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43대 황제「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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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이인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는 로마의 속주였던 '판노니아'의 '다뉴브 강' 인근 지역에서 25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가난한 하층민으로 태어난 그는 출세를 위해 일찍부터 로마 군단에 입대하여 군생활을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군생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282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황제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프로부스는 군단 병사들의 폭동으로 인해 암살되었고, 원정은 계속되었으나 다음 황제인 '마르쿠스 누메리우스 카루스'는 도중에 벼락을 맞고 사망하였다. 이에 후계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우스 누메리아누스'는 원정을 멈추고 로마로 돌아가기로 하였는데, 284년에 로마로 돌아가던 중 자신의 장인이자 근위대장에게 암살당하였다. 이때 누메리아누스의 경호대장이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음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카루스의 또 다른 후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단독으로 로마의 황제가 되었고, 285년 막시미아누스를 부제(카이사르)로 임명하여 로마 제국을 동서로 양분하여 나누어 공동 통치하기로 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광대한 로마 제국의 영토를 반란이나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군사적 능력이 뛰어난 막시미아누스를 공동 통치자로 선택한 것 같은데, 막시미아누스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기도 하였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존경하면서 그가 결정하는데로 따라가는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로마 제국은 두명의 황제가 통치하는 상태에서도 상당히 안정적인 통치 구조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을 '요비우스'(유피테르)라고 칭하고, 막시미아누스를 '헤르쿨리우스'(헤라클레스)라고 칭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두 사람의 권력구도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등 제국의 서쪽을 담당하였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 이집트 등 제국 동방을 관리하였다. 하지만 막시미아누스는 주로 군사적인 부분을 맡았고, 실제 제국의 중요한 정책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혼자서 결정하였다. 부제가 된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였고, 도버 해협 인근의 갈리아 북부해안지역에서 활동하는 해적을 진압하기 위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발레리우스 카라우시우스'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대응하도록 하였다. 286년에 막시미아누스는 정제(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어 표면적으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동격이 되었다. 이 시기 카라우시우스는 해적들을 공격하여 대량의 해적선을 나포하는 등 공적을 세웠는데, 이 과정에서 카라우시우스가 일부러 해적들이 약탈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가, 약탈을 끝내고 돌아오는 해적들을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착복하고 있다는 소식이 막시미아누스에게 전해졌다. 이는 중범죄였기 때문에 막시미아누스는 카라우시우스를 처벌하려고 하였지만, 카라우시우스도 이 소식을 듣고 한발 먼저 함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로 도주해버렸다. 그러나 함대가 없었던 막시미아누스는 브리타니아로 건너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카라우시우스의 추격을 포기하였고, 카라우시우스는 브리타니아에서 세력을 모아 황제를 참칭하였다. 287년과 288년에 막시미아누스는 카라우시우스를 공격하기 위한 함대를 모으면서, 갈리아 지역에 침입한 '게르만족'과 싸웠다. 288년에는 북아프리카에서 유목민족이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는데, '마우레타니아'의 총독이 대응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을 할 수 없었다. 로마 제국의 영토를 동과 서로 나누어 두명의 황제가 관리하고 있음에도, 전부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289년에 함대를 모은 막시미아누스는 카라우시우스를 공격하기 위해 브리타니아로 쳐들어 갔는데, 도중에 폭풍을 만나 많은 함선이 침몰하였다고 한다. 혹은, 카라우시우스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고도 한다. 이에 막시미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카라우시우스와 평화협정을 맺고, 그의 황제 참칭과 브리타니아 지배를 묵인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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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 정치 체제

