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열아홉번째 군주 「메흐메트 4세」
- 역사
- 2023. 6. 25.
고부간의 권력 쟁탈
'메흐메트 4세'는 1642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이브라힘'과 아내 '투르한 하티제 술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브라힘은 술탄으로 즉위하기 전에 오랫동안 '카페스'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정신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메흐메트 4세가 갓난아이였을때 하렘에 출입하는 유모의 돌봄을 받았는데, 이브라힘은 자신의 아이인 메흐메트 4세보다 유모의 아이를 더 귀여워했다고 한다. 어느날 하티제 술탄이 이를 보고 이브라힘에게 불만을 표시하자, 화가난 이브라힘은 메흐메트 4세를 들어다가 연못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메흐메트 4세는 하인들의 빠른 구출 덕에 목숨을 건졌지만, 일설에 의하면 메흐메트 4세의 이마에 있는 상처가 이때 생겼다고 한다. 이처럼 이브라힘의 정신적 문제로 인해 일어나는 돌출된 행동은 문제시 되었고, 당시 오스만 제국의 혼란한 상황과 맞물려, 결국 1648년 예니체리들과 일부 관료들에 의해 일어난 반란으로 폐위되었고, 당시 6세의 나이였던 메흐메트 4세가 술탄으로 즉위하게 된다. 이 당시 권력을 쥐고 실권을 흔들던 사람은 사실 이브라힘의 어머니인 '마흐페이케르 쾨셈 술탄'이었다. 그래서 이브라힘을 폐위하고 메흐메트 4세를 술탄으로 만든 것은 쾨셈 술탄의 의도였다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쾨셈 술탄은 이미 오래전부터 실직절인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아직 누군가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어린 메흐메트 4세를 앞세워 계속 섭정 역할을 하려고 하였는데, 이에 반반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메흐메트 4세의 어머니인 하티제 술탄이었다. 사실 당시 하티제 술탄은 쾨셈 술탄의 행동들을 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가 술탄이 된 이상 이제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퀘셈 술탄이 계속해서 전면에 나서자 두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이에 쾨셈 술탄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하티제 술탄을 하렘에 가두어버리기도 하였다. 정면에서 쾨셈 술탄을 상대할 수 없었던 하티제 술탄은 쾨셈 술탄과 사이가 좋지 않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모아 대항하려고 하였는데, 쾨셈 술탄도 이러한 하티제 술탄의 움직임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결국 쾨셈 술탄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메흐메트 4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에게 고분고분한 것으로 생각되는 '살리하 딜라슙 술탄'의 아들인 '쉴레이만 2세'를 새 술탄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이러한 음모가 시녀를 통해 하티제 술탄에게 누설되었다. 하티제 술탄은 즉시 자신에게 동조하는 관료들과 내시들을 데리고 메흐메트 4세를 찾아갔고, 거기서 쾨셈 술탄을 반역죄로 처형할 것을 명령하는 명령서에 사인하도록 하였다. 1651년 예니체리 병사와 내시들로 구성된 400여명의 암살자들이 쾨셈 술탄의 처소로 침입하였고, 오스만 제국을 쥐고 흔들었던 쾨셈 술탄은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권력을 잡은 하티제 술탄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려고 하였던 것 같지만, 당시 오스만 제국의 혼란한 상황을 수습할 만한 능력이 되지 못했고, 결국 고령이었지만 청렴하고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에게 막대한 권한을 주고 대재상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운영하게 하였다. 이 시기의 오스만 제국을 소위 '쾨프륄뤼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 튀르크 전쟁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가 주도한 오스만 제국도 계속해서 서유럽과 충돌을 겪었다. 1663년부터 1년여에 걸쳐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는데, 전황은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지만, 오스만 제국의 동맹인 프랑스의 견제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유리한 형태로 평화협상을 맺을 수 있었다. 1669년에는 1645년부터 시작되어 장장 25년에 걸쳐 진행된 '베네치아 공화국'의 '칸디아 공방전'(크레타 공방전)이 막을 내렸는데, 크레타 섬은 오스만 제국이 차지하게 되었지만, 인근의 몇개의 작은 섬은 베네치아의 영토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 '달마티아' 지역에서 일어난 분쟁으로 베네치아가 차지한 영토도 베네치아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1672년부터는 '폴라드-리투아니아'와 전쟁을 치루었는데, 1676년까지 이어진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많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1676년부터는 약 5년에 걸쳐 '루스 차르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우크라이나 지역을 두고 전쟁을 벌였고, 이 전쟁은 결과적으로 무승부로 끝났는데, 이때 오스만 제국과 루스 차르국은 드네르프 강을 경계로 확정지었다. 이러한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오스트리아,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과 사이에서 계속되는 갈등은 결국 '제2차 빈 공방전'과 '대 튀르크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상기한 전쟁 중 일부는 대 튀르크 전쟁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서유럽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장악력이 떨어지면서, 함스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있던 헝가리 지역에서 '퇴쾨이 임레'가 반란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에게 종속되는 조건으로 지원을 요청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미 두번이나 빈 원정에서 고배를 마신적이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위신 문제와 호전적인 메흐메트 4세의 원정의지로 인해, 1683년 오스만 제국은 '카라 무스타파 파샤'를 지휘관으로 대군을 파견하였다. 오스만군은 지난 원정의 실패를 교훈삼아, 이번에는 빈을 완전히 포위하여 압박하는 공략 방식을 선택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패착이 되었다. 당시 빈은 약해진 합스부르크 가문의 장악력 만큼 이전보다 더 빈약한 방어 수준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저항의지 만큼은 충만했다. 그러나 이후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여 기독교를 수호한다는 명분하에 '신성 동맹'의 원군이 도착하면서, 전황은 오스만 제국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오스만군은 급히 적극적으로 성을 공략하기 시작하였고, 성벽 일부에 틈이 생기면서 빈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상태가 되었지만, 함락 직전에 폴란드의 구원병이 도착하면서 빈 공략에 집중하고 있던 오스만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이렇게 끝나지 않았는데, 오스만 제국이 본격적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자 유럽 각지에서 지원군이 몰려들었으며, 루스 차르국까지 전쟁에 참가하였다. 다만 프랑스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프랑스는 다들 오스만군을 추격하는 동안 비어있는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는 등 오스만 제국의 동맹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자신이 이익을 실속있게 챙겼다. 1684년부터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전역에서 신성 동맹의 공격을 받았다. 오스만 제국은 선전하였지만 1686년에 부더를 상실하였으며, 1687년에는 에게르를 잃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베네치아는 1685년부터 그리스 일대를 집중 공략하였는데, 오스만 제국은 결국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빼앗겨, '모레아' 일대를 넘겨주게 되었다. 그러나 폴란드 지역에서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내부 분열로 인해 오히려 오스만군이 압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숨 돌릴 틈이 없었는데 20년간의 평화를 약속했던 루스 차르국도 조약을 깨고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모하치 전투와 강제 폐위
1687년 '제2차 모하치 전투'가 벌어졌지만, 오스만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이 전투로 오스만 제국은 완전히 헝가리를 상실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메흐메트 4세는 이 책임을 지는 형태로 폐위되었고, 동생인 쉴레이만 2세가 다음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대 튀르크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을 맺어 종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다만 메흐메트 4세는 폐위후 바로 시해 된 것은 아니고, 1693년까지 살다가 5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