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이자 지중해의 유명한 해적 「흐르즈 레이스」
- 역사
- 2023. 10. 13.
에게 해의 선원
'흐르즈 레이스'는 1478년경에 오스만 제국령인 에게 해의 레스보스 섬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은 본래 제노바의 '가틸루시오 왕조'의 소유였지만, 1462년 오스만 제국이 레스보스 정복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슬람의 영토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야쿠프 아아'는 오스만 제국의 '시파히'로 투르크계나 알바니아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레스보스 정복 전쟁에서 공을 세워 섬 내의 보노바 마을을 영지로 하사 받았고, 레스보스 섬의 가장 큰 항구도시인 '미틸리니'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후 야쿠프 아아는 에게 해를 바탕으로 해상 운송업 중심의 사업을 영위하는데, 흐르즈를 포함한 그의 아들들도 그와 함께 배를 타면서 선상 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었고, 성장하여서는 선원 생활을 하며 항해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야쿠프 아아가 사망한 이후에도 형제들은 가업을 계속 이어나갔는데, 그즈음부터 무역이나 해상 운송뿐만 아니라 사략 활동도 시작한 것 같다. 당시에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의 충돌이 빈발하고 있었는데, 결국 형제들 중 '오루츠 레이스'와 '일랴스 레이스'가 로도스섬을 장악하고 있던 '구호기사단'에게 공격받았고, 일랴스가 전사하고 오루츠는 포로로 잡히게 된다. 이때 흐르즈는 오루츠를 구하기 위해 몸값을 마련해 구호기사단과 접촉하였으나 실패하였고, 3년 뒤 오루츠는 우여곡절 끝에 탈출에 성공하였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해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 시기 오루츠는 이집트를 근거지로 하여 동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적활동을 전개하였는데, 흐즈르는 별도로 해상 운송업을 계속한 것 같고, 1503년 오루츠가 근거지를 튀지니 동부의 제르바 섬으로 옮긴 후부터 흐즈르도 여기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대해적 바바 오루츠의 동생
흐즈르와 오루츠 형제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튀니지를 중심으로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세력들을 약탈하면서 해적으로서 명성을 쌓았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부족한 해군력을 메꾸기 위해 해적들을 후원하여 전략적으로 이용하였는데, 흐즈르 형제들도 이와 관련된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과정에서 지중해의 여러 이슬람 해적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이들은 1502년 소형 겔리선을 가지고 교황청 소속의 대형 겔리선을 나포하거나, 1506년에 스페인 해군 함선을 나포하여 500여 명의 병사들을 포로로 잡는 등 널리 이름을 알렸고, 1512년에는 스페인이 장악한 알제리의 '베자이아' 항구 요새를 공격하였는데, 도중에 오루츠가 부상을 입어 점령에는 실패하였지만, 인근 해적들과 영주들 사이에서 크게 위세를 떨쳤다. 1516년에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자 알제의 지배자 '살림'이 흐즈르와 오루츠의 세력을 끌어들여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 하였는데, 흐즈르 형제는 아예 살림과 그 가족들을 죽이고 알제를 장악하였고, 유일한 생존자인 살림의 아들이 스페인의 영역인 '오랑'으로 도망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이듬해인 1517년에 출발한 스페인 함대가 도중에 폭풍을 만나면서 손쉽게 격퇴되었다. 또 이 해에는 알제리 내륙에 있는 '틀렘센'의 '자얀 왕조'에서 후계자 분쟁이 일어났는데, 지원 요청을 받은 오루츠는 군대를 끌고 가서 틀렘센을 점령해 버렸다. 그러자 인근 도시인 오랑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군이 위협을 느끼고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1518년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1세'(카를 5세)는 이를 받아들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오루츠는 틀렘센에서 농성하며 6개월 간이나 버텼지만 숫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알제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포위되어 전사하게 된다. 본래 오루츠는 이베리아 반도를 탈출하는 유대인이나 무슬림들을 여러 차례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수송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존경을 받아 '바바 오루츠'라고 불리었는데, 기독교 세력들 사이에서 이 호칭이 와전되어 '바르바로사'라고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었다. 오루츠가 죽자 바르바로사라는 호칭과 그의 세력은 모두 알제에 있었던 흐즈르가 이어받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흐즈르가 바르바로사로서 명성을 날리게 된다.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
알제에 남아있던 흐즈르는 목숨은 구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스페인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 그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황제였던 '셀림 1세'에게 알제를 바치고 신하가 되었고, 이를 받아들인 셀림 1세는 1519년에 흐즈르를 그대로 알제의 총독으로 삼았으며, 알제를 지키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때 흐즈르는 셀림 1세에게 '하이레딘'이라는 이름도 같이 하사 받았는데, 이후 그는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로 불리게 된다. 정식으로 오스만 제국의 신하가 된 흐즈르는 이후 주변 세력들과 우호를 다지며 알제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였고, 항구를 개방하여 본격적으로 해적들의 활동을 지원하면서, 알제는 당시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카를로스 1세는 다시 함대를 보내 알제를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이번에도 태풍을 만나 원정에 실패하였으며, 내부에서 반란과 전쟁이 계속되면서 해적 소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지게 되었고, 흐즈르는 그 틈을 타고 세력을 크게 키우게 된다. 1529년 흐즈르는 알제 연안에 있는 스페인의 페논 섬 요새를 공격하여 완전히 파괴하였고, 덕분에 인근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었던 해적들은 서 지중해에서 활개를 칠 수 있었다. 1533년에는 '쉴레이만 1세'가 흐즈르를 '콘스탄티니예'로 소환하였는데, 그는 흐즈르를 오스만 제국의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후 제국의 해군 정비를 명령하였다. 이로서 흐즈르는 일개 선원에서 해적을 거쳐 당대 세계 최대 제국의 해군 총사령관까지 출세하게 된 것이다. 흐즈르는 수개월만에 60여 척의 갤리선을 건조하는 등 오스만 해군의 초석을 다졌으며, 후배들을 키우는데도 진력하여 그의 사후에 활약한 해적들 중에는 흐즈르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기조는 현대까지도 이어지는데, 오늘날에도 튀르키예에서는 흐즈르를 해군의 아버지로 존경하며,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 항상 그의 묘에 참배를 한다고 한다. 흐즈르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북아프리카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추가로 40척의 갤리선을 하사 받기도 하였고, 1534년에 알제로 귀환하면서 그 배들을 이용하여 이탈리아 해안을 약탈하였다고 한다.