293년 막시미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두명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각각의 정제 밑에 다시 한명씩 부제를 두어 통치하기로 하였는데,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가 동방의 부제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통치하였고, 서방의 부제는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가 임명되었다. 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와 딸을 결혼시켰고, 막시미아누스도 콘스탄티우스와 딸을 결혼시켜, 각 통치자들끼리의 결속을 다졌다. 이로서 로마 제국을 4분할하여 4명의 황제가 통치하는 사두 정치 체제가 시작되게 되었다.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라인강 일대를 담당하여 관리하였고,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를 담당하였다. 콘스탄티우스는 292년부터 브리타니아 평정을 시작하여 296년에 다시 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되찾아왔다. 막시미아누스는 296년부터 북아프리카의 유목민족을 진압하였고, 298년에 그들의 근거지를 완전히 파괴하여 '카르타고'에서 승리를 선포하였다. 로마 제국에는 4명의 통치자가 공존하였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휘하에서 각 황제들 간의 위계와 질서가 어느 정도 잡혀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막시미아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전적으로 충성하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권위가 인정되고, 그것이 부제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형적인 권력구조는 구심점이 사라지자 승계구도가 흔들리게 되면서 붕괴하게 되었다.

사두 정치 체제의 붕괴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함께 황제 자리에서 은퇴하였다.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정제로 승격되었고, 다시 부제로 동방에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갈레리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서방에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취임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고향에 개인 황궁을 짓고 스스로 채소를 기르는 등 평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막시미아누스도 별장에서 은퇴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306년에 콘스탄티우스가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아들인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가 군단의 추대로 황제가 되어 자신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는 정제로하고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가 부제가 되는 것으로 승락하였는데, 이로인해 사두 정치 체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자극을 받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이자, 갈레리우스의 사위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황제가 되었다. 사실 막센티우스 입장에서는 로마 황제의 아들이자 사위인 입장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 정치 체제를 따르고자 새로운 부제들이 임명될때도 나름 얌전히 따르고 있었는데,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가 혈연을 이유로 황제를 참칭하고, 심지어 갈레리우스가 그것을 그냥 인정하여 사두 정치 체제의 근간을 사실상 뒤 흔듬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또 스스로 배제하고 있었던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막센티우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먼저 갈레리우스에게 자신도 황제로 인정해 줄것을 청했는데, 갈레리우스가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결국 한번 은퇴했던 막시미아누스도 다시 복위를 선언하고, 로마로 와서 아들 막센티우스를 도우면서, 다시 로마에서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서방 정제였던 세베루스는 이를 반란으로 받아들여 307년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향하였지만, 막시미아누스와 막센티우스에게 패배하였고, 붙잡힌 세베루스는 처형되었다. 갈레리우스도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였고, 막시미아누스는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를 찾아가 협상하여 딸을 결혼시켜 동맹을 맺었고, 막센티우스와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고,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를 칭하여 스스로 정제로 승격하였다.

최후

308년 이런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카르눈툼'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가 모여서 회의를 했다고 한다.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시 복귀하여 정리해줄 것을 원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거절하고 막시미아누스에게 은퇴하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죽은 세베루스를 대신할 새로운 서방 정제로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를 임명하였고, 막센티우스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막시미아누스는 막센티우스와의 불화로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의탁하고 있었다고도 하고, 막센티우스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한 것 때문에 불화가 생겨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의탁하러 갔다고 하기도 한다. 310년에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는 '프랑크족'의 침입에 맞서 군단을 이끌고 출정하였는데, 수비를 위해 막시미아누스에게 일부 병력을 맡겼다고 한다.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막시미아누스는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가 전사했다고 하면서, 병사들에게 자신에게 충성 할 것을 요구했지만, 군단 병사들은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충성하였기 때문에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러한 배신행위에 대한 소식을 들은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는 급히 군단을 이끌고 돌아왔고, 막시미아누스는 도주하였지만 붙잡혀 처형당하였다고 한다. 막시미아누스가 집권하는 동안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줬던데 반해서 정치적 재능이 부족한 것은 맞지만, 이러한 갑작스러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은 석연찮은 부분이 많이 있는데, 이는 역사가 승자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패자인 막시미아누스에 대해 안 좋은 내용으로 남겨졌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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