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시대 사실상 당나라를 건국한 황제 「이세민」
- 역사
- 2023. 10. 12.
수나라의 멸망
'이세민'(李世民)은 598년경에 태어났는데, 당시는 중국 수나라시대로 한참 수나라가 중원 장악을 마무리해 가는 시기였다. 이세민은 당국공 '이연'의 둘째 아들인데, 그 가문은 '북주' 팔주국에 속하는 굉장한 명문가 출신으로, 수나라의 두 번째 황제인 '수양제'가 이연과는 이종사촌이 된다. 이러한 대단한 가문에서 태어난 이세민도 어렸을 적부터 부유한 생활을 하며 충분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따로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어 확인할 수 없으며, 그가 남긴 말이나 이룩한 업적에 비추어 보았을 때 학문적인 부분보다는 활동적인 부분에 더 관심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616년에 이연이 태원유수로 임명되어 태원에 있는 진양궁을 관리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 수나라는 수양제의 폭정으로 인해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에 진양궁의 부감으로 이연의 친구인 '배적'과 진양현령인 '유문정'이 그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고, 이때 이세민도 가담하여 반란에 부정적이었던 아버지 이연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였다고 한다. 또는 이연 스스로가 진양궁에 부임할 때부터 반란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어느 쪽이 진실이건 간에 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 즈음하여 수나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수나라는 몰락하게 된다. 수양제는 수도인 장안을 버리고 '강도'로 피신하였는데, 이를 알게 된 이연은 617년에 30,000명의 군사를 모두 이끌고, 태원을 떠나 장안을 목표로 진군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연의 세력은 수많은 반란 세력 중에 하나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당시 상당히 강력한 세력이었던 '이밀'의 눈치를 살피기도 하였지만, 장안으로 향하는 동안 유민들이나 군소 세력들이 합류하여 최종적으로 200,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또 이미 수양제가 정예병을 모두 이끌고 떠났기 때문에, 사실상 빈 성이나 다름없었던 장안을 어려움 없이 접수할 수 있었다. 이연은 수양제의 손자를 새 황제로 세워 '공제'로 삼았으며, 자신은 당왕을 칭하며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마침 이듬해인 618년에 수양제가 측근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아예 공제로부터 정식으로 선양을 받아 당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되었다.
중원 통일
당나라가 건국되면서 사실상 수나라는 멸망하였지만, 아직 중원 각지에는 혼란을 틈타 궐기한 세력들과 수나라의 잔당 세력들이 남아있었다. 그중 천수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설거'가 지리적 위치상 가장 먼저 당나라와 맞붙게 되었는데, 그는 스스로 서진패왕이라고 자처하며, 먼저 아들 '설인고'를 보내 당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설인고는 이세민이 이끄는 군대에게 격파되었고, 이에 본인이 직접 기병을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마침 이세민이 병에 걸려 대신 '은개산'이 군대를 이끌었지만 설거에게 대패하여 궁지에 몰렸으며, 근거지인 장안까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나라는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큰 위험에 처했지만, 설거가 갑자기 급사하면서 위기를 넘기게 된다. 설거의 세력을 이어받은 설인고는 다시 당나라를 공격하였지만, 이세민은 방어전을 펼치며 후방의 적 보급선을 교란하였고, 적의 기세가 꺾이자 나아가 항복시켰다. 이때 설거에게 패배한 것은 사실 이세민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고대의 역사서가 일반적으로 서술자의 의지에 따라 작성되었던 것과 달리, 이 시기의 역사서들은 국가가 주도하여 편찬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당나라의 역사서들은 황실의 입장 위주로 왜곡된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이세민도 자신이 진 전투의 경우 역사서에 기록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설거와의 전투도 사실 병으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패배하여 기록에서 뺏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그다음으로는 산서 일대에서 세력을 일으킨 '유무주'가 당나라의 적이 되었는데, 그는 돌궐의 후원을 받으며 산서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이연이 세력을 일으킨 태원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배적과 유문정 사이에 분란이 일어났는데, 공은 유문정이 많이 세웠지만, 이연은 자신의 친구인 배적을 편애하였다. 그런데 사소한 오해로 인하여 유문정이 반역죄로 처벌되었고, 이세민도 그를 두둔하다가 이연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 619년 결국 이연은 배적을 보내 유무주를 막게 하였는데, 배적은 대패하여 산서 지역을 빼앗기게 되었고, 이후 하동으로 퇴각하여 견제하려고 하였는데 유무주에게 내응 하여 일으킨 반란도 진압하지 못해 하동 지역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이세민이 다시 나섰는데, 그는 하동 지역마저 포기하려는 이연에게 30,000명의 병사들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호언장담 하였고, 결국 이연도 이세민에게 기회를 줄 수밖에 없었다. 이세민은 설인고를 상대했을 때처럼 유무주의 대군과의 결전을 피하면서 집요하게 보급로를 교란하였고, 장장 6개월 간에 걸쳐 시달린 적이 퇴각을 시작하자 맹렬하게 몰아붙여 패퇴시켰다. 이세민은 하동 지역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산서 지역을 되찾고, 계속해서 유무주의 세력을 완전히 박살 내어 유무주는 돌궐로 도망치게 된다.
