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19대 황제 「마르쿠스 디디우스 세베루스 율리아누스」
- 역사
- 2023. 2. 18.
부유한 집안의 자제
'마르쿠스 디디우스 세베루스 율리아누스'는 133년 이탈리아 북부의 '메디올라눔'(현재의 밀라노) 출신으로, 밀라노의 지역 유지로 상당히 부유한 가정에서 지냈던 것 같다. 그는 다음 황제가 되는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같은 세베루스 가문 출신으로, 15세 무렵에 로마로 와서 생활하였는데, 그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의 친모인 '도미티아 루킬라'의 집에서 잠시 생활한 적이 있어, 후에 이러한 인연으로 출세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재무관이나 법무관 등의 공직 경험을 거쳐, 172년 경에는 제국의 주요 거점이었던 '게르마니아' 주둔 군단에서 지휘관을 역임하였으며, 175년에는 집정관으로 취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전임자인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처럼 밑바닥부터 성공한 인물로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 받았지만, 페르티낙스처럼 인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처럼 전형적인 로마의 원로원 의원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황제의 자리를 고집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는데, 그가 황제의 자리에 취임하고 나서, 다시 퇴임하는데까지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돈으로 산 황제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를 중심으로한 근위대는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페르티낙스를 살해하고서는, 로마 시민들에 대해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지, 병영으로 몰려가서 문을 잠그었다. 겨우 3개월 남짓한 기간 안에 벌써 두명이나 황제가 암살되는 것을 본 로마의 시민들은 참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폭거에도 근위대의 칼이 두려워서 인지, 아니면 기가 막혀버린 것인지 로마 시민들은 생각보다 잠잠하게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당시에는 전 로마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의 혈연자나 관계자로, 원로원에서 황제를 맡아줄 것을 부탁받은적도 있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나 그와 동서지간으로 황족이었던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같은 인물들도 있었기 때문에, 심각한 사태로까지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나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같은 사람들도 선뜻 황제로 나설 수가 없기도 했는데, 이탈리아 내부에 최대의 무력집단이 되어버린 1만명에 달하는 근위대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정상적인 상태로 나아갈 수 없는 곳 까지 와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근위대는 자신들의 진지에 공고문까지 붙여놓고서는 황제자리를 경매로 팔아넘겼다. 당시 경매는 황제의 자리가 걸려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치열했는데, 최종적으로 페르티낙스의 장인이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두명의 경쟁으로 좁혀졌다고 한다. 두 사람은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약속했을 뿐만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대로 여러 근위대에 대한 선심성 공약을 남발 한 것 같다. 그러나 결국 돈의 승리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다음 황제로 취임하게 된다.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가 돈으로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원로원 의원과 로마 시민들은 아연실색하였다고 한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전임자인 페르티낙스의 전말을 두려워해서 인지, 근위대에 대한 보상금은 예정대로 지급했다고 한다.
운이 나쁜 황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황제로 취임하고 나서도, 유력한 자신의 경쟁자였던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에게 어떠한 정치적 보복도 하지 않았고, 무리한 개혁을 추진하거나 로마를 재건하지도 않았다. 아니, 할 시간이 없었다. 그가 취임한지 채 2주도 되지 않아, '판노니아'의 총독이자 '다브뉴 강' 지역 사령관이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병사들의 추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얼마 후에는 시리아의 총독인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가 역시 병사들에게 추대되어 황제로 취임하였다. 더 나아가 브리타니아 속주의 총독이었던 '데키무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까지 자신을 황제로 추대되면서, 로마에는 돈으로 산 1명의 황제와 황제라고 자청하는 3명까지 도합 4명의 황제가 공존하는 상황에 빠지게된다. 결국 근위대가 가장 우려했어야 하는 로마 군단에 의한 무력개입이 시작되었고, 로마 제국은 내전 상태에 빠지게 된다. 로마 시민들은 디디우스 율리우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펜스켄니우스 니게르를 공동 통치자로 하라고 요구하였지만, 그는 혼란에 빠진듯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사태를 진정시켜보기 위해 황제 암살자인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를 처형하고, 근위대를 지휘해서 로마 근처에 요새화 하려고 하였지만, 근위대가 말을 듣지 않으면서 실패하였다. 막다른 길에 몰린 디디우스 율리우스는 펜스켄니우스 니게르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등에게 암살자를 보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지휘하는 군단이 로마에 근접하였고, 이에 원로원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결국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근위대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돈으로 산 황제의 자리는 불과 64일 밖에 유지되지 못하였으니, 큰 돈을 허투로 쓴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런 그를 불쌍히 여겨서 인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그의 유해를 가족에게 돌려주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를 일으킨 근본 원인이 되었던 근위대는 철저히 처벌하여, 황제 암살 등의 음모에 가담하였던 자는 모두 처형되었고, 남은 자들도 모두 사실상 로마에서 추방하였다. 그 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의 병사들로 새로 근위대를 편성하였다고 한다. 많은 정치적 논란에 중심에 있는 '프라이토리아니'는 아직도 계속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