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남북조시대 동진의 서예가, 난정서를 쓴 서성 「왕희지」
- 역사
- 2023. 10. 15.
명문 낭야 왕씨 일족
'왕희지'(王羲之)는 중국의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될 즈음인 303년경에 '서진'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서주 낭야군 임기현을 근거로 하는 낭야 왕씨로 당대의 조정에서 큰 위세를 떨치고 있었고, 왕희지도 효자로 유명한 삼공을 지낸 '왕상'의 이복동생인 '왕람'의 증손자로 어렸을 때부터 매우 유복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윽고 서진이 멸망하고 이민족들이 화북지역을 장악하였을 때는 장강 이남으로 피난하였는데, 당시 강남에서 서진의 명맥을 이어가던 '동진'이 건국되는데 '왕도'나 '왕돈' 같은 낭야 왕씨들이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왕희지는 동진에서도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왕희지는 동진에서 순조롭게 벼슬길에 올랐는데, 당시에는 '상품에 한문없고, 하품에 세족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철저한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왕희지 자신의 실력도 있었겠지만 그 출신 성분만으로도 요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비서랑으로 시작하여 유량의 장사가 되었으며, 351년에는 우군장군에 회계내사의 자리에 이르렀고, 이 때문에 그를 왕우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때 왕희지는 은호의 최측근으로 그의 북벌을 지지하기도 하였고, 재상이었던 '사안'과 민간의 정치를 논하는 글을 쓰는 등 적극적으로 정치에 가담하여, 왕도나 왕돈 등이 그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후 개인적으로 '왕술'을 무시하고 괴롭히던 일 때문에 왕술이 그를 견제하기 시작하자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재산이나 지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왕희지는 회계 인근의 경치가 좋은 곳에 터를 잡고 은거하여 인근 귀족들과 청담이나 나누며 시간을 보냈고, 도교에도 관심을 가져 마약의 일종인 '채약'(오석산)을 즐기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서성 왕희지
왕희지는 특히 글씨로 유명한데, 처음에는 동진의 여류화가이자 서예가인 '위부인'에게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이후로는 한나라나 위나라의 비문을 보고 독학하였는데, 그는 '해서', '행서', '초서' 등의 서체를 완성하여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렸고,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서성'이라고 불리게 된다. 왕희지의 글씨는 당시에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살아있을 때에도 탐내는 이가 많았는데, 한 번은 그가 회계 거리를 거닐다가 부채 가게에 들어가서 갑자기 부채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자 왕희지를 몰랐던 부채 가게 노파가 부채 값으로 일문을 내라고 했는데, 왕희지가 그 소리를 듣고 이 부채를 문 앞에 걸로 놓으면 백문은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곤 그대로 나가버렸다. 노파가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하고 있었는데, 이내 어떤 사람이 와서는 진짜로 그 부채를 백문을 주고 사갔다. 그제야 노파는 그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게 되었지만, 다음날 그를 다시 만난 노파가 그에게 글을 한번 더 써달라고 졸랐지만, 왕희지는 그대로 지나쳐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왕희지는 회계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악의론', '십칠첩', '황정경', '상란첩', '공시중첩', '유목첩', '이모첩', '쾌설시청첩' 등이 있지만 그 원본이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그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인데, 그는 워낙 왕희지를 좋아해서 생전에 왕희지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수집하였고, 죽은 후에는 그 작품들을 말 그대로 무덤으로 들고 들어갔기 때문에, 친필 작품들이 많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일화도 있는데, 왕희지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난정서'의 경우는 7대 손자에게 전해졌는데, 그는 승려였기 때문에 자식이 없어 제자인 '변재'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이세민이 이 사실을 알고 변재에게 난정서를 얻으려고 하였으나 변재가 모르쇠로 일관하였기 때문에, 당시 감찰어사였던 '소익'을 보내 가져오게 하였다고 한다. 소익은 평범한 사람으로 변장을 하고 변재와 만났는데, 그는 몇 년간이나 변재와 바둑을 두며 방심을 시켰고, 난정서를 구경하는 척하다가 그 자리에 종이를 두고는 난정서를 들고 나와 이세민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세민은 난정서의 값으로 변재에게 쌀과 비단을 내렸는데, 변재는 억울하였지만 황제에게 따질 수도 없었고, 스승의 유품을 잃어버린 것에 속앓이를 하다가 1년 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왕희지의 작품은 승려가 황제를 속이고, 다시 황제가 승려를 속여 빼앗고 싶어질 정도로 매우 큰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희지의 안락한 삶
왕희지는 워낙 유력한 귀족 집안 출신이었던 데다가, 동진의 유력자 중 한 명이었던 '치감'의 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기 때문에, 관직이 없다고 하여도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오히려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동진의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에 휘말리지 않고 안온한 삶을 누릴 수 있었고, 슬하에 7남 1녀를 둘 정도로 가정에서도 별다른 불편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희지의 차남 '왕응지'는 '환온' 이후 동진의 실권자가 되는 '사안'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막내인 '왕헌지'는 아버지처럼 서예가로 이름을 날려, 왕희지와 왕헌지 부자를 통틀어서 '이왕', 또는 '희헌'이라고 칭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왕희지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부와 권력이 부족하지 않았으며, 거기에 더해 서예의 재능을 타고나 그 명성이 현대에 이를 정도였고, 정치에서 멀리 떨어져서 풍광 좋은 곳에서 안락한 삶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다 361년경에 사망하게 된다. 그의 삶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알 수는 없겠지만, 그는 그야말로 세상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