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대십국시대 중원을 석권한 북송의 태조 「조광윤」
- 역사
- 2023. 7. 22.
나라가 서고 몰락하기를 반복하는 난세
'조광윤'(趙匡胤)은 927년경 '후당'의 수도인 '낙양'의 협마영에서 '조홍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마지막 왕의 후손으로, 탁군 고안현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조광윤의 증조할아버지때부터 여러 군벌 휘하에서 종군하며 명성을 쌓아, 아버지는 후당의 금군 장관이었고, '후진'과 '후한'에서도 어느정도 지위를 유지하였는데, 이는 '후주'가 건국되고 나서도 계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광윤도 아버지 밑에서 어느정도 군사적 경험을 쌓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946년에 본격적으로 군생활을 시작하였는데 후한의 '추밀사'였던 '곽위'의 휘하에 있었다고 한다. 이후 951년 곽위가 후주를 건국하자 개국공신으로 금군에서 근무하였으며, 곽위 사후 황제가 된 '시영' 밑에서도 금군장관으로 여러 원정에 참여하였는데, 특히 '북한'과 싸운 '고평 전투'에서 활약하여, 불리하던 전세를 뒤집어 승리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큰 공을 세운 조광윤은 후주에서 '광국절도사', '전전도지휘사', '검교태위전전도검', '금군총장령' 등의 직위를 역임하였다.
진교의 변
959년 시영이 사망하고 아들인 '시종훈'이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7세에 불과하였다. 당시는 중원은 여러 나라로 갈라져 서로 다투고 있었으며, 북쪽에는 거란족의 강대한 '요나라'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고 있었는데, 960년이 되자 요나라와 북한의 연합군이 대대적으로 침공한다는 소식이 궁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에 조광윤이 금군을 이끌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진하였는데, 출진한 다음날 수도인 '개봉' 동북쪽의 '진교역'에서 야영을 하며 밤을 보냈다. 이때 조광윤은 부하들과 모여 술자리를 가졌는데, 조광윤은 평소에 술을 마시면 취할때까지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술을 많이 마신 조광윤이 취해 자고 있는데, 동생인 '조광의'와 심복인 '조보'가 급히 그를 깨워 밖으로 데려나가더니, 억지로 황포를 입히고서는 칼을 바치며 황제가 되어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술이 덜깬 조광윤이 당황하면서 서 있자 일제히 만세를 외치면서 그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결국 무를 수 없다는 것을 안 조광윤은 그대로 개봉으로 회군하여, 수도를 장악하고 어린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국호를 '송'으로 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를 '진교의 변'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만 들어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는 후대에 상당히 미화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 요나라의 역사서에는 중원의 침공에 대한 내용도 없기 때문에, 상당부분 각색된 것으로 보인다. 요나라의 침공에 대한 정보 자체가 쿠데타를 위한 날조된 정보였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황제가 입는 황포를 준비해 놓았다는 점이나, 애초에 출진 이전에 조광윤이 자신의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놓았다는 것을 보면,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촌극에 불과하거나, 이런 촌극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광윤의 찬탈은 당대와, 또 그 이전에 있었던 것과는 많이 다른데, 먼저 개봉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무의미한 약탈이나 학살이 자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보통의 찬탈자들처럼 이전의 권력자들을 시해하는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이러한 점에 대해 어느정도 고려하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 시종훈의 경우도 '정왕'에 봉해져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였고, 유명한 '단서철권'도 하사 받았다고 하지만, 시종훈은 21세의 젊은 나이로 자식도 남기지 못하고 요절하였으며, 그의 형제들도 모두 다른 성씨로 바꾸어 살아갔기 때문에, 실제로 송나라에서 대우받은 시씨들은 시종훈의 사촌에 해당하는 이들의 자손이었다. 그러나 어느게 진실인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시씨들이 송나라에서 좋은 대우를 받은 것은 사실이고, 이후 '남송'의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에도 참전했다고 한다.
