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원나라시대 남송 최후의 충신 송말삼걸 「문천상」
- 역사
- 2023. 10. 3.
불세출의 천재
'문천상'(文天祥)은 중국 원나라시대인 1236년 남송의 강서성 노릉 길수현에서 태어났는데, 태몽으로 아기가 보라색 구름을 밟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운손'이라고 이름 지었다가 후에 '천상'으로 다시 고쳐지었다고 한다. 그는 상당히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것 같은데, 어렸을 적부터 공부에 힘써 18세 무렵에 여릉의 향교시험에서 1등을 하였고, 1256년에는 21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이 시기에 과거시험은 이미 상당히 오래된 제도로 중원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도전하였는데, 평균 합격 연령이 40세 정도였다고 하니, 21세에 장원으로 합격한 문천상의 재능이 대단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으며, 시험감독이었던 '왕응린'이 당시 남송의 황제였던 '이종'에게 대단한 인재를 얻은 것을 축하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문천상은 합격 4일 만에 아버지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3년상을 모두 치른 후에 조정에 출사 할 수 있었지만, 1259년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천도를 결정하자 이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하였다가 면직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문천상은 이종의 총애를 받는 환관 '동송신'과 대립하여 갈등을 겪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몽골의 침입
'칭기즈 칸'은 1227년에 사망하였지만, 그의 아래에서 강성해진 몽골은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중원의 북부인 화북지방을 장악하였다. 몽골은 이후 남쪽의 남송을 목표로 하였으나, '몽케 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감행하던 중 전사하면서 실패하게 되었고, 남송에서는 이때 공을 세운 '가사도'가 숙국공으로 봉해지는 등 실권을 잡게 되었다. 이 즈음 문천상도 다시 조정에 복귀했던 것 같은데, 그는 가사도와 견해가 맞지 않아 다시 물러났다고 한다. 이렇게 문천상은 매우 젊은 나이로 장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지만, 본인의 강직한 성향이나 혼란스러운 시대상황 때문에 실제로 관료로서 남송에 끼친 영향은 별달리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그 사이 가사도가 국정을 전횡하면서 남송은 차츰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1275년 13만 대군을 이끌고 나선 가사도가 원나라의 '바린 바얀'에게 패배하면서 남송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상태가 되었다. 이때 문천상은 가산을 처분해 1만 명에 달하는 의병을 모아 몽골에 대한 저항을 시작하였는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남송이 망했다며 부질없는 짓이라고 설득했지만, 그는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나라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이라면서 계속했다고 한다. 이 시기 그는 아내를 얻어 가정을 꾸리고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나라에 대한 의를 지키기 위해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저항을 택한 것이다.
원나라의 포로
1276년 문천상은 우승상 겸 추밀차, 도독제로군마로 임명되었으며, 이는 적어도 명목상으로 남송의 모든 권력을 다 갖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황제인 '공제'는 겨우 5세로 대신 태황태후인 사씨가 섭정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 남송은 멸망을 코 앞에 둔 상태로 많은 권력을 갖게 되었어도 큰 의미는 없었는데, 문천상은 '장세걸' 등과 함께 끝까지 원나라에 저항하려고 하였으나,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신하들이 겁을 먹고 도망쳐서, 조정에 남아있는 자들은 원나라와 화평을 원하는 이들이 대다수인 상태였다. 결국 문천상은 평화 교섭을 위한 사자로 남송을 대표하여 바얀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이 자리에서도 항복할 생각이 없음을 내비치면서 원나라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결국 바얀은 문천상을 강제로 구금하고, 따로 사자를 보내어 남송의 조정의 항복을 받아내게 된다. 이후 문천상은 포로로 원나라 수도인 대도(북경)로 보내졌는데, 굴복하지 않았던 문천상은 도중에 탈출하여 장세걸, '육수부' 등과 합류하여 '단종'을 새 황제로 옹립하고 저항을 이어갔다.
망국의 충신
남송의 저항은 계속이어졌지만, 이 시기에는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는데, 결국 문천상도 1278년 '오파령 전투'에서 패배하여 다시 포로로 잡히게 되었고, '애산 전투'에서 남송의 마지막 황제인 '소제'와 장세걸, 육수부 등이 모수 사망하면서 남송은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이때 문천상도 포로의 신분으로 원나라 진영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자신의 비통함을 '육희가'로 지어 표현하였다고 한다. 결국 문천상은 대도로 압송되었는데, 원나라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쿠빌라이 칸'은 사람을 보내 그를 등용하려고 하였다. 쿠빌라이는 과거 남송의 신하, 공제, 그리고 문천상의 형까지 보냈지만 그를 설득하지 못했고, 1283년에는 본인이 직접 문천상과 대면하여 설득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천상은 끝까지 원나라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정기가'를 지어 자신의 충절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쿠빌라이에게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는데, 남송의 각지에서 문천상을 구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처형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때 쿠빌라이는 혹시라도 문천상의 마음이 바뀌면 즉시 처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하며, 도중에 다시 마음이 변해서 처형 명령을 취소하라는 사자를 보냈는데, 사자가 도착했을 때는 문천상이 이미 처형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문천상은 처형당할 때 자신의 일은 모두 끝났다는 '오사필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며, '정필시'를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나라가 망했음에도 자신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남송을 따른 문천상과 장세걸, 육수부를 '송말삼걸'이라며 부르며 칭송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