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43대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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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군인 황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

'디오클레스' 혹은 '디오클레스 발레리우스'는 244년 '달마티아'(현재의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하층민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그가 로마 군단에 입대한 내용이나 군경력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282년 로마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는 '페르시아'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는데, 디오클레스도 이 원정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정 도중 일어난 병사들의 폭동으로 프로부스는 암살되었고, 대신 '마르쿠스 누메리우스 카루스'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황제가 된 카루스는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원정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자신의 두 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우스 누메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선포하고, 카리누스는 로마 제국의 서쪽을 안정시키도록 보냈고, 누메리아누스는 자신과 함께 원정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원정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지만, 283년 카루스는 막사에서 쉬는 중에 벼락을 맞고 사망하였다. 이에 후계자인 누메리아누스가 황제로 취임하였으나, 불길한 징조로 병사들이 불안해하였기 때문에 원정을 그만두고 로마로 복귀하기로 하였다. 이때 디오클레스는 누메리아누스의 경호대장이었다고 한다. 284년 누메리아누스와 원정대는 로마로 돌아가기 위해 '아나톨리아' 지역을 지나고 있었는데, '비티니아'에 도착했어도 누메리아누스가 마차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경호대장이었던 디오클레스가 마차 문을 열어 칼에 찔려 암살된 누메리아누스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행군중 황제의 마차에 접근 할 수 있었던 것은 근위대장이자, 누메리아누스의 장인이었던 '아리우스 아페르' 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군단의 지휘관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였는데, 그들은 누메리아누스의 형이자 공동통치자인 카리누스를 지지하거나, 유력한 암살 용의자인 아페르를 지지하지 않고, 황제 암살 사건과 무관한 디오클레스를 차기 황제로 추대하였다고 한다. 디오클레스는 자신이 누메리아누스의 암살과 무관함을 선언하고, 유력한 용의자였던 아페르를 암살범으로 처형하였다. 이러한 내용대로라면 상당히 뜬금없는 방식으로 운 좋게 황제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누메리우스의 암살범이 누구인지, 정말로 디오클레스가 암살과 무관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카리누스는 디오클레스를 반역자로 선포하고, 로마에서 군단을 이끌고 나섰다고 한다. 두 군단은 '모에시아' 지방에서 충돌하였는데, 전투 초기에는 카리누스의 군단이 우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곧 카리누스가 사망하였는데, 카리누스에게 원한이 있던 병사에게 암살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카리누스가 인망이 없었기 때문에 군단 병사들에게 배신당했다고도 한다. 어찌되었든 이로서 전투는 흐지부지되어버렸고, 디오클레스는 로마의 단독황제가 되어 이름도 로마식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사두 정치 체제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지휘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를 부제(카이사르)로 임명하여 자신을 돕게하였고, 이듬해에는 아예 정제(아우구스투스)로 임명하여 로마 제국의 서쪽을 담당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다뉴브 강' 방위선을 정비하고, 페르시아와 외교협상을 벌이는 등 동방의 외적을 견제하였고, 시리아와 이집트 지역의 도적을 퇴치하는 등 제국 동쪽을 맡아 안정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동안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거나, 북아프리카와 갈리아 일대의 도적과 해적들을 퇴치하였다. 293년에는 이른바 '사두 정치 체제'를 시작하였는데, 각각 서방과 동방의 정제에 더하여 부제를 한명씩 더 두어 총 4명의 황제가 분담하여 통치하도록 하였다. 동방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아나톨리아에서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까지 동방의 주요지점을 담당하였고, 동방 부제로 임명된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는 '판노니아'와 '모이시아', '트라키아' 등 그리스 북부지역을 관리하면서 이민족을 견제하였다. 서방 정제는 막시미아누스로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담당하였고, 서방 부제로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가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를 관리하였다. 기존에도 공동 통치 체계는 있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작한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는데, 먼저 넓은 로마 제국의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4명이 통치자를 두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공동 통치가 권력의 승계구도를 확립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 였다면, 이것은 체계적으로 관리 영역을 나누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정한 임기를 두었고, 각 정제와 부제들이 서로의 자리를 보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권력의 승계구도의 안정도 도모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속주를 개편하였는데, 먼저 속주들을 100여개 이상으로 분할하여 속주 총독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였다. 이는 황제들이 지역을 직접 관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속주 총독의 역할이 필요없어진 것도 있으나, 동시에 반란의 중심이었던 총독들의 권한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으로 후계자를 지정하는데 근위대나 군단이 함부로 개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4명의 황제의 권한은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을 '세니오르'라고 지칭하면서 차별화하였고, 로마 제국의 가장 중요한 결정은 혼자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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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정(Dominatus)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렇게 4명이 통치자를 중심으로하여 체계적인 관료제를 구축하였고, 원로원의 입법기능을 완전히 박탈하고, 황제 휘하의 관료들이 이를 보좌하여 황제 칙령으로서 선포하였다. 이로서 사실상 원로원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이러한 대대적인 개혁 사업을 뒷받침하고, 기존의 로마 제국의 혼란기 동안 계속된 재정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화폐개혁도 실시하였으나,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또 세제계혁을 실시하여 효율적인 세수확보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또 각 군단을 평시에는 세세하게 나누어 국경에 분산시켜놓았는데, 이는 기존의 로마의 필요에 의해 전쟁을 수행하여, 이민족의 침략에 대한 압력을 줄여놓는 능동적인 방어에서, 국경에 군단을 치밀하게 상시 주둔시켜 적의 침략에 대비하는 수동적인 방어 전략으로 방침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또 군단이 더 작은 규모로 퍼져있었기 때문에 군사 반란의 위험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렇게 원로원이나 속주 총독, 군단 지휘관들의 권한을 줄이고, 황제 중심으로 권력을 모아 관료 중심으로 통치를 시행하는 제도를 만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통치방식을 기존의 '원수정'에서 '전제정'으로 이행시킨 황제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군인 황제 시대'를 겪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시 로마 제국에서 그러한 폐해를 일으키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인한 것으로 보이며,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이 전제군주가 되려 한 것은 아니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0년의 임기를 마치고 황제위를 사임하였다.

황제위 사임과 최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황제의 자리에서 은퇴하였다. 이에따라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정제로 승격되었고,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갈레리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부제로 임명되어 제2차 사두정치가 시작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고향 근처에 개인 황궁을 짓고, 그곳에서 조용히 채소를 키우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은퇴하자 사두정치체제는 금세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콘스탄티우스의 아들과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이 각각 아버지의 권력 승계를 요구하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그 사이에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와 딸을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지만,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두 사람을 풀어주는 대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동방으로 추방하였다고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11년 사망하였고, 아내와 딸은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죽은 후에 서방 정제에게 의탁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서방 정제에게 살해당하였다고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대개혁을 주도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와 평화로운 삶을 구가하려고 하였지만, 자신이 만든 제도가 붕괴하면서 불우한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또 디아클레티아누스는 역사적으로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데, 이는 그가 행한 기독교 박해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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