 승상이 되는 '이사'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239년에 여불위는 이들의 힘을 빌려 '여씨춘추'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는데, 이 책은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그는 수도 함양의 성벽에 책을 진열해 놓고, 책에 내용 중에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다면 천금을 주겠다고 하여, '일자천금'이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노애의 반란과 최후

한편 여불위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조희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제 태후가 된 조희와 관계를 지속하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느꼈다. 당시 진나라에 남근이 크고, 성행위를 잘하는 것으로 소문난 '노애'라는 자가 있었는데, 여불위는 그를 환관인 것처럼 속여 궁에 들였고, 자기 대신 조희를 돌보도록 하였다. 이후 조희와 노애는 사실상 연인관계처럼 지내면서, 슬하에 두 명의 아이를 두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조희의 총애를 얻은 노애는 '장신후'로 봉해지기도 했는데, 이렇게 일이 커지게 되자 결국 영정에게까지 알려지고 말았다. 노애는 이참에 아예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자식들을 새로운 진나라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이러한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노애는 거열형으로 처벌되었고, 영정은 그의 삼족을 멸하고 아이들까지 모두 살해하였다. 영정은 그의 어머니에게 실망하여 한때 유폐시키기도 하였으나, 후에 신하들이 주선하여 화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 때문인지 영정은 어머니인 조희보다, 할머니가 되는 화양부인하고 더 가까웠다고 한다. 여불위도 책임을 피할 순 없었는데, 그는 상국에서 파면되어 하남의 영지로 쫓겨나게 되었다. 사실상 중앙에서 축출된 여불위였지만 그때까지도 그의 명성은 대단하여, 각국의 제후들이 사신을 보내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였던 것 같다. 이것이 그의 의도였는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기원전 236년 이러한 내용은 여불위가 다른 여러 나라와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혐의로 돌아왔다. 이에 영정은 여불위에게 나라에 무슨 큰 일을 하였기에 그런 영화를 누렸냐고 힐난하며, 촉 지방으로 이주할 것을 명령하였다고 한다. 결국 자신의 완전한 몰락을 받아들인 여불위는 기원전 235년 독을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가족들은 영정의 명령에 따라 촉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정의 여불위 숙청에 대해서, 성장한 영정이 온전히 권력을 되찾기 위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는 14년 후인 기원전 221년 진나라를 이끌고 사상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중국의 '시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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