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정나라의 장공 「희오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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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패자의 개념을 만들어낸 장공

'장공'의 이름은 '희오생'으로 정나라의 '무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나라는 주나라 '여왕'의 아들이자 '선왕'의 동생인 '희우'가 기원전 806년에 영지를 받아 세운 나라인데, 그는 장공의 할아버지이며 정나라의 군주 '환공'이면서 동시에 주나라의 신하로 사도를 겸했다고 한다. 정나라는 주나라에서 분리된지 얼마 안된 왕족들이 세운 만큼 다른 나라에 비해 주나라와 가까웠고, 이 덕분도 있어 무공은 주나라 경사의 직위를 가졌으며, 이는 장공에게도 세습되었다. 그러나 장공은 주나라 왕실보다는 자신이 다스리는 정나라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정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주나라의 관직인 경사의 권한까지 이용하였기 때문에 주나라 왕실과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주나라를 더욱 쇠퇴시기는 역할을 하게 된다. 장공은 주변 여러 제후국들과 분쟁을 하면서 주나라의 직위를 남용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회맹을 열어 여러 제후국들을 분쟁에 개입하거나 개입시키면서 스스로 '패후'라고 칭했는데, 이것이 패()를 칭한 최초의 일이라고 한다. 이후 춘추시대의 패자들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 주나라의 쇠퇴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행동을 본받아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쪽이든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정나라의 후계자 분쟁

장공의 이름인 오생은 해석에 따라 잠을 자다 낳은 아이거나, 또는 거꾸로 태어난 아이를 뜻한다고 하는데, 어느쪽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 탄생에 문제도 있어 어머니 '무강'에게 별로 사랑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무공이 병에 걸리자 무강은 장공이 아닌, 동생 '희단'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권하였다고 하는데, 무공이 이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기원전 744년에 무공이 사망했을 때 장공이 뒤를 이어 정나라의 군주가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강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은 것 같은데, 무강은 글을 올려 아버지 무공이 그랬던 것처럼 장공에게도 3년 상을 치루는 동안 정무를 신하들에게 맡길 것을 권하였고, 동생 희단에게 영지 '제읍'을 나누어 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 신하들이 나서서 장공에서 정무를 볼 것과 나라를 나누어 주지 말 것을 청했다고 하는데, 장공은 이를 거절하였으며 희단에게는 '경성'을 주었다. 자신의 영지를 갖게 된 희단은 반란을 꿈꾼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의 야심과 무강의 부추김을 받아 착실하게 세력을 키워나갔고, 기원전 722년에 장공이 주나라 조정에 입조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 음모를 장공은 모두 예상하고 있었고, 반란은 신속하게 진압되었으며, 희단은 자신의 영지인 경성의 백성들에게도 배신당해 위나라로 도망쳤다. 사실 이는 예상하기 쉬운 음모이기도 하였으나, 일설에 의하면 장공이 무강의 청에 따라 3년 상을 치르거나 영지를 나누어 준 것은, 모두 계획을 미리 눈치챈 장공이 그들을 부추기기 위해 파놓은 함정이라고도 한다. 결과적으로 장공은 반란은 상당히 안정적으로 진압할 수 있었으나 희단을 놓쳤고, 위나라로 도망친 그는 앞으로 정나라와 주변 제후국들과의 사이에서 분쟁의 씨앗으로 남게 된다. 이때 장공은 무강을 유폐시키고 황천에 가기 전까지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기도 하였지만 금세 이를 후회하였다고 하는데, 효심이 깊고 충성심이 강한 신하인 '영고숙'의 중재로 땅을 파고 샘을 내어 인공 황천을 만들어 다시 만나 화해하였다고하는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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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및 주변 제후국들과의 갈등

한편 위나라로 도망간 희단의 아들 '희활'이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로 쳐들어와 영토를 탈취하는 등 소란을 일으켰는데, 이에 장공은 주나라 조정에 이 반란에 대해 보고하였고, 주나라의 인정을 받아 조정의 군대인 '왕사'와 괵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해 기원전 721년에 희활을 징계해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위나라와 정나라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아지게 되었으며, 희단이 계속 위나라에 머물렀기 때문에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어찌되었던 이 반란은 어디까지나 장공에게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주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주나라의 '평왕'과 장공의 사이는 별로 좋지 못했다. 평왕은 장공이 주나라에 대한 의무는 등한시하며 정나라의 이익을 위해 경사의 권한을 남용하는 것을 경계하였고, 이에 경사 권한의 반을 쪼개어 '괵공'에게 나누어 주려고, 막상 장공이 큰 불만을 품게되자 평왕은 자신의 아들 '희호'와 장공의 아들 '희홀'을 서로 교환하여 데리고 있기로 하며 타협하였다. 이는 사실상 평왕이 장공의 불편한 심기를 고려한 조치로 당시 주나라의 권위가 얼마나 몰락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데, 기원전 720년에는 평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환왕'이 실제로 경사의 권한을 괵공에게 나누어 주자, 장공은 군대를 보내 주나라 들판의 곡식을 약탈하여 무력 시위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 해에 송나라의 전 군주인 '목공'의 아들 '자빙'이 현 군주 '상공'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껴 정나라로 망명하였으며, 장공은 당시 제후국들 중에서도 상당히 강대국이었던 제나라와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기원전 719년에 위나라 '환공'의 이복동생이 '희주우'가 희단의 협력을 받아 환공을 살해하고 군주가 되었는데, 위나라는 희단의 일로 정나라에 원한이 있었고, 송나라는 자빙을 죽여 후환을 없에려하였기 때문에, 두 나라의 이해가 일치하게 되었다. 이에 송나라와 위나라는 진나라와 채나라까지 끌어들려 정나라를 공격하였으며, 이때 노나라에도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노나라의 '은공'은 이를 거절하였지만, 노나라의 공자 '희휘'가 멋대로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고 한다. 다섯나라의 연합공격에 정나라는 패퇴하여 한때 수도가 포위되기도 하였지만, 피해는 일대의 곡물을 약탈당하는 선에서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희주우는 얼마 안있어 부하 '석작'의 계략으로 처형되고, 위나라에서는 그의 동생이 새로 군주의 자리에 올라 '선공'이 되었다. 이후 기원전 718년에 정나라는 주나라의 도움을 받아 위나라와 송나라에 보복하였으며, 위나라와 송나라로 이에 대응하여 보복을 이어갔다.

