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의 푸른 보석 「인도네시아 공화국」
- 역사
- 2022. 12. 18.
현재의 인도네시아와 지리적 특징
인도네시아는 현재 공식적으로 인구 약 2억 3700만 명(2010년 조사), 비 공식적으로 2억 6700만(추정)을 가진 거대 국가(인구 세계 4위)로 수도는 '자바'섬 있는 '자카르타'이다. 인도네시아는 크고 작은 17,000개가 넘는 섬으로 구성된 국가로, 특히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술라웨시', '뉴기니'의 5개의 큰 섬이 주요 섬으로 국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기후는 열대성으로 구분되며, 기온은 연중 거의 비슷하지만 계절에 따라 강우량이 크게 변화하며 우기와 건기로 나뉜다. 5월부터 10월 정도까지가 건기, 11월부터 4월 정도까지가 우기가 되어, 적도에 가깝기 때문에 '스콜'이라고 불리는 집중 호우가 자주 일어난다. 종교적은 무슬림이 많아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가 되고 있지만, 다른 이슬람계 국가와 달리 국교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종교의 자유가 헌법으로 인정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음에도 무종교는 인정되지 않으며, 신분증에 종교를 표시하도록 되어있다.
선사 시대
우선 '자바 원인'이 있다. 1891년에 '외젠 뒤부아'라는 네덜란드인 군의관이 자바 섬에서 발견한 원인으로, 정식 명칭은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로, 약 180만 년 전에 생활했다고 생각되며 뇌의 용적은 약 900㏄정도(현생 인류 1500cc)이다.
자바섬을 중심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생활하고 있던 흔적이 있어, 기원전 2500년부터 기원전 1500경에는 이미 벼농사를 실시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민족적으로는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나 말레이계의 민족이 이주해 살고 있던 것 같고, 현재까지 계속되는 다민족 구성은 기원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게 타당할 것 같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인도의 상인이 자주 교역으로 방문하게 되어 5세기경부터 '쿠타이 왕국'(보르네오 섬), '타루마 왕국'(자바 섬)이 번영하기 시작해 강력한 왕조가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스리위자야 왕국
인도네시아가 세계사에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스리위자야 왕국'이 탄생한 이후 일 것이다. 성립연대는 650년경으로 알려져 1377년에 '마자파힛 제국'에 멸망될 때까지 장기간 자바섬과 수마트라섬, 말레이시아 등의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스리위자야야 왕국 번영의 비밀은 말라카 해협을 영향권 안에 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말라카 해협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이 땅을 억제하는 것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현대에 싱가폴이 번영하고 있는 것도 이 지리적 요인과 무관하지 않다. 스리위자야 왕국의 유적으로는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불교 사원인 「보로부두르」 유적이 있다. 현재의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국가이지만, 당시에는 불교의 영향이 매우 강해, 7세기에는 당나라의 스님인 '의정'이 방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의정이 당나라로 귀국한 후에 '남해기귀내법전'을 저술하였는데 스리위자야 왕국을 포함하여 인도 및 남방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내용이 있다. 스리위자야 왕국의 역사기록은 주로 중국 문헌에 남아있는 것으로, 당이나 송에 조공을 하고 있던 기록이 남아 있는데, 남송의 시대에 이르러 조공 관계는 없어진 것 같다. 자바 섬에는 그 밖에도 '케디리'라고 불리는 왕국이 있었던 것 같고, 10세기 후반부터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섬에 침공을 시작한 기록이 남아 있다. 또, 1025년에는 인도계 왕조인 '촐라 제국'의 '라젠드라 촐라'에 의한 대규모 침공이 있어, 스리위자야 왕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1275년에는 케디리 왕국을 타도하고 흥성한 '싱하사리 왕국'이 한때 자바 섬의 영토를 모두 지배했지만, 그 후에는 쇠퇴하여, 1377년에는 마자파힛 제국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어 버리게 된다.
