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48대와 49대 황제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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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

발렌티니아누스 1세

고대 로마가 여러 지역에 걸처 광대한 영토와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대에는, 여러 문화와 종교를 인정하고 로마 안으로 받아들인 포용 정책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국가와 도시들이 로마 안에 포함되어 로마와 하나가 되었으며, 현대에도 여러 국가들이 스스로 로마의 후예라고 자처하기도 한다. '플라비우스 발렌티니아누스'(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321년경 '판노니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그의 아버지가 젊었을때 로마 군단에 입대하여 군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도 자연스럽게 로마 군단에서 군생활을 하였다. 당시는 이미 많은 '게르만족'들이 로마의 영토 내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로마 군단에서 병사로 생활한지도 오래 되었기 때문에, 로마의 적도 게르만족이었지만 로마 군단의 병사도 게르만족인 경우가 드믈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게르만족 출신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게르만족이라고 하나로 뭉뚱그려서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도 여러 부족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반달족', '고트족', '부르군트족', '프랑크족', '앵글로색슨족' 등이 있다. 본래 로마에서 '갈리아'라고 부르던 프랑스 지역은 원래 '갈리아족'이 살던 곳이었지만, 프랑스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족인 프랑크족이 세운 왕국이다. 또 앵글로색슨족은 '브리타니아'로 넘어가서 영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렇듯 게르만족은 오래전부터 로마의 큰 위협이었고, 늘상 다투는 적이자 이웃이 되었고, 나아가서는 로마의 일원이자, 로마의 멸망을 앞당기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일개병사에서 지휘관까지 오른 인물로 알려져있는데, 그는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에 종교적 문제로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해임되기도 했지만,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요비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군대로 복귀해 다시 장교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364년에 요비아누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고위 관료들이 '니케아'에 모여 다음 황제를 세우기 위해 회의 하였는데, 몇명의 후보들 중에 발렌티니아누스가 선택받았다고 한다. 황제로 추대된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정식으로 즉위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는데, 거기서 군단 병사들의 요구로 동생인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하였다. 이는 후계자 없이 갑자기 사망한 율리아누스와 요비아누스에 의해 제국에 혼란이 생긴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발렌스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다스리기로 하였고,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밀라노로 향하여 제국의 서방을 관리하게 되었다. 반렌티니아누스는 통치시기 대부분을 로마를 위협하는 이민족과의 싸움으로 보냈는데, 라인강 유역과 다뉴브강 유역 뿐만 아니라 브리타니아와 북아프리카의 침략에도 대응해야 했다. 로마 제국 내부에서도 여러번 반란이 일어났는데, 365년에는 '프로코피우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났으며, 369년에서는 브리타니아에서 '반렌티누스'의 반란이 일어났고, 372년에는 아프리카에서 '피르무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369년과 372년의 반란은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大 테오도시우스)가 진압하였는데, 그는 후에 황제가 되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 이기도 하다. 367년에는 아들인 '플라비우스 그라티아누스'를 공동황제로 선포하여 정식으로 후계자로 선포하였다. 374년에 '콰디족'이 '판노니아'를 침범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이듬해인 375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콰디족의 사신단과 회견하였다. 그러나 이 회담에서 콰디족 사신들은 국경을 침범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고 도적떼이고, 로마 제국이 먼저 자신들의 영토를 침범하고 요새를 세웠다고 변명하였다고 한다. 이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격분하여 사신들을 꾸짖었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뇌졸중을 일으켜 쓰러졌다고 한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유능한 황제로 평가되었지만, 어이없는 일로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그라티아누스와 또 다른 아들인 '발렌티아누스 2세'가 공동통치자로서 로마 제국을 다시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발렌스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발렌스'는 328년에 판노니아 남부에 있는 '키발라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형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함께 군대에 입대하여 오랫동안 군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364년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황제로 추대되고 나서 안정적인 제국 통치를 위하여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이에 발렌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로마 제국의 동방을 맡아 관리하게 되었다. 365년 발렌스는 요비아누스가 페르시아에게 넘겨준 로마의 영토를 일부라도 수복하기 위해 '카파도키아'로 향했는데, 그때 프로코피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프로코피우스는 율리아누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할때 군단의 일부를 맡아 아르메니아 방면으로 진격하였는데, 율리아누스가 사망할때까지 본대에 합류하지 못하였었다. 