천책상장
이 시기 중원의 군웅들 중에는 이밀이나 '왕세충' 같은 이들이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는데, 당나라에게는 다행히도 그들은 낙양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사이 당나라는 성장하여 큰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이밀은 왕세충과의 싸움에서 몰락하였으며, 620년 당나라는 싸움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왕세충을 노리고 낙양으로 쳐들어갔다. 이세민은 성공적으로 왕세충을 낙양성에 고립시켰는데, 뜻밖에 하북에 세력을 이루고 있던 '두건덕'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두건덕은 한때 이밀의 수하를 자처했을 정도로 왕세충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지만, 그는 왕세충이 멸망하며 그다음 차례는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대군을 이끌고 구원에 나선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태의 변화에 당나라 군대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졌는데, 이세민은 침착하게 군대를 둘로 나누어 동생 '이원길'에게 낙양성을 계속 포위하도록 한 후에 자신은 무뢰관으로 들어가 두건덕을 견제하였다. 당나라의 군대는 사실상 절반으로 줄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세민은 특기인 방어전으로 일관하였고, 그렇게 1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두건덕의 진영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긴 시간 동안 전투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두건덕의 군대는 기강이 해이해지는 등 기세가 꺾였으며, 이세민이 그 틈을 노리고 공세로 전환하면서 두건덕의 군대는 괴멸되었고, 두건덕 본인도 포로로 잡히게 된다. 이세민은 두건덕을 끌고 낙양성으로 돌아갔는데, 그 모습을 본 왕세충도 결국 성을 버리고 항복하게 된다. 이처럼 이세민은 당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는 데 있어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큰 공을 세웠고, 이연은 그에게 '천책상장'이라는 대단한 칭호를 내렸지만, 그의 형 '이건성'이 이미 황태자로 책봉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지 그뿐이었다.
현무문의 변
당나라가 장악한 중원은 차츰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하였지만, 당나라 황실은 반대로 혼란이 심해지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장남이자 황태자인 이건성과 차남이지만 당나라 건국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이세민의 후계자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건성과 이세민은 여러 인재들을 포섭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면서 세력 다툼을 시작하였는데, 이세민은 실질적인 군공과 함께 그동안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얻은 인재들이 있었지만, 이건성은 또 다른 동생인 이원길을 자기편으로 삼았고, 결정적으로 황제인 이연이 이건성의 편을 들었다. 명분은 이건성이 쥐고 있었지만 실력은 이세민이 있었던 것인데, 이세민은 그 명분을 뒤집을 수 있을 정도로 큰 공을 세웠고, 이에 이건성과 그의 세력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위 '양문간 사건'이 방생하였는데, 반란을 일으킨 양문간의 배후에 이건성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연은 이 일로 한때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기도 하였지만, 이내 이것을 없던 일로 해버렸다. 이것은 이건성에게는 자신이 한번 더 실각하면 당연하게도 경쟁자인 이세민이 실권을 갖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반면에 이세민에게는 이건성이 무슨 짓을 하던 이연이 자신에게 권력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한다는 인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막상 일은 이건성 쪽에서 먼저 일으켰는데, 626년에 돌궐족이 당나라를 공격하자 이원길을 지휘관으로 하는 토벌대를 결성하였고, 이건성 측에서는 이를 이용해 이세민의 측근 장수들을 불러들여 전쟁터에서 숙청할 계획을 짠 것이다. 이에 실질적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낀 이세민의 장수들이 먼저 나서 이세민을 설득하였고, 이세민이 결단을 하면서 '현무문의 변'이 일어나게 된다. 이세민은 먼저 이연을 만나 이건성과 이원길이 후궁들을 강제로 희롱한다며 고발하였는데, 여기서 이세민은 자신의 목숨을 언급하면서 다른 뜻이 있음을 나타내었다. 일의 심각성을 느낀 이연은 이건성과 이원길을 궁으로 불러들였고, 이건성과 이원길은 불길함을 느끼면서도 만전을 기했음을 생각하며 이에 따랐다고 한다. 이건성과 이원길은 새벽에 궁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이 현무문을 지날 때 이세민과 수하들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화살을 쏘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을 모두 죽인 후에 궁으로 들어가 이연에게 보고하였다. 이세민의 수하 '울지경덕'은 갑옷을 입고 싸움을 벌인 그 상태로 그대로 이연을 알연하였는데, 이건성과 이원길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하였다고 고하였지만, 이연도 내막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연은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아 모든 병권을 넘겨주었고, 2개월 후에는 퇴위하여 황제의 자리까지 넘겨주게 된다.