마자파힛 제국과 믈라카 술탄국
스리위자야 왕국을 대신하여 인도네시아의 패권을 붙잡은 것이 마자파힛 제국과 '믈라카 술탄국' 이다. 마자파힛 제국은,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싱하사리 왕국의 뒤를 이은 형태로 성립된 나라로, 당시 동남아 국가들을 침략하면서 자바섬까지 상륙한 '원나라'의 군대와 손을 잡고 세력을 확대시켰다. 마자파힛 제국은 14세기 후반에 최성기를 맞아 한때는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섬, 자바 섬의 서부, 보르네오 섬의 해안부 등 광대한 영지를 지배하기도 했다. 명나라의 '정화의 함대'도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이 시기의 '류큐 왕국'과도 교역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덧붙여 마자파힛 제국은 힌두교의 국가이었지만,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지배적인 국가가 믈라카 술탄국입니다. 이 왕조는 스리위자야 왕국의 후예인 '파라메스와라'가 말레이 반도에 일으킨 나라로, 건국은 1402년이라고 하며, 1405년에는 중국의 명 왕조에 조공한 기록이 남아 있다. 건국에는 믈라카 근처에 있던 이슬람 상인의 뒷받침이 있었다고도 알려져 있으며, 믈라카 술탄국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슬람 국가이다. 망국의 왕자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소설이나 만화에 나올 것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믈라카 술탄국은 명칭대로 말라카 해협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역으로 발전한 나라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인도 상인과 이슬람 상인이 자주 방문하고 있으며, 후에는 포르투갈과의 교류도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이슬람 상인이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믈라카 술탄국을 공격하고, 수개월의 공방전을 벌인 뒤 결국 1511년 믈라카 술탄국은 멸망하게 된다. 한편 마자파힛 제국도 자바 섬 동부에 있던 '마타람 왕국'의 공격을 받아 1520년에 멸망해 버린다. 덧붙이자면 1267년부터 수마트라 섬 북부에 있던 '파사이 술탄국'도 1521년 포르투갈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1345년 파사이 술탄국에는 역사가 '이븐 바투타'가 방문한 적이 있어 동남아시아 최초의 이슬람 국가로 알려져 있다.
아체 술탄국과 포르투갈, 그리고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
믈라카 술탄국과 마자파힛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수마트라 섬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국가 아체 술탄국 등이 세력을 늘려고 있었다. 아체 술탄국은 '오스만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쉴레이만 대제'에게 사절을 파견하는 등의 행동을 했지만, 포르투갈 세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결국 1569년 오스만 제국의 보호국으로 편입되면서 아체 술탄국은 멸망하는 1903년까지 존재는 하고 있었지만, 중앙집권적인 국가라는 것보다 여러 제후의 집합체 같은 느낌으로 끊임없이 내부 갈등에 시달리게 된다. 포르투갈은 1543년 일본의 사쓰마 번의 '다네가섬'에 도착할 정도로 아시아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을 정도로, 이 시기의 동양의 바다의 패자는 포르투갈이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을 등에 업은 아체 술탄국과의 기나긴 분쟁과 그 외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그 패권을 네덜란드에 넘겨주게 된다. 1602년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하자마자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잡았고, 1609년에는 동인도 총독부를 설치했다. 그 후 1619년, 현재의 자카르타 지역에 총독정청을 설치하면서 '바타비아'라고 명명하고, 포르투갈 상인을 배척하는 정책을 실시해 동양무역에서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 덧붙여서 당시에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한 자바 섬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반튼 술탄국'이었지만, 네덜란드의 무력에는 저항하지 않았으며, 1752년 이후 네덜란드의 보호국이 되어 사실상의 지배하에 있었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지배가 결정적이 된 것이 1623년 '암보니아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서 영국 세력을 쫓아낸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말루쿠 제도의 암보이나 섬에 있던 영국 길드 사무소의 인원을 네덜란드 측이 습격하여 모두 죽인 꽤 처참한 사건인데, 이로써 영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철수하고 인도의 식민지를 추진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1660년대에는 술라웨시 섬에 있던 '고와 왕국'을 지배하에 두고, 18세기가 되면 자바섬의 패권을 걸고 벌인 3번에 걸친 '자바 전쟁'에 승리, 1740년에 '화교 학살 사건'의 일으키고 그 여파로 인한 전쟁으로 마타람 왕국을 압박하는 등의 여러 사건을 일으키며 인도네시아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19세기에 들어서자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네덜란드는 프랑스령이 되거나 영국의 지배를 받는 거나 하면서 시대의 물결에 쓸려가게 되지만, 인도네시아서의 지배는 흔들리지 않았다. 덧붙이자면 19세기 후반이 되면 유전의 개발에 성공해, 현재의 '로얄 더치 쉘'사의 전신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국제연맹의 발족 등도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지배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후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지배가 흔들린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 이후이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에는 네덜란드 본국이 나치 독일에 일찍 항복, 인도네시아는 일본 제국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 후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하자 1945년 8월 17일 인토네시아는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다시 인도네시아를 식민지화하려고 했고, 인도네시아 측으로부터의 반발을 받아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이 시작된다. 4년에 걸친 오랫동안 계속된 독립 전쟁이지만,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계속되는 독립 의지와 미국으로부터 원조받고 있던 '마셜 플랜'을 중지하겠다는 압박에 결국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1949년 말에 네덜란드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이 수립된다. 초대 대통령은 독립 영웅 '수카르노'가 취임하고 이후 현재의 '조코 위도도' 대통령까지 7명의 대통령에 의해 통치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