프레베자 해전
이 시기 튀니스의 '하프스 왕조'에서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는데, 그중 '하산'이라는 인물이 왕위에 올랐으나, 그 과정에서 친족을 40여 명이나 살해하는 등 큰 혼란이 있었고, 이에 그에게 반대하는 자들이 흐즈르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흐즈르는 오스만 제국의 아프리카 총독으로서 대군을 이끌고 튀니스로 향했는데, 하산은 이미 도주하였으며 이전의 흐즈르가 했던 것처럼 카를로스 1세에게 튀니스를 바치겠다며 스페인을 끌어들였다. 카를로스 1세는 이참에 인근의 지중해 해적들을 뿌리 뽑을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그는 교황 '바오로 3세'와 협의하여 독일과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이 참여하는 대규모 원정대를 꾸려 튀니스를 향했다. 1535년에 출발한 이 원정대는 함선이 400여 척에 40,000여 명의 병사들이 동원된 엄청난 규모로, 함대의 지휘는 제노바 출신의 해국 제독 '안드레아 도리아'가 맡았으며, 카를로스 1세도 직접 참전하여 군대를 지휘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흐즈르는 직접 지휘하며 방어를 준비하였지만, 엄청난 물량공세에 시달리다 3개월 만에 튀니스를 내어주고 알제로 퇴각하게 된다. 이때 그는 알제에 남아있던 30여 척의 겔리선을 이용하여 스페인에 반격하였는데,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해진 메노르카 섬을 약탈하여 6천여 명의 주민을 노예로 잡아갔다고 한다. 튀니스를 점령한 기독교 연합군도 3일에 걸쳐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이때 튀니스 시민의 1/3은 살해되었으며, 1/3은 노예가 되어 끌려갔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는데, 이 해 말에 밀라노의 공작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가 밀라노를 차지하기 위해 암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게 된다. 이듬해인 1536년 프랑스는 북쪽에서 오스만 제국은 남쪽에서 이탈리아를 공격하였는데, 전쟁 자체는 별 성과 없이 1538년에 바오로 3세의 중재로 종결되었으나, 기독교 세력은 흐즈르의 습격과 약탈로 큰 피해를 입은 사실을 구실로 '신성 동맹'을 맺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였다. 신성 동맹은 연합 함대를 결성하여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였는데, 그리스 서해안의 케팔로니아 섬 인근에서 벌어진 '프레베자 해전'에서 흐즈르는 122척의 함선으로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200여 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격파하였고, 이후 오스만 제국은 1571년에 '레판토 해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30년 넘게 사실상 지중해를 완전히 제압하게 된다. 1540년 결국 베네치아가 견디지 못하고 단독으로 오스만 제국과 협상을 맺으면서 신성 동맹은 해체되어 버렸고, 카를로스 1세는 흐즈르를 회유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부왕으로 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하였다. 1541년 분노한 카를로스 1세는 다시 한번 알제로 원정을 시도하였지만, 이번에도 함대가 폭풍우를 만나면서 원정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대해적의 마지막
흐즈르는 1543년에 동맹인 프랑스와 연합하여 '니스'를 공격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프랑스에게 '툴롱' 항구를 제공받아 그곳을 거점으로 스페인-나폴리 함대를 격파하여 '티레니아 해'를 장악하고 이탈리아 해안을 습격하였다. 흐즈르는 남프랑스를 공격하던 스페인 함대를 격퇴하는 등 활약하였지만 전쟁 자체는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였고, 쉴레이만 1세와 카를로스 1세가 협상하면서 콘스탄티니예로 귀환하게 된다. 이때 흐즈르는 귀환하면서도 이탈리아 해안 도시들을 위협하며 배상금을 받아냈는데, 도중에 제노바의 함대와 만났지만 대적하지 못하고 도주하였다고 한다. 1545년 흐즈르는 다시 출항하여 스페인의 항구들과 섬들을 습격하기도 하였지만 금방 다시 콘스탄티니예로 귀환하였고, 아들 '하산 파샤'에게 알제 총독자리를 넘겨준 후 은퇴하였다. 은퇴한 흐즈르는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에 궁전을 세우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으며, 이듬해인 1546년에 평온하게 사망하게 된다. 흐즈르는 죽기 전에 미리 자신의 무덤을 준비해 두었는데, 그의 대리석 영묘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이 세웠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엄청난 인파가 참석했다고 한다. 해적은 흔히 단순한 악당으로 생각되기 쉬우나, 당시의 해적들은 과거의 해적이나 그 이후의 해적들과는 조금 성격이 다른데,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해적들도 있었지만, 특정 국가에 소속되어 있거나 지원을 받는 해적들도 있었으며, 아예 국가로부터 사략 허가를 받아 해적질을 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해적과 영국의 해적을 들 수 있는데, 흐즈르도 오스만 제국의 해적으로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권력을 누릴 수 있었으며, 은퇴 후에도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부와 명예를 누려, 역사상의 해적 중에서도 손꼽히는 성공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