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7대 황제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 역사
- 2023. 4. 28.
황가와 가까운 집안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는 32년에 에트루리아 남부 지역에서 태어났다. 살비우스 오토는 에트루리아계로 원래 귀족이 아닌 평민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집정관에 취임하였으며,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살비우스 오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둘 다 어렸을 적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황비인 '리비아 드루실라'의 집에서 생활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황가의 지원을 받은 것 같다. 살비우스 오토의 아버지도 이러한 지원을 계속 받은 것 같은데, 속주 총독이나 군단 지휘관 등을 요직을 역임하면서 역대 황제들에게 충성을 바쳤으며, 황제들과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워서 귀족의 지위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살비우스 오토도 어렸을때부터 '네로'와 자주 교류하였고, 네로가 황제로 즉위한 이후에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살비우스 오토는 유력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호화롭고 방탄한 생활을 즐겼기 때문에 로마에서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배경과 이미지는 한번에 정반대로 바뀌게 되는데, 네로가 살비우스 오토의 아내였던 '포파이아 사비나'와 사랑에 빠지면서 였다. 네로는 포파이아 사비나를 정식으로 맞이하기 위해 살비우스 오토에게 이혼을 종용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네로는 아예 오토를 '히스파니아 루시타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로마에서 쫒아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살비우스 오토와 황가와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져버렸고, 살비우스 오토는 10년에 걸쳐 성공적으로 속주를 통치하였기 때문에, 그 소문이 로마에까지 퍼져서 과거의 악평도 불식시킬 정도가 되었다.
황제 네로에 대한 반란
68년에 로마에서 네로에 대한 불만이 한계에 다다르자 '갈리아' 지역의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는 네로에 대해 반감을 가진 세력을 규합하고,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의 총독이었던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 대해 살비우스 오토 뿐만 아니라 여러 속주의 총독들이 지지를 표명하며 가담하였다고 한다. 이후 반란을 시작한 빈덱스는 네로가 보낸 군단에 패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반란을 진압한 군단 또한 네로에 대한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네로의 명령을 거부하기로 하였다. 이 틈을타 갈바와 살비우스 오토는 원로원과 근위대를 회유하여, 네로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고 근위대를 이용해 숙청하도록 하였다. 결국 네로는 근위대를 피해 도주하였다가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3개월 후 갈바는 로마로 귀환하여 원로원에서 정식으로 황제로 승인되었다. 이로서 살비우스 오토는 네로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성공한 셈이었지만, 마음속에는 그 이상의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새로 황제가 된 갈바는 70이 다된 고령으로 자식들도 모두 사망하였기 때문에 후계자가 없었으며, 반란의 주모자인 빈덱스도 제거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갈바 다음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황제가 된 갈바는 여러 실정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살비우스 오토가 아니라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리키니아누스'라는 30세의 청년을 양자로 들여 사실상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69년 결국 오토는 근위대를 회유하여 갈바와 피소 리키니아누스를 살해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연이은 황제 암살은 원로원의 지지를 받기 힘들었는데, 살비우스 오토는 이러한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기 위해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며 노력하였다.
네 명의 황제의 해
69년은 로마의 황제가 4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흔히 '네 명의 황제의 해'라고 불리운다. 그 첫번쨰가 바로 살비우스 오토에 의해 살해당한 갈바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살비우스 오토 본인이다. 그 다음으로 세번째는 이미 네로에 이어 갈바에게도 실망한 라인강 방면의 로마 군단이 지휘관이었던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있었는데, 살비우스 오토는 비텔리우스와 황제의 자리를 두고 다퉈야할 운명이었다. 라인강 방면에서 '게르만족'의 침략을 막고 있던 로마 군단은 사실상 로마의 최정예 군단으로 평가받는데, 살비우스 오토는 이러한 라인강 군단이 남하하기 시작하자, 인근의 다뉴브강 방면의 로마 군단들의 지지를 받아 이를 상대하기로 하였다. 또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라는 유능한 지휘관도 살비우스 오토에게 가세하였는데, 그는 근위대를 중심으로 한 임시 군단을 이끌고 초반에 비텔리우스의 라인강 군단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후퇴한 라인강 군단에 속속 후속부대가 합류하였고, 군단을 재편성한 후에 다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파울리누스는 다뉴브 강의 군단들이 합류할때까지 전투를 회피하고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살비우스 오토는 승리의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 정면에서 대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벌어진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살비우스 오토가 패배하였고, 그는 황제가 된지 3달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국 로마 황제로 인정받은 비텔리우스 였지만 로마의 내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 해에 한명의 황제가 더 등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