주나라 권위의 완전한 몰락

기원전 718년에 정나라는 진(晉)나라의 내전인 '곡옥대진'에 개입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주나라 조정의 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일로 어느정도 사이가 원만해졌다고 생각했는지 이듬해인 기원전 717년에는 주나라의 곡식을 약탈하여 각을 세운 이후 처음으로 장공이 조정에 입조하게 된다. 그러나 환왕은 여전히 장공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박대하였고, 이로 인해 주나라에 대한 장공의 불만도 더 커지기만 했다. 이 해에 정나라는 송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에 송나라는 노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했고, 이를 본 장공은 노나라와 우호를 다지며 아군을 늘렸다. 정나라는 노나라와 손을 잡고 이전에 쳐들어왔던 진나라에 보복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송나라, 진나라와 강화하며 혼인을 통해 진나라와의 사이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였다. 주변 제후국들이 어느정도 진정되자 장공은 다시 주나라 왕실을 표적으로 삼은 것 같은데, 그는 정나라와 노나라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영지를 맞바꾸려고 시도하였다. 이 영지들은 태산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과 노나라 시조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는데, 두 곳 모두 상당히 의미가 있는 지역이었지만 동시에 서로 상대국가의 영토 안에 위치해 있어 사실상 관리가 힘들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효율적인 관리는 내세우고 있었지만, 왕이 하사한 영토를 제후들이 사사로이 교환한 다는 것은 사실상 왕권 그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에 화가난 환왕은 아예 경사의 직위를 하나 더 만들어서 괵공에게 하사하였고, 이로서 장공은 좌경사, 괵공은 우경사가 되었다. 기원전 714년에는 주나라 왕실을 거스른 송나라를 환왕의 명을 받아 공격하였는데, 이때 장공은 제나라, 노나라와 함께 위나라, 채나라, 성나라를 끌여들였다. 이듬해인 713년에 정나라는 제나라와 노나라를 이끌고 송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확보한 영토를 노나라에 주어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예법을 지킴으로서 명성을 얻으면서, 결과적으로 노나라와 송나라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또 장공은 주나라 왕실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을 빌미로 채나라와 위나라, 성나라를 공격하여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였다. 기원전 712년에는 다시 제나라와 노나라의 도움을 얻어 허나라를 쳤는데, 허나라의 군주를 몰아낸 장공은 나라의 반은 허나라 군주의 동생인 '허숙'에게 주었고, 나머지 반은 자신의 일족인 '희획'에게 맡겼는데, 그 기한을 자신의 사망시까지로하여 실속과 명분을 모두 챙겼다. 이때 환왕은 이처럼 자신과 불화하면서 제후들을 이끌고 권한을 남용하는 장공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한가지 계책을 내었는데, 그는 정나라의 읍 3개를 빼앗고 대신 '무왕' 통치시절에 공신 '소분생'에게 준 12개의 고을을 장공에게 주기로 하였다. 그런데 소분생의 땅은 이미 이민족인 '북적'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공은 눈 뜬채로 땅만 빼앗기게 되었고, 주나라 왕실과 장공과의 사이는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후로도 장공은 노나라에서 일어난 찬탈 행위에 대해 정치적 이익을 위해 눈감아주거나, 남방에서 성장하고 있는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인접한 채나라와 회담을 하였으며, 제나라를 도와 공격해온 북융을 물리치는 등 주나라 왕실을 무시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나갔다. 결국 기원전 707년에 환왕은 주나라의 군세에 정나라와 사이가 안 좋은 채나라, 위나라, 진나라의 병사를 더해 직접 이들을 이끌고 정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장공이 이를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환왕 스스로 부상을 입기까지 했다. 장공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환왕에게 사과하였고, 환왕도 형식적으로 이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해 주나라 왕실의 권위는 떨어져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장공의 사망과 정나라의 몰락

기원전 701년 장공이 사망하고, 아들 희홀이 뒤를 이어 '소공'이 되었지만, 장공의 많은 아들들은 각자 군주가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얼마지나지 않아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극심한 혼란 후에 '여공'이 정나라를 차지하였지만, 그 사이 정나라의 국력은 쇠퇴하였으며, 초나라와 제나라, 진()나라 등이 득세하면서 정나라는 역사의 전면에서 한걸음 물러나게 된다. 장공은 주나라의 신하이자 제후국의 군주로서 어디까지나 주나라에 복종하면서 동시에 제후국들 사이에서 중원의 패권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후대 여러 제후국들의 군주에게 야심을 성취할 새로운 길을 보여주어 결과적으로 춘추시대의 패자의 길을 나타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후대 '춘추오패'로 불리는 이들에 비해 저평가를 받아 춘추오패의 일원으로는 잘 꼽히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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