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50대 황제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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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

전문 군인 집안 출신 황제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1세)는 347년에 '히스파니아' 지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大 테오도시우스)로 유능한 로마 군단의 지휘관으로 368년에 '브리타니아' 지역에서 일어난 이민족이 침략을 방어하기도 하였는데, 이때부터 테오도시우스 1세도 로마 군단에 입대하여 아버지 밑에서 복무한 것으로 보인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군생활을 계속하여 374년에는 '모에시아'에서 로마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다뉴브 강 너머의 '고트족'이나 '반달족' 등을 상대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아버지가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이에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거기서 히스파니아 여자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378년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발렌스' 황제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대패하여 전사하면서, 공동황제였던 '플라비우스 그라티아누스'가 은퇴하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를 다시 불러들여서, 발칸 반도지역에서 날뛰는 고트족을 상대하게 하였다. 이듬해인 379년에 그라티아누스는 아예 테오도시우스 1세를 공동황제로 선포하고 로마 제국이 동방을 맡아서 관리하게 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먼저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 로마 군단을 이끌고 진압하였고, 381년에 고트족의 대왕 '아타나리크'와 평화협정을 맺어 '트라키아' 지역으로 고트족이 이주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로서 로마로 이주한 고트족이 핍박받아 일어난 반란은 거의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로마에 큰 영향을 주었다. 먼저 많은 고트족 출신의 지휘관들이 로마 군단에 기용되었으며, 로마 군단의 병사로도 합류하였다. 383년에는 항상 로마 동방의 큰 위협이었던 '페르시아'의 '샤푸르 3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외세의 위협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브리타니아에서 '플라비우스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갈리아에서 그라티아누스가 전투에 패하고 살해 당하면서 내전의 위협이 커졌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일단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기로 하였는데, 대신 '플라비우스 발렌티니아누스'(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387년에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이탈리아로 침공을 시작하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테살로니카'로 도망쳐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의탁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마침 동고트족을 물리쳐 동방이 안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에게 군단을 주어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진압하게 하였다. 388년에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처형되었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다시 황제의 자리를 되찾았지만, 제국의 서방은 아르보가스트가 사실상 섭정으로서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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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

로마 제국은 이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집권 이후부터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황제 집권기를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기독교에 대한 우대 정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기본적인 내용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는 이단 종파에 대해 로마에서 기독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기반으로 한 정책은 로마의 동방과 서방에서 각각 다르게 진행되었는데, 서방을 통치하던 그라티아누스가 이단 종파를 포함한 이교 전체에 대한 박해 정책을 편데 반해, 동방에서는 많은 이민족의 이주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단 종파에 대한 박해를 중점적으로 시행하였다. 이러한 기독교 이외의 이교 배척정책으로 인해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진압할때 자신을 기독교의 수호자로 내세우며 종교적 목적을 내세웠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기독교를 박해하거나, 딱히 이교에 대해 매우 관대한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퍼포먼스 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이교에 대한 박해 정책은 계속되어, 389년에는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의 축일들을 휴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칙령을 발표하였고, 391년에는 제사를 금지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의 숭배 자체를 금지한 것이나 다름없는 내용이었다. 이에따라 기독교인 총독과 과격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여러 이교의 사원과 신전들이 파괴되었다. 이는 엄밀히 따지면 법 위반에 해당하는 행동이었지만,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를 처벌하지 않음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황제가 용인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파괴행위를 이어갔다. 392년에는 아예 법으로 이교의 숭배를 금지하였으며, 사원에 출입하는 자에게는 벌금을 물리거나 종교 재판에 회부하였다. 종교 자체는 있으나 숭배할 수 없게 함으로써 사실상 그 종교를 법적으로 금지한 것이다. 또 모든 점성술을 금지하였고, 특히 마니교에 대해서는 체포 즉시 재판에 회부하여 처형하도록 하였다. 또 이 해에 서방의 통치권력을 가지고 아르보가스트와 대립하고 있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하였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목을 메어 스스로 사망한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이 발표는 아르보가스트에 의한 것으로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아르보가스트가 암살한 것으로 생각했다. 여기에 서방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주교인 '암브로시오'가 장례식에서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사인이 자살이 아닌 것을 암시하는 묘사를 하면서 아르보가스트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어찌되었든 이로서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지만, 관례상, 그리고 통치의 편의를 위하여 새로운 황제가 선포될 것으로 기대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르보가스트도 그 중하나 였던 것 같다. 아르보가스트는 원래 테오도시우스 1세의 부하였으며, 또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총지휘관으로서 제국 서방을 사실상 섭정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기대하고 3개월의 공백을 두고 이를 기다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1세는 아무도 황제로 선포하지 않았고, 이에 아르보가스트는 마음대로 '에우게니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는 사실상 반역에 해당 할 수 있는 행동으로 아르보가스트는 철저히 테오도시우스 1세와 대립하기로 결정한 것 같은데, 서방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임명된 관료들을 숙청하였으며, 로마 다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원로원의 승리의 제단을 복원하는 등 이교의 신전들을 복원하고 축제를 후원하였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테오도시우스 1세와 대립하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인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려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394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러한 아르보가스트와 에우게니우스의 행동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진압하기로 하였는데, 단순히 정치권력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종교적 신앙의 문제가 포함되어있음을 인정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군단 뿐만 아니라 이미 로마화 되어있던 고트족 병사들도 이끌고 출정하였는데, 여기에는 서고트족 지도자인 '알라리크'와 반달족 출신의 로마 지휘관인 '스틸리코'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에우게니우스는 이 전투에서 생포되어 처형되었으며, 아르보가스트는 도주하였지만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를 방문하여 원로원 의원들을 소집한 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지 유피테르를 모실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다고 한다. 원로원 의원들은 협박에 굴하여 에둘러 황제의 뜻에 따르겠다고 대답하였다고 하는데, 이로서 로마 제국은 완전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황제의 죽음과 로마 제국의 분열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로서 다시 군림할 수 있게 되었지만, 원정에 의한 과로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는 '메디올라눔'(현재의 밀라노)에서 장남인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에게 제국의 동방을 통치하도록 하였고, 차남인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를 서방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결국 사망하였는데, 이때부터 로마 제국은 완전히 분열하여,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들들은 대표적인 암군으로 분류되며, 통치하는 동안 이민족의 위협 등으로 인해 로마 제국은 완전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반면에 로마 제국의 통치가 소홀해진 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중세 유럽 국가들의 기초가 되는 세력이 나타나게 된다. 로마 제국의 자영농민들도 거의 몰락하여 대농장의 농노화 되었으며, 이는 중세 시대 장원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시작한 로마 제국에서 로마는 이미 변두리로 밀려난지 오래 되었지만, 사실상 정통 로마 제국은 이 시기 멸망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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