정관의 치
이세민은 형과 동생을 죽이고 그 가족들까지 모두 학살했지만, 부하들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후계자 분쟁으로 인한 국내 혼란을 최소화하고 인재들을 확보하려고 한 것 같다. 이세민은 이건성의 부하였던 '위징' 등도 등용하여 적극적으로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그중 가장 첫 번째는 이연이 명한 승려와 도사들을 환속시키는 정책을 취소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본래 세금 회피를 막거나 사이비 등 종교적 폐단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지만, 이세민이 민심을 얻기 위해 중지한 것이다. 또 계급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신하들이 상소를 통해 정책 건의를 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 또한 관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대신 수많은 상소로 인해 어마어마한 양의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3,000명이나 되는 궁녀들을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해방해 주었는데, 이 또한 자신의 인기를 올리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처럼 이세민이 행한 정책은 자신과 황실의 인기를 위한 제도들이 많이 있었지만, 빈민을 구휼하기 위한 의창 제도나 사형 집행을 줄이기 위한 5부주, 3부주 등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난세에 고통받던 백성들을 위한 정책이기도 했다. 이렇게 이세민이 이끈 태평성대를 '정관의 치'라고 하는데, 이를 이끈 위징을 대표로 하는 대신들이 이세민을 업무적으로 몰아붙여 상당히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세민이 업무로 받은 많은 스트레스들은 아내 '문덕황후'가 많이 풀어주었는데, 그녀는 궁궐 내를 덕으로 관리하여 궁중 암투를 효과적으로 줄였으며, 지혜로운 조언과 행동으로 이세민을 내조하였다. 문덕황후는 636에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이세민은 크게 슬퍼하여 오랫동안 그녀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외적으로도 승승장구하였는데, 이세민이 정권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돌궐의 '힐리가한'이 장안 근처까지 침범할 정도로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3년 후인 629년 '이정'이 힐리가한을 굴복시키며 당나라는 몽골 고원을 제압하였고, 이듬해인 630년에 일대의 유목민들은 이세민을 세계의 패자라는 뜻으로 '천가한'(텡그리카간)이라고 추대하기도 하였다. 또 640년에는 '소정방'이 '고창국'을 멸망시키면서, 당나라는 북쪽과 서쪽의 이민족들을 평정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티베트 고원에 자리 잡은 '토욕혼'을 격파하거나, 641년에는 티베트 지역으로 공주를 시집보내는 등 강경책과 회유책을 통해 중원의 안정을 꾀하였다.
고구려 원정과 죽음
이세민은 중원을 제압하고 대제국을 건설하였지만, 고구려로 눈을 돌리면서 몰락하게 된다. 당시 많은 신하들이 수양제의 예를 들며 고구려 정벌에 반대하였지만, 이세민은 '연개소문'이 권력을 찬탈한 것 등을 들어 정벌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이는 명분적으로는 상당히 빈약한 것이었지만, 이세민은 당나라의 황제로서 사실 이민족인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명분은 국내적인 문제에 불과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645년에 시작된 이 원정은 완전히 실패하였는데, 당나라 군대는 초기에 요동성과 개모성 등 요동의 일부 지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후 신성, 건안성, 안시성 등의 공략에 실패하면서 원정을 포기하게 된다. 고구려 원정에서 패배한 부분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기록에서 누락된 것으로 보여 자세히 알기 어려운데, 이세민이 안시성 싸움에서 화살에 맞아서 애꾸눈이 되었다던가, 퇴각하는 도중에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급하게 우물에 숨었다가 거미줄 덕분에 살아났다던가 하는 등의 이야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의 진위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당나라군이 고구려에게 확실히 대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당나라 황제가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사건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그 피해 규모가 상당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세민은 포기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647년과 648년에 장수들을 보내어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세민은 고구려 원정 실패로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원정에서 실패한 후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수명을 늘리기 위해 단약에 의존하다가 649년에 수은 중독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세민은 죽으면서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와는 반대로 죽기 직전까지도 재차 고구려 원정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후계를 이어받은 고종 '이치'는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 661년에 다시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연개소문에게 패배하였고,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인 667년 고구려의 후계자 분쟁을 이용하여 공격하여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이세민은 실질적으로 당나라를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인 유능한 인물이지만, 말년에 고구려 원정에 집착해 당나라의 국력을 소진시켰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