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을 흔든 여성, 여제라고 불린 「마흐페이케르 쾨셈 술탄」
- 역사
- 2023. 6. 28.
하세키 술탄
'마흐페이케르 쾨셈 술탄'은 1590년경 그리스의 티노스 섬에서 그리스 정교회 사제의 딸로 태어났는데, 본명은 '아나스타샤'였다고 한다. 1604년경 해적들에 의해 납치되어 노예로 팔렸고, 당시 보스니아의 총독에 의해 콘스탄티니예로 보내져, 술탄이었던 '아흐메트 1세'의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마흐페이케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가, 이후 '쾨셈'으로 개명하였다. 아흐메트 1세의 총애를 얻은 쾨셈 술탄은 금방 '하세키 술탄'으로 하렘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는데, 이전의 하세키 술탄이었던 '사피예 술탄'은 아흐메트 1세가 즉위하면서 사실상 유폐되었고, 아흐메트 1세의 어머니인 '한단 술탄'은 즉위 이듬해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쾨셈 술탄의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인물은 유력한 후계자인 '오스만 2세'를 낳은 '마흐피루스 하티제 술탄' 정도 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흐메트 1세는 전대 술탄들과 다르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통치를 하였고, 이 시기에 술탄의 형제들을 살해하도록 한 법도 폐지되었기 때문에, 하렘에서의 경쟁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또 기록에 따르면 쾨셈 술탄과 오스만 2세는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첫번째 통치
1617년 아흐메트 1세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다음 술탄으로 동생인 '무스타파 1세'가 즉위하였기 때문에, 아흐메트 1세의 애첩이었던 쾨셈 술탄은 관습에 따라 별궁으로 거쳐를 옮겨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무스타파 1세는 '카페스'에서 생활하면서 정신이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이듬해인 1618년 퇴위되었고, 오스만 2세가 다음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2세는 즉위한지 4년만에 예니체리들에 의해 암살되었고, 이에 1622년에 다시 무스타파 1세가 복위하였다. 하지만 다시 1623년 1년만에 무스타파 1세는 다시 폐위되었고, 쾨셈 술탄의 아들인 '무라트 4세'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쾨셈 술탄은 황제의 어머니인 '발리데 술탄'의 신분이 되어 황궁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무라트 4세는 아직 11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쾨셈 술탄은 섭정의 신분으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실권을 쥘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은 내외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내부적으로는 아나톨리아 북쪽 지역에서 계속해서 폭동이 일어났고, 외부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숙적인 '페르시아'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침략하여 영토를 빼앗겼다. 1632년까지 쾨셈 술탄은 약 9년에 걸쳐 섭정을 하면서, 재상을 8번이나 교체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하였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었고, 1631년에는 예니체리들이 폭동을 일으켜 궁전으로 쳐들어와서, 재상과 관료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결국 무라트 4세는 1632년 자신이 20세가 된 것을 내세워 어머니 쾨셈 술탄을 뒤로 밀어내고, 오스만 제국을 직접 통치할 것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쾨셈 술탄은 정치적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관료들의 회의자리에 참석하곤 했다고 한다.
두번째 통치
1640년 무라트 4세는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되찾아왔으며, 아나톨리아 북부의 반란도 모조리 진압하였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병사하였다. 그가 직접 통치하는 동안 무라트 4세는 자신의 이복형제들을 하나씩 처형하였고, 카페스에는 친 동생인 '이브라힘'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무라트 4세는 유언으로 이브라힘도 처형하도록 명령하였지만, 이브라힘이 처형될 경우 술탄의 피가 끊기게 되기 때문에, 쾨셈 술탄과 관료들에 의해 이 명령은 무시되었다고 한다. 결국 오스만 제국의 다음 술탄으로 이브라힘이 즉위하였지만, 그도 오랫동안 카페스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무스타파 1세처럼 정신이 온전치 못하였다. 이브라힘은 신경질적이고 의심이 많았으며, 늘 두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쾨셈 술탄은 이러한 이브라힘을 하렘에 집어넣어, 끊길뻔한 술탄의 피를 계속 잇는데 집중하도록 해 놓고, 다시 제국의 실권을 잡고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재상인 '케만케쉬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무라트 4세의 통치시기에 임명된 재상으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쾨셈 술탄은 그에게 불만은 품은 관료들을 포섭하여, 1644년 음모를 통해 죄를 뒤집어 씌워서 처형하였고, 자신을 따르는 자를 후임 재상으로 앉히고,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2인자였지만, 실질적인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곧 이브라힘의 기행과 폭정으로 인해 여러 불만이 생겨났고, 1647년 여러 재상과 관료들을 중심으로 쾨셈 술탄의 재가를 얻어 이브라힘을 폐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러한 음모가 들어나면서 주모자들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고, 이브라힘은 어머니인 쾨셈 술탄도 궁전에서 쫒아내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혼란스러운 국내상황이 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듬해인 1648년 예니체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폭동으로 이브라힘은 폐위되었고, 이후 살해당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반란은 사실 쾨셈 술탄의 허가를 받은 행위였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쾨셈 술탄은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아들인 이브라힘을 처분하고, 손자를 내세워 계속 권력을 잡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또는 쾨셈 술탄이 이브라힘을 폐위하고 처형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했지만, 당시 오스만 제국의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라고도 한다.
세번째 통치 시도와 최후
메흐메트 4세는 아버지 이브라힘이 폐위된 후에 고작 6살의 어린 나이에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결국 어린 술탄을 보좌하여 대신 제국을 통치할 섭정이 필요했는데, 쾨셈 술탄은 자신이 계속해서 권력을 장악할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또 다른 경쟁자가 나타났다. 메흐메트 4세의 어머니인 '투르한 하티제 술탄'은 당시 22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권력을 쾨셈 술탄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고, 곧 두 사람은 충돌하게 된다. 쾨셈 술탄은 하티제 술탄을 하렘에 가두어 놓고 일선에서 배제하려고 하였지만, 하티제 술탄의 반발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쾨셈 술탄은 메흐메트 4세를 폐위하고, 말 잘듣는 손자를 새로운 술탄으로 내세우려는 계획은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하티제 술탄은 쾨셈 술탄에게 불만을 가진 관료들을 이끌고 메흐메트 4세에게가 반역 음모를 고발하였고, 병사들을 이끌고 쾨셈 술탄의 처소로 쳐들어가서 그녀를 살해하였다. 결국 3대에 걸쳐 오스만 제국의 정치에 관여해왔던 쾨셈 술탄은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오스만 제국의 실권은 하티제 술탄의 손에 넘어가는 듯 하였다. 그러나 젊은 하티제 술탄은 정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고령이지만 유능하고 청렴한 것으로 알려진 '쾨프륄리 메흐메트 파샤'를 대재상으로 임명하여 막강한 권한을 넘겨주었고, 결과적으로 술탄의 애첩들이 정치에 관여하던 '여자 술탄 시대'(Kadınlar Saltanatı)가 막을 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