중원을 석권한 태조
'배주석병권'이라는 말이 있는데, 말 그대로 술을 권해서 병권을 놓게 한다는 것이다. 조광윤은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도 술자리를 가졌지만, 나라를 다지기 위해서도 종종 술자리를 가졌다. 960년 소의절도사 '이균'과 회남절도사 '이중진'의 반란을 진압한 조광윤은 자신이 세운 '북송'이 이전의 국가들처럼 금방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될 필요를 느꼈다. 그런데 조광윤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상당히 특이한 방식을 선택했는데, 그는 휘하의 장수들을 초청하여 술자리를 열고, 충분히 술기운이 돌았다고 생각하자 공신들을 불러서 솔직하게 제안했다. 조광윤은 휘하의 공신들이나 세력가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일선에서 물러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에 집중할 것을 조용히 권하였다고 한다. 바로 다음날 공신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고, 조광윤은 성공적으로 숙청없이 후환을 없엘 수 있었다. 이후에도 몇번 비슷한 방식을 지방 절도사들의 군권을 빼앗았으며, 그 외에도 일부 공신들을 심하게 취하게 한 후에 국가의 발전금 명목으로 돈을 빼앗기도 했다고 한다. 조광윤은 이러한 상당히 평화로운 방식으로 지방의 관료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던 군사와 행정, 재정에 대한 권한을 중앙으로 복속시켜 황권의 강화와 안정을 꾀했으며, 동시에 내부가 안정된 만큼 국력을 온전히 국가발전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단순히 권한과 직책을 빼앗기만 하고 끝난 것은 아니었는데, 그는 스스로 희생한 공신들을 위해 관직을 준비해주었으며, 토지와 재산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반발이 생기지 않았다. 이처럼 이야기만 놓고 보면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해결된 것 같지만, 조광윤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면 그 외의 내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조광윤은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는데, 이것은 비단 지휘와 통솔에 관련된 것 뿐만 아니라, 개인의 무력도 상당히 높았던 것 같다. 그는 창술과 봉술에 능했으며, 전쟁터에서는 쇠로 된 봉을 휘둘렀고, 무예에 능하여 스스로 '삼십이세장권'이라는 무술을 창시하였다고 한다. 황제가 되어서도 옥으로 된 도끼 모양이 장신구를 좋아해서 항시 들고다녔는데, 때때로 말보다 주먹이 빠른 성격으로, 한번은 후원에서 활쏘기를 즐기고 있는데 관리가 상소문을 들고오자, 자신을 방해하여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며 옥부로 때려서 관리의 이가 두 개나 부러졌다고 한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면, 만약 술자리에서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생명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며, 심지어 자객도 아니고 황제 본인이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실력이 충분하였다는 것이다. 설령 근거지로 도망쳐 반란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황제가 당대의 군사 지휘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성공을 장담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궂이 가시밭 길을 걷는 선택을 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오래 함께한 공신들이라면 조광윤이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신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내실을 다진 조광윤은 정복사업을 시작하여, 963년에는 호북성의 형남을 장악하였고, 965년에는 사천성의 '후족'을 병합하였으며, 970년경에는 중국의 북부지역 대부분은 손에 넣어 요나라를 '만리장성' 밖으로 쫒아내었다. 그리고 971년에는 '남한'을 멸망시키고, 975년에는 '남당'을 멸망시키면서, 중원 통일까지는 북한과 '오월' 만이 남게 되었다.
과거제도와 문관 중심의 통치
조광윤은 과거부터 계속 문제가 되었던 지방 군벌세력을 억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당나라 때부터 전란의 중심에 있던 절도사의 권한을 줄여 명예직에 가깝게 만드는 등 상당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또 심복인 조보의 조언을 받아들여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인재를 발굴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 과거제도를 개선하였는데, 황제가 직접 과거시험을 주관하고 실시하기도 하였다. 북송은 이러한 중앙집권화와 관료제를 통해 무관들보다 문관들이 더 활약하기에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또 치수를 위해 토목 사업을 벌이고, 황무지를 개간하였으며, 나무를 싶고 숲을 만드는 것을 장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광윤은 정복사업을 진행함에 있어서도 북송에 항복한 타국의 군주들도 처형하지 않고 귀족으로 삼는 등 상대적으로 온건한 방식을 취했는데, 이는 정복한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북송의 제도를 통해 이미 지방 군벌 세력이 유지 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큰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조광윤은 이러한 다소 온건한 통치 방식으로 인해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석각유훈
976년 조광윤은 남은 적들 중 북쪽의 북한을 토벌하기 위한 원정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 해 겨울에 49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당시 상황이 상당히 의심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 동생인 조광의가 황제의 자리를 이었고, 이후 조광윤의 자식들도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았기 때문에, 동생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 후로 북송의 황제들은 대대로 조광의의 자손들이 이어나갔는데, 이러한 기조는 '금나라'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바뀌게 된다. '정강의 변'으로 조광의의 자손들이 대거 금나라로 끌려갔기 때문에, 남송에서는 다시 조광윤의 자손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북송에는 태조 조광윤이 돌에 새겨 자손들에게 남겼다는 '석각유훈'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궁중에서 극비리에 전해지는 것으로 정해진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여, 북송의 재상이라 하더라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돌은 북송의 황제에 즉위한 자들은 반드시 보도록하였는데, 후에 금나라에게 수도를 빼앗기면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의외로 그 내용 자체는 별게 없었는데, 자신에게 선양을 해준 시씨 가문의 자손을 잘 돌봐주라는 것과 사대부나 선비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을 본 각각의 황제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알 수 없으나, 간단하게 말하자면 은혜를 잊지 말고, 신하들에게 잘 대해주라는 것이니, 분명 통치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 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북송에서는 실각한 관리들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유배형에 처했으며, 처형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