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호십육국시대부터 당나라까지 중원을 장악한 선비족 「관롱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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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이민족들의 중원 유입

현대의 중국은 매우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지만, 중국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원이라는 개념은 과거에는 훨씬 좁은 영역을 의미했으며, 그중에서도 중원의 중심 민족으로 다루어지는 '한족'의 경우는 황하 일대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더 좁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은나라와 주나라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남방의 이민족인 오나라와 월나라 등이 한족의 역사로 편입되었고,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한족화되어 역사적 구분이 희미해졌으며, 삼국시대 이후 서진이 멸망하는 시기에 다시 대대적으로 이민족들이 중원으로 유입되었는데, 이때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흉노', '선비', '저', '갈', '강' 등의 다섯 이민족이 위세를 떨쳤기 때문에 이 시기를 '오호십육국시대'라고 부른다. 이들 이민족들은 중원에서 흥망성쇠를 누렸지만 그중 선비족이 가장 득세하였고, 이후 중원은 선비족에 의해 통일되게 된다.

중원을 장악한 선비족

선비족은 본래 만주와 요동 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였는데, 한때 강성했던 흉노족에 의해 복속되어 중원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흉노족이 몰락하면서 자유롭게 중원을 정복하며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오호십육국 시대의 초기에 중원의 북부에는 선비족을 포함하여 여러 이민족들이 세운 국가라 난립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439년에 선비족 중 탁발씨가 세운 '북위'에 의해 모두 평정되었고, 이때부터 중원은 남북조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이 북위의 수도는 '평성'으로 선비족의 근거지답게 중원에서 상당히 북쪽에 치우쳐 있었는데, 이 때문에 북부 이민족으로부터 국경지대를 방어하기 위해 여섯 곳에 진을 설치하여 대비하였고, 그곳에는 선비족과 흉노족 출신의 유력 호족들을 보내 생활하게 하였다. 이 '회삭진', '무천진', '무명진', '유현진', '옥야진', '회황진'의 여섯 진을 통틀어 '육진'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서 생활하는 호족들은 국방을 담당하는 만큼 여러 특권을 인정받았으며, 자신들끼리만 혼인을 하는 등 그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선비족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한 육진의 무리들은 점차 한족화 정책을 실시하는 북위의 조정에 대해 불만이 쌓이게 되었는데, 특히 493년에 수도를 남쪽의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 때문에 496년에는 당시 황태자가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523년에는 본격적으로 '육진의 난'이 일어나면서 북위는 분열되어 몰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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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롱집단

'관롱집단'은 중원을 장악한 선비족의 문벌세족을 이르는 말로, 육진 중에서도 특히 무천진 출신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 중 첫 번째로 대표적인 인물이 '우문태'인데, 그는 육진의 난에 참가하였다가 북위에 항복하였으며, 이후 새로 관중지방을 근거지로 삼게 된다. 이 시기에 반란이 진압되면서 많은 육진 출신의 호족들이 한족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우문태를 중심으로 한 무천진의 호족들은 관중과 농서 지방으로 이주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관롱집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관서 대도독의 자리에 까지 오른 우문태는 승상 '고환'과 대립하면서 535년에 북위는 '서위'와 '동위'로 분열되게 되었고, 그의 아들 '우문각'이 556년에 선양의 형태로 나라를 넘겨받으면서 서위가 멸망하고 '북주'가 건국되게 된다. 그동안 관롱집단은 우문씨에게 협력하며 요직을 차지하는 등 명실상부 중원의 귀족집단으로 성장하였고, 관롱집단 출신의 수국공 '양견'은 581년에 북주의 '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하였으며, 589년에는 남조인 한족의 '남진'을 정복하면서 중원을 통일하여 남북조시대를 끝내게 된다. 결과적으로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는 얼마못가 멸망하게 되지만, 그 뒤를 이어 당나라를 세운 것도 관롱집단 출신의 당국공 '이연'으로, 그는 당시 황제인 수양제의 이종사촌 뻘이 된다.

관롱집단의 몰락

관롱집단은 혼인을 통해 혈연관계를 맺어 결속력을 다지는 등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강고한 세력화되었지만, 그 때문에 황실과 대립하게 될 수밖에 없었는데, 수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된 대규모 토목 사업 등도 관롱집단 때문에 진행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관롱집단의 전횡은 당나라에서도 계속되었지만, '고종'과 '측천무후'에 의해 적극적인 견제 정책이 시행되었고, 이때부터 관롱집단의 와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관롱집단은 당나라 말기까지 계속 세력을 유지하였지만, 황실과 조정의 견제책과 과거제의 적극 시행 등으로 서서히 힘을 상실하기 시작하였고, '황소의 난' 이후 당나라가 몰락하면서 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정치집단의 몰락에 불과한 것으로 선비족 출신의 귀족세력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고, 그 구심점이 사라졌을 뿐 선비족 출신의 귀족들은 계속 한족과 동화되어 중원의 지방 호족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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