그리고나서 요비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지휘관에서 해임되어 있었는데, 프로코피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자신과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관계를 이용하여 정당성을 주장하며 군단을 회유하고 황제를 참칭하였다고 한다. 발렌스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당시에는 '알레마니족'의 위협을 막느라 그럴 여력이 없었다. 한때는 이 반란에 '트라키아'와 '비티니아'까지 가담하면서 위협적이었지만, 발렌스가 대대적으로 군단을 파견하여 진압을 시작하자 내부에서 이반이 계속되어 반란세력은 금세 무너져버렸다. 366년에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된 프로코피우스는 처형되었고, 그 수급은 '트리어'에 있었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그러나 발렌스는 이 반란에 대해 잔인하게 보복하였고, 반란의 가담자들 중 프로코피우스를 배신했던 이들도 모두 처벌받았다고 한다. 반란을 진압한 발렌스는 이번에는 프로코피우스를 지원한 고트족과 전쟁을 시작하였다. 367년부터 369년에 걸쳐 발렌스는 다뉴브 강을 건너 고트족의 영토를 침공하였고, 그곳에 여러 요새를 건설하여 압박하였고, 이에 고트족은 사실상 항복에 가까운 형태로 평화협상을 맺었다. 요비아누스와 페르시아의 평화협정 이후 동방에서 영향력이 로마의 영향력이 축소되면서, 페르시아는 과거의 '파르티아' 시절처럼 다시 아르메니아를 자기 아래에 두고 로마와의 사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고 하였다. 이에 페르시아가 아르메니아를 쳐들어가 국왕을 축출하고, 자신들과 가까운 인물을 왕으로 내세우면서,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 과거처럼 아르메니아에서 몇차례 대리전을 치루기도 하였다. 375년에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하고 두 아들이 권력을 승계하였고, 발렌스는 다시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였으나, 잇따르는 반란을 진압하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 시기에는 '훈족'의 침입이 문제로 대두되었는데, 376년 훈족에 맞서싸우던 '동고트족'의 '에르마나리크' 왕이 전사하였고, '서고트족'의 족장이었던 '아타나리크'가 로마 제국의 영내인 트라키아로 자신들이 이주할 수 있도록 받아달라고 요청하였다. 바야흐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발렌스는 고트족의 이주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트라키아의 총독이었던 '루피키누스'는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이주해 온 고트족을 탄압하였다. 377년 결국 고트족의 족장들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로마 군단은 대패하였고, 지휘하던 루피키누스는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동방의 로마 군단은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동부 국경에 집중되어있었고, 서방의 그라티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서방에서도 라인강 일대에서 게르만족을 방어하느라 제대로 지원하기 힘들었다. 그동안 고트족들은 발칸반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고 한다. 378년 발렌스는 군단을 재편하여 발칸반도로 향했고, 서방에서도 그라티아누스가 정예 군단을 이끌고 합류하기로 하였다. 발렌스가 이끄는 군단은 '아드리아노폴리스' 근처까지 코트족의 군대를 물리치며 진군했으나, 그라티아누스는 라인강 인근에서 알레마니족이 쳐들어오면서 병력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라티아누스는 자신의 지원군이 도착할때까지 전투를 미루고 기다릴 것을 요청하였지만, 발렌스는 로마 군단이 숫적으로 우세하였기 때문에 단독으로 공격하기로 마음먹었고, 고트족 족장이 제안한 평화협상도 거절하였다. 그러나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 군단은 대패하여 군단 전체의 2/3가 괴멸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많은 지휘관이 전사하였고, 발렌스도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혹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작은 오두막에 숨었는데, 고트족이 그곳에 불을 질러 산채로 타죽었다고도 한다. 황제가 전투중 전사하였지만 그 시체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이 생기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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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티아누스

플라비우스 그라티아누스는 359년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367년에는 9세의 나이로 공동황제이자 후계자로 선포되었다. 그라티아누스는 시도 잘 짓고 철학적 지식이 뛰어났으며, 아버지로부터 군사적 재능도 물려 받은 것 같다. 375년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16세의 나이에 정식 황제로서 통치를 시작하였으며, 이때 동생인 '발렌티니아누스 2세'도 황제로 추대되어 동생과 같이 공동황제로서 통치하였다. 비록 당시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4세의 나이에 불과했지만, 발렌스와 그라티아누스는 그의 권리를 인정해 주었으며, 이탈리아와 '일리리쿰', 아프리카를 통치 영역으로 삼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라티아누스는 나머지 지역인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지역을 관리하였으며,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관리영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라티아누스도 아버지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처럼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이민족으로부터 로마 제국을 방어하는데 힘을 쏟았는데, 주로 라인강 일대에서 갈리아로 쳐들어오는 게르만족과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378년에 고트족의 반란에 맞서 발렌스를 돕기위해 출정하였으나, 도중에 알레마니족의 침공을 저지하였는데, 이로인해 구원이 늦어지면서 발렌스는 전사하고 상당한 규모의 로마 군단이 괴멸되었다. 