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유령선 미스터리 「메리 셀레스트호 사건」
- 역사
- 2023. 1. 5.
유령선을 발견하다
1872년 12월 4일 대략 오후 1시, 영국 상선 '디 그라티아호'는 포르투갈 근처 북대서양에서 한 척의 배를 발견했다. 배는 좌우로 흔들리며 움직이고 있는 게 제대로 항해하고 있는 모습 같지는 않았지만, 선체에 눈에 띄는 상처도 없고 신호를 보내도 대답이 없이 단순히 표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라티아호의 선장은 '메리 셀레스트호'를 알고 있었고, 셀레스트호의 선장인 '브리그즈'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배에 가까워 접근하기로 했다. 그라티아호의 승무원들은 가까이 접근하여 세심하게 살펴보았지만 아무 징후도 발견할 수 없었고, 더 확실히 확인하기 위하여 승선해보기로 했다. 그라티아호의 일등항해사였던 '올리버 데보'는 몇몇 선원들과 셀레스트호에 승선하여 수색하였지만 승무원은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셀레스트 호의 테이블에는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으며 커피는 막 끓인 듯 아직 따뜻했다. 구명보트는 사용하지 않은 듯했고, 식료와 물도 풍부하게 남아있다. 결정적으로 소란이 있었던 흔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마치 승선하고 있던 승무원들만 갑자기 사라진 듯 보였다. 선장실에는 고장난 나침반이 놓여있었고 육분의와 선적증명서를 찾을 수 없었다. 항해 일지에서 이 배가 11월 7일 뉴욕에서 출항한 메리 셀레스트호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으나, 그 외에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선장실에는 선장의 일기가 남아있었는데, 가장 최근에 쓰인 듯한 페이지에는 12월 4일 날짜로 '아내 사라가'까지만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조사와 수색에도 불구하고 셀레스트호의 승무원을 누구 하나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메리 셀레스트 호의 전설이다.
메리 셀레스트호 사건
당시 메리 셀레스트호 사건은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켜서 수많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셀레스트호는 많은 선원들과 항구에 떠도는 소문의 유령선 그 자체였다.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꼬리를 물어 금방 변질되고 부풀려졌다. 사실 위에 이야기는 실제 조사된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 몇 가지 각색된 부분이 있다. 우선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부분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각색한 사람은 아마 방금 전까지도 있었던 승무원들이 갑자기 사라진 듯한 효과를 주려고 했던 것 같지만, 항해일지의 마지막 기록이 11월 25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날을 전후로 무언가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무인인 상태로 약 10일간 1,230Km 정도를 표류한 것으로 보인다. 배를 수색했던 선원들은 '배에 아무도 없으며, 배 전체가 완전히 젖어서 엉망인 상태'라고 보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배에 있던 유일한 구명보트도 없어졌었는데, 무언가의 이유로 구명보트를 이용해서 탈출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실제로 그러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밧줄 하나가 배에 아주 단단하게 묶여 있었는데, 한쪽은 바다에 내려져있었으며 상당히 해져있었다고 한다. 셀레스트호는 11월 7일 확실히 뉴욕에서 출발하여 제노바를 향해 항해하였으며, 약 2주간의 항해사이에 무언가 일어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셀레스트호의 화물실은 물이 1미터 정도 높이로 차 있었으며, 배수펌프가 3개 꺼내져 있었는데 그중 2개는 분해되어 있었다고 한다. 식량과 물은 6개월치 이상 남아있었으며, 벽시계와 나침반 등의 도구가 부서져 있었다고 한다. 3개의 난간에서 약간의 혈흔이 발견되었고 1개의 난간에는 긁힌 상처가 있었으며, 배의 적하였던 알코올을 담은 통 중에 9개가 비어있었다고 한다. 항해일지에 따르면 배를 타고 있던 것은 선장인 벤자민 브리그즈와 그의 아내, 그리고 두 살이 된 딸을 비롯하여 7명의 선원까지 총 10명이 승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라티아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처음에는 불길한 기분에 배를 버리려고 하였지만, 이내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 지브롤터로 예인 하기로 한다.
메리 셀레스트호의 진상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리 셀레스트호의 승무원들이 왜, 어디로 갔는지 무엇하나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당시 진행된 조사와 더불어 많은 호사가들을 통해서 몇가지 가설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착각에 의한 대피설
당시 셀레스트호의 적하였던 알코올이 9통이나 비어있던 것에서 착안한 내용으로 보인다. 선장 혹은 선원중 누군가가 알코올이 세고 있던 것을 발견하였거나, 혹은 통의 문제로 기화된 알코올이 작은 폭발을 일으켜서, 배가 폭발할 것을 두려워한 승무원들이 전원 구명보트를 이용하여 대피하였다는 것이다. 혹은 배와 구명보트를 밧줄로 묶은 채로 배에 거리를 두고 따라가려 하였으나 어떤 이유로 밧줄이 끊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해도구가 일부 부서져 있는 점이나 항해일지를 제외한 서류들은 챙겼으면서 항해일지만 배에 놔둔 점 등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남아있다.
