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6대 황제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 역사
- 2023. 4. 27.
로마의 전통 귀족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기원전 3년에 태어났다. 갈바의 가문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로마 명문 귀족으로 상당히 부유한 집안 이었다고 한다. 그의 가문에는 집정관이나 독재관을 지낸 인물도 있었고, 원로원 의원을 지낸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또 갈바의 증조부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서 갈리아 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코린토스'를 함락시킨 영웅 '루키우스 뭄미우스 아카이쿠스'의 증손녀였고, 이러한 이유로 갈바는 본인이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갈바의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일찍 사망하였는데, 아버지는 갈바이 가문보다 도 명문이었던 리비우스 가문의 '리비아 오켈리나'와 재혼하였고, 이때 갈바는 '루키우스 리비우스 오켈라 술피키우스 갈바'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이런 가문의 힘과 재력이 뒷받침 했을 뿐만 아니라, 갈바 본인이 항상 예의를 갖추고 행동하였기 때문에, 예의바르고 교양이 풍부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 때문에 여러 황실가족들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갈바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황제 때부터 시작하여 로마의 전통적인 '쿠르수스 호노룸'에 따라 명예로운 공직들을 거치면 정치적 경력을 쌓았는데, 20년에 23살의 나이로 법무관이 되었으며, 33년에는 집정관이 되었고, 39년에는 '칼리굴라'에 이해 라인강 방면 군단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45년에는 아프리카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한때 은퇴하기도 하였으나 61년에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의 총독이 되었다. 그러던 중 '네로'의 집권기였던 68년에 '갈리아' 지역을 시작으로 네로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났는데, 갈리아 지역의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에 의해 반란의 중심인물로 갈바가 추대되었다. 이때 갈바는 이미 60이 넘은 고령이었으나,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여 황제를 자칭하였으며, 여러 속주의 총독들에게 서한을 보내 지지를 얻어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빈덱스는 네로가 보낸 로마 군단에게 패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반란을 진압한 군단 또한 네로에게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싸움을 거부하였다. 갈바는 '히스파니아 루시타니아'의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와 함께 히스파니아 지역 전역을 장악하고, 원로원과 근위대를 회유하여 네로를 정치적으로 공격하였다. 결국 원로원은 갈바의 요청에 따라 네로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였고, 근위대 또한 네로를 배신하자, 네로는 도주하였다가 공포심에 잠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후 원로원에 의해 갈바는 정식으로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포되었다.
기대를 져버린 황제 갈바
갈바는 로마 제국에서 최초로 '아우구스투스'나 '카이사르 가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첫번째 황제이다. 그는 로마 명문 귀족의 후손이자 상당한 부자였기 때문에, 원로원이나 로마 시민들은 갈바에게 상당한 기대를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갈바는 그러한 기대를 져버렸는데, 그의 그런 모습은 젊었을적 그가 보여준 행동과도 차이가 났다. 갈바는 정식으로 황제로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복귀하는데 3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였다. 복귀한 후에도 반란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사람들을 홀대하고 네로 밑에서 일했던 근위대장들을 계속 기용하려고 하였다. 갈바는 자신의 경쟁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빈덱스를 진압한 로마 군단 지휘관이었던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를 해임하고 로마로 소환하였는데, 이는 루푸스를 지지하던 군단 병사들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였다. 또 네로가 하사한 선물을 돈으로 환산하여 반환하도록 하였으며, 근위대에게 약속한 보너스의 지급도 거부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로마 제국의 재정을 생각해서 한 일 일수도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사방에 적을 만드는 행위가 되었다. 로마서에는 갈바의 측근들이 국고의 재물을 훔쳐갔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네 명의 황제의 해
결국 이듬해인 69년 라인강 방면의 로마 군단에 이해 '아울루스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갈바는 이러한 상황에서 네로에게 추방되었던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리키니아누스'를 양자로 삼겠다고 선포하였는데, 혼란한 상황에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후손이자 명문 귀족을 후계자로 선포함으로서 원로원을 안심시키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젊은 피소 리키니아누스는 오랜 망명 생활로 인하여 아무런 정치적 기반도 없었고, 오히려 이러한 결정은 갈바를 돕고 있었던 살비우스 오토가 이반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란의 주모자격에 한사람이었던 살비우스 오토는 갈바에게 냉대를 당하자 몰래 근위대에 접근해서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갈바는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로마에서 도주하려고 하였는데, 도중에 반란에 가담한 근위대의 손에 잡혀 살해되었다. 후계자로 지명하였던 피소 리키니아누스도 이때 같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살비우스 오토는 갈바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였지만, 이미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비텔리우스를 상대해야 했다. 또 이후에 황제로 추대되는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까지 합하여, 도합 네명의 황제가 즉위했던 이 해를 네명의 황제의 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