이러한 불측의 사태에서 또 다시 라인강 인근이 게르만족의 위협에 노출되면서 그라티아누스는 특단의 결정을 하게되었다. 379년 그라티아누스는 은퇴한 군단 지휘관이었던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1세)를 황제로 임명하여 제국의 동방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동방의 문제를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맡기고 라인강 일대도 어느정도 안정되자 그라티아누스는 로마의 기독교화를 가속시키는 정책을 폈다. 그라티아누스는 기독교 외의 모든 이교와 이단을 금지시키고, 초대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이래 계속해서 역대 로마 황제가 계승해 왔던 최고 제사장 직위에서도 물러났다. 또한 원로원에 설치되어있던 승리의 제단을 폐쇠하였으며, 로마 민간 신앙의 중심이기도 한 '베스타' 신전을 해체하도록 하였다. 382년에는 기독교 외 모든 이교도 사제들의 특권과 면책권을 박탈하고, 사원과 성소들을 국가에서 몰수하였다. 말 그대로 로마에서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금지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383년에 브리타니아에서 '플라비우스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로 건너왔다. 그라티아누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로 향했는데, 파리인근에서 대치하던 중에 '무어인'으로 구성된 기병대가 그라티아누스를 배신하고 마그누스 막시무스 쪽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이에 그라티아누스는 리옹으로 도주했으나, 끝내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보낸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부하의 배신은 그라티아누스가 행한 종교 박해, 혹은 380년 이후의 실정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 시기 테오도시우스 1세도 고트족과 페르시아를 막는데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마그누스 막시무스에게 사절을 보내,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발렌티아누스 2세의 지위를 보장하는 대신, 테오도시우스 1세가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을 하였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

'플라비우스 발렌티니아누스'(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371년경 로마 황제였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375년에 탈렌티니아누스 1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당시 판노니아에 있던 현지 군단 지휘관이 황제로 추대하였다. 4세 밖에 안된 어린 나이 였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는 자칫 내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으나, 당시 황제였던 발렌스나 그라티아누스에 의해 황제 즉위가 용인되었다. 황제가 된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로마 제국의 영토 중에 그나마 혼란이 적은 이탈리아와 일리리쿰, 아프리카 지역을 통치하였으며, 실질적인 통치는 어머니인 '유스티나'가 맡았고, 전체적인 서방의 통치는 그라티아누스가 대신하였다.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그라티아누스를 살해하고,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지역을 장악하였을때, 테오도시우스 1세와 함께 평화협정을 맺었고, 이에 계속해서 황제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387년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쳐들어왔다. 이에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유스티나는 '테살로니카'로 달아나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의탁하였다. 이에 388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플라비우스 리코메르'와 그의 조카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에게 군단을 주어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몇번에 걸친 전투에서 계속해서 패배하였고, '아퀼레이아'까지 도주하였으나 결국 항복하였고, 테오도시우스 1세의 부하들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 후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유스티나는 밀라노로 돌아가 복위하였지만, 얼마 안되어 유스티나가 사망하였고, 테오도시우스 1세는 아르보가스트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도와 통치하도록 하였다. 아르보가스트는 어린 황제를 무시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이런 아르보가스트에게 위협을 느꼈고 로마 군단의 지휘권을 이양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아르보가스트는 이런 명령을 거부하였다. 이에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칙령으로 그를 해임하였지만, 아르보가스트는 대놓고 황제를 무시하였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던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비엔나의 궁정에서 사망한채 발견되었는데, 그 죽음에 대한 암살의 증거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명확히 자살이라고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아르보가스트에게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보가스트는 이후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여 자신의 권력을 지속시키려고 하였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죽음으로 사실상 로마 제국의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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