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명청교체기 명나라를 멸망시킨 반란군의 수장 「이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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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명나라 말기의 혼란

'이자성'은 중국 명나라시대인 1606년에 섬서성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어느정도 넉넉한 형편이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인 '이수충'은 명나라의 세금징수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에서는 과도한 세금으로 인해 납부를 기피하거나 유민이 되어 떠도는 사람이 늘어났는데, 이 때문에 징수액을 맞추기 위해 큰 빚을 지게 되면서 집안이 몰락했으며, 이수충은 역참에서 역관으로 일하다가 사망하였고, 이자성도 역졸로 들어가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명나라에서는 재정 악화를 이유로 역관들을 대거 폐쇄하였는데, 졸지에 실업자가 된 이자성은 다시 군에 입대하였다. 이 시기 명나라는 이미 몰락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특히 여진족들이 세운 후금이 만주지역을 장악하면서 국경이 위태로웠다. 여기에 더해 기후변화로 인해 세계 각지에서 기근이 발생하였는데, 1627년에 섬서성 일대에서 대기근이 일어나면서 불만이 극에 달했다. 본래부터도 실업자가 된 역졸들이나 제대로 된 봉급을 받지 못하는 후방의 군인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키거나, 산에 들어가 도적때가 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대기근이 일어나자, 이를 시발점을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걷잡을 수 없이 발생하였다. 1628년에는 '왕가윤'이라는 자가 봉기를 일으켰는데, 그가 본격적으로 세력을 조직하면서 인근의 무리들이 합류하여 그 규모가 점점 커졌다.

홍승주의 토벌군

왕가윤은 1631년에 사망하였지만 이때는 이미 완전히 반란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고, '고영상'이 그 뒤를 이어 반란군의 수괴가 되었으며, 1633년까지 섬서성과 산서성 일대에서 명나라의 지방 관리들과 크고 작은 싸움을 벌였다. 고영상은 본인을 '틈왕'이라고 칭하였는데, 그의 휘하에는 이자성을 비롯하여 '장헌충'이나 '나여재' 같은 이들이 반란군의 우두머리로 휘하 세력들을 이끌었고, 명나라 황제인 '숭정제'는 반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지시하였다. 1630년 '홍승주'가 섬서 총독인 '양학'의 휘하에 부임하였는데, 당시 양학을 비롯한 명나라 조정에서는 반란군을 선처하여 회유하는 정책을 폈다고 한다. 반면 홍승주는 이에 반대하여 적극적이고 강경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듬해인 1631년 양학이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연유로 파직되자, 홍승주가 새로 총독이 되어 반란에 대한 명나라의 방침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홍승주는 격렬하고 끈질기게 반란군을 공격하였는데, 그는 일단 토벌한 후에 남은 잔당을 회유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수차례 반란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전공을 올렸다. 홍승주는 섬서 삼변 총독에 태자태보, 병부상서를 겸하는 등 크게 승진하여 사실상 농민 반란군 토벌의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반란군 세력들이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행동하였고, 홍승주의 토벌군을 피해다니는 등 효과적인 대응을 이어갔다. 1635년 명나라의 토벌군은 동시다발적으로 반란군 세력을 공격하였는데, 이자성은 홍승주의 공격을 받아 총산 지역에 3개월이나 고립되었으며, 고영상은 한중 지역에서 포위되었다가 빠져나오는데 성공하였지만, 이내 매복한 명나라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고, 고영상은 홍승주에게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1636년에 고영상이 처형되었는데, 이후 그의 잔존 세력은 이자성에게 합류하였고, 이때 이자성이 고영상을 대신하여 틈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후금은 '홍타이지'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국호를 '대청'으로 고치고, 여진족이 아닌 만주족으로 고치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 산해관을 통해 명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북쪽으로 크게 돌아 내몽골 지구를 통해 섬서성과 산서성을 지나 하북성 일대까지 약탈하였다. 이 때문에 반란 진압군 중 일부가 이를 방어하기 위해 이동하였고, 이 틈을 타고 장헌충과 나여재 등이 동쪽으로 도망쳐 다시 세력을 모았다. 1637년에 이자성은 홍승주를 피해 사천지역에서 활동하여 10여개의 성을 함락시키기도 하였는데, 1638년에 다시 섬서성으로 돌아왔다가 홍승주에게 크게 패하였다. 장헌충도 남양에서 '좌량옥'에게 대패하여 도망쳤다가, 명나라에서 회유하자 나여재와 함께 투항하였다. 이로서 사실상 이자성을 제외한 반란군은 거의 와해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1639년 이자성도 '동관 전투'에서 대패하여 십수명만 대동하고 도주하면서 반란은 막을 내리는 듯 했다. 그러나 아직 이자성과 장헌충, 나여재 같은 반란군 우두머리들이 모두 살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반란의 근본적인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당시 명나라 황제인 '숭정제'는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었다고 판단하고 홍승주를 조정으로 불러들여 만주의 청나라를 상대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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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난

