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대십국시대 다섯 나라를 섬긴 「풍도」
- 역사
- 2023. 7. 26.
후당의 재상
'풍도'(馮道)는 당나라 말기인 882년경에 태어났는데, 영주 경성 사람으로 평범한 집안의 태생이었다고 한다. 이 시기 당나라에서는 '황소의 난'이 진압되기는 하였으나, 각지의 군벌들이 제 힘을 믿고 날뛰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나 다름 없었다. 결국 907년 당나라의 신하였던 '주전충'은 황제를 협박하여 선양을 받아내었고, '후량'을 건국하면서 당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당나라의 멸망을 시작으로 지방의 군벌들도 더 이상 중앙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날뛰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에는 유수광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유수광은 본래 당나라의 노룡절도사 '유인공'의 아들로, 아버지의 첩을 탐하여 집안에서 쫒겨났다가, 무리를 이끌고 아버지를 공격하여 옥에 가두고, 후에 아버지를 구하러 온 형까지 죽인 극악무도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후 노룡절도사를 칭하며 횡포를 부리다가, 911년에는 아예 나라를 세워 국호를 '대연'이라고 칭하고, 수하들에게 멋대로 관작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풍도는 이 유수광 휘하에서 처음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가 인근 지역을 침공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고 한다. 유수광은 세력을 넓히기 위해 인근 지역을 공격하다가 당시 유력자였던 '이존욱'과 맞붙게 되었고, 결국 914년에 이존욱에게 패해 멸망하였다. 이때 풍도는 이존욱의 휘하로 이동한 것 같은데, 그는 이존욱의 신하였던 '장승업'의 눈에 들어, 이번에는 이존욱 밑에서 관료로 생활하였다고 한다. 923년에 이존욱은 '후당'을 건국하고 황제가 되었는데, 풍도는 '한림학사'에 임명되어 요직을 차지하였다. 이 시기 풍도는 아버지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한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상을 지루었다고 하는데, 그 사이 이존욱은 실정을 거듭하여 지지를 잃었고, 926년에는 이사원이 반란을 일으켜 제위를 찬탈하였다. 풍도는 다시 현직에 복귀하여 이사원으로부터 재상에 임명되었고, 이사원은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풍도와 '안중회'가 글을 읽어주어 일을 처리하였다고 한다. 그의 능력이 어땠는지는 둘째치더라도 운은 상당히 좋았던 것 같은데, 난세에 기회를 잘 잡아 재상의 자리까지 차지한 것이다.
후진의 재상
이사원은 황제로 즉위할때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933년 제위 8년만에 사망하였고, 아들인 이종후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에 이사원의 양자였던 '이종가'가 반란을 일으켜 재위를 찬탈하였고, 풍도도 이종가에게 가담하여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936년 이종가와 갈등 관계에 있었던 개국공신 '석경당'이 거란족의 '요나라'를 끌어들였고, 그렇게 후당이 멸망하고 '후진'이 세워졌다. 이때 석경당이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 16주'를 요나라에 넘겨주었고, 이 땅은 명나라 이전까지 되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풍도는 석경당에 의해 후진의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석경당은 풍도를 포함하여 요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당시 요나라의 황제였던 '야율덕광'이 풍도를 자신의 신하로 삼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풍도는 이러한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후진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석경당은 풍도를 매우 신뢰하게 되었다고 한다. 석경당이 세운 후진도 이전의 국가들과 혼란스러운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았는데, 석경당은 여러 반란에 시달리면서 병을 얻어 942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후계자는 어린 아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풍도를 불러 후사를 부탁하였는데, 풍도는 석경당이 죽자 그의 어린 아들 대신, 장성한 조카인 '석중귀'를 옹립하였다. 이러한 풍도의 선택은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상당히 비정하기도 한데, 적어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황제가 된 석중귀는 요나라에 바치던 조공을 끊고, 사신을 폭행하는 등 요나라에 등을 돌리는 행동을 이어갔다. 결국 요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후진을 공격하였고, 946년에는 수도인 '개봉'을 함락시키면서 후진은 멸망하게 된다. 개봉에서 풍도를 다시 만난 야율덕광은 그를 태부로 임명하였고, 풍도는 또 한번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적국에 의해 높은 직위에 앉게 된 것이다.
후주의 재상
후진이 멸망하고 이듬해인 947년 '유지원'이 비어있는 개봉을 장악하고 '후한' 건국하자, 거란족의 대군은 다시 북쪽으로 철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와중에 야율덕광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 중에 포로로 끌려가던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풍도도 여기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거란족은 귀국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그냥 놓고 가기로 하였고, 풍도를 포함하여 후진의 관료였던 자들은 그대로 후한으로 가서 유지원 휘하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후한도 오래가지 못하였는데, 나라를 세운 유지원은 겨우 10개월만에 사망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유승우'도 공신들과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반목하였다. 결국 950년 개국공신이었던 '곽위'가 반란을 일으켜 '후주'를 건국하였고, 풍도는 후주에서 또 다시 재상이 되었다. 954년 곽위가 사망하고 양자인 '시영'이 새로 황제가 되었는데, 곽위와 원한 관계에 있던 '북한'이 그 틈을 노리고 후주로 쳐들어왔다. 이에 시영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맞서려고 하였는데, 이때 풍도는 끝까지 시영이 직접 나서는 것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고평 전투'에서 후주군은 대승하였지만, 전황 자체는 상당히 위태로웠기 때문에 풍도가 꼭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만, 반대로 시영이 직접 출전하지 않았다면 전황상 후주군이 대패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풍도는 이 전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다섯 나라를 섬긴 간신
풍도는 후연을 시작으로 후당, 후진, 요나라, 후한, 후주에서 일했기 때문에 사실은 여섯 나라를 섬긴셈이지만, 명분도 없고 존속기간도 매우 짧았던 후연을 나라로 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통상 다섯 나라에서 관직을 지낸 것으로 본다. 그 중에서도 후당, 후진, 후주에서는 재상을 지냈고, 요나라에서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천자의 스승인 태부로 임명되기도 하였으니, 분명 그 능력이 남들에 비해 뒤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되나, 실제로 그가 실무를 보았던 나라들은 역사가 짧고, 그가 현직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룬적이 없기 때문에, 그 상세한 능력에 대해서 가늠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다섯 나라에서 열한명의 왕을 모시면서도, 그 목숨과 지위를 유지한 것 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처세술이 대단함은 익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후세의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데, 혹자는 많은 군주와 나라를 배신한 그를 간신으로 여기고, 혹자는 나라나 군주에 얽메이지 않고 백성을 위해 정치를 행했다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상상해 보는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