선상반란설
선원들이 어떤 이유로 인하여 선장과 반목하였고, 선장과 그 가족들을 죽이고 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구명보트를 타고 도망쳤다는 설이다. 그러나 망망대해에서 구명보트를 타고 도망가는 것 보다는 큰 배를 탄 채로 도망치거나 자수하는 편이 더 살 가망성이 더 있었을 것이다.
천재지변 혹은 해적설
폭풍우를 만나 배에 물이차자 배수 펌프를 이용하여 물을 빼려고 시도하다가 섣불리 배를 포기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도 항해경험이 풍부했던 베테랑 선장이 그런 실수를 했을 거라고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해적의 습격을 받았을 거라는 설도 있지만, 만약 해적이라고 한다면 배에 싸움의 흔적이 없고, 적하물이나 식량이 남아 있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 외에도 난간에 긁힌 상처가 있었던 것을 가지고 선장의 딸이 돌고래 보는 것을 좋아하여 더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작은 난간을 이중으로 설치하였는데, 어떤 이유로 모든 승무원이 그곳에 올라갔다가 난간이 부러져 다 같이 바다에 떨어졌다거나 하는 황당무계한 설도 있다.
코난 도일과 메리 셀레스트호 사건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인 '셜록 홈즈'의 작가인 코난 도일은 이 시대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많은 작가들이 메리 셀레스트호 사건에서 자극을 받아 글을 쓴 것으로 보이는데, 가장 유명한 소설이 코난 도일이 쓴 '하버쿡 제프슨의 증언'으로, 당시 무명작가였던 코난 도일은 이 소설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코난 도일은 '콘힐 매거진'이라는 잡지에 익명으로 투고하였으며 테이블에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거나, 구명보트 등에 대한 각색이 여기서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그야말로 세계의 화두가 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포스다이크 문서
메리 셀레스트호가 발견된 지 40년 후, 아벨 포스다이크라는 인물의 문서가 발견되었다. 포스다이크는 친구인 브리그즈 선장에게 부탁하여 메리 셀레스트호를 타고 있었으며, 거기에서 본 것을 기록으로 남기었다고 한다. 이 문서에 따르면 포스다이크는 브릭그즈의 처자에게 부탁되어 뱃머리에 바다가 보이는 이중 갑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브리그즈는 어느 날 바다에서 옷을 입은 채로 수영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졌고, 브리그즈가 옷을 입은 채 바다에 뛰어자 몇몇 선원들도 그를 따라 바다에 뛰어들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작은 갑판에 올라와 내려다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선원 한 명이 상어에게 습격을 당했고, 남은 선원들이 무슨 일인지 보러 온 작은 갑판에 몰리면서 선장의 처자와 함께 모두 그대로 바다에 떨어졌다고 한다. 본인은 바다에 떨어졌을 때 부서진 갑판 파편 위에 있어서 상어를 피할 수 있었고, 유일한 생존자로 한동안 표류하다가 아프리카의 어느 해안에 도착했다는 이야기이다. 상당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10명이나 되는 승무원을 전원 먹을 수 있는 상어때가 나타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래 상어는 이미지와 달리 인간을 잘 공격하지 않는 다고 한다. 어느 해의 통계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상어에게 공격당했던 사람은 1년에 불과 3명이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애초에 다 같이 떨어졌다는 것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포스다이크의 이야기가 사실이었다고 해도 항해 용품이 파괴되고 있었던 것은 설명되지 않는다.
메리 셀레스트호의 결말
디 그라티아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한때 메리 셀레스트호의 선원들을 살해하고 우연으로 위장했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조사 결과는 불명으로 결론났다. 이렇게 원인 불명의 미제사건으로 결론 나면서 그라티아호의 선원들은 구조비 명목으로 5천 파운드의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선주에게 되돌아간 셀레스트호는 헐값에 처분되었고, 그 뒤로 13년간 선주가 무려 17번이나 바뀌면서 계속 운항하였다고 한다. 하나 그동안 많이 낡은 셀레스트호는 처분하기 어려워지자 보험사기에 이용되어서 도저히 수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1923년 자연적으로 침몰되도록 바다에 떠내려 보냈다고 한다. 과연 메리 셀레스트호가 자연적으로 침몰했을지, 아니면 이전처럼 계속 떠다니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