한편 명나라에서는 명장 '원숭환'을 처형하는 등 실정을 범하고 있었고, 청나라에서는 항복한 명나라 장수들을 귀순시키며 명나라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란군들은 명나라의 토벌군이 사라지자 즉시 다시 세력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이자성은 감숙성의 회족 반란군 지도자였던 '마수응'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하였으며, 장헌충과 나여재도 각각 다시 반란을 일으켜 세력을 모았는데, 그사이 계속되는 반란과 청나라의 공격으로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다시 반란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처음 반란을 일으켰을 때 보다도 더 큰 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반란군들은 명나라의 시선이 북쪽에 쏠려있는 틈을 타 먼저 화남지역으로 내려가 활동하였는데, 하남성을 중심으로 지역을 돌며 명나라 관료들을 살해하고, 관아의 창고를 열어 재물과 곡식들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토지 재분배를 실시하는 등 토착 농민들을 위한 활동을 통해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이 시기 '이암', '우금성', '송헌책' 같은 지식인 계층도 반란군에 가담하면서, 이자성의 세력은 본격적인 반군으로 명나라를 대신할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1641년에 반란군의 향방이 바뀌게 되는데, 이자성은 화북지방으로 이동하여 낙양을 함락시키고, 황족인 복왕 '주상순'을 삶아 먹는 등 명나라 조정을 향했지만, 장헌충은 양양을 함락시키고, 양왕 '주익명'을 처형하는 등 호북지역을 장악하고 화남지역을 근거지로 하게 된다. 또 이때 '송산 전투'에서 홍승주가 청나라에 대패하면서, 명나라는 더 이상 청나라를 상대하면서 반란을 진압할 만한 여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듬해인 1642년에 이자성은 개봉을 함락시켰으며, 1643년에는 좌량옥을 격파하는 등 위세를 떨치며 스스로 '상양왕을 칭하였고, 장헌충은 무창을 함락시키고 대서왕이라고 칭하였다. 이후 1644년 이자성은 서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대순'을 건국하였으며, 장헌충은 사천지방을 장악하고 '대서황제'에 올라 둘 모두 황제를 칭하였다. 그러나 이자성은 여전히 명나라를 상대하려고 하였지만, 장헌충은 그대로 눌러앉아 자신의 기반을 닦는데 몰두하였다.

명나라의 멸망과 최후

이자성의 세력은 이미 100만을 넘어섰으며 병사들의 숫자만 50만에 달했는데, 그중 기마병의 숫자는 10만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보병들도 행군할때는 대부분 말을 탈 정도로 였으며, 하얀색의 모자와 짙은 남색의 외투를 군복으로 사용할 정도로 풍족했다고 한다. 서안을 점령한 이자성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향했고, 숭정제는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에게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도록 명했다. 당시 명나라는 상당히 절망적인 상태였는데, 오삼계가 산해관을 지키고 있는 동안 청나라에 대한 걱정을 크게 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대신 반란군에 대해 대비할 수 있는 전력이 없었다. 이 때문에 대소신료들이 북경을 포기하고 남경으로 천도할 것을 권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될 경우에는 오삼계와 산해관이 위험해 질 뿐만 아니라, 천도 도중의 안전을 장담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자성의 반란군이 오삼계의 지원군 보다 빠르게 북경에 당도하였는데, 이는 오삼계가 청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진군 속도를 조절한 것도 있지만, 북경까지 오는 길의 관문을 지키고 있던 명나라의 장수들이 이자성에게 항복해버려서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도착한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외성수비를 맡은 태감 '조화순'도 이자성에게 투항해 버렸고, 숭정제가 자결하면서 명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오삼계는 어쩔 수 없이 일단 산해관으로 되돌아갔는데, 이자성도 청나라의 위협에서 안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삼계에게 투항할 것을 권하였고, 이에 오삼계와 산해관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이자성의 대순에 투항할지, 만주족의 청나라에 투항할지를 놓고 논의를 하였다고 한다. 한편 북경에서는 이자성의 반란군들이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그들은 대신들과 부자들을 모아 놓고 고문을 하며 재산을 뺏었고, 이를 본 북경의 백성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이자성의 세력은 화기를 잘 다루고 군율이 엄격했다고 하는데, 이는 반란 초기에 전직 군관들이 많이 가담하였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들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북경에서 무자비한 약탈을 했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데, 당시 반란군에 대한 미화나 북경 약탈에 대해 과장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반란군이 북경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는 소식은 오삼계에게도 전해졌고, 여기에 더해 오삼계의 아버지도 이때 반란군에게 고문과 약탈을 당했다고 한다. 이자성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오삼계의 아버지를 풀어줬는데, 결국 오삼계는 이자성에게 항복하는 것을 포기하고, 청나라와 접촉을 시작하였다. 화가난 이자성은 오삼계의 아버지를 처형하고 대군을 이끌고 산해관으로 북진하였고, 선택지가 없어진 오삼계는 청나라에 협력하여 관문을 열고 청나라군을 받아들이게 된다. 반란군은 산해관에서 오삼계와 청나라군에 대패하였으며, 북경을 포기하고 후퇴하면서 벌인 여러 전투에서도 연이어 패배하면서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게 된다. 1645년 이자성은 호북지방까지 퇴각하였는데, 그는 구궁산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궁지에 몰려 자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지역의 자경단들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그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사실은 무사히 탈출하였으며, 호남성에 있는 절에 들어가 승려 행세를 하며 1674년까지 생존하였다는 것이다. 이자성은 그가 활약했던 시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그의 출신이나 행적이 국공내전 시절의 중국 공산단과 유사하기 때문에, 현대의 중국에서도 상당히 사랑받는 인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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