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왕국 2대 국왕 「누마 폼필리우스」
- 역사
- 2022. 12. 16.
'누마 폼필리우스'라는 인물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아마 서양사, 그중에서도 유럽의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제국 이전의 로마 왕국의 2대째 국왕 누마 폼필리우스.
왕좌를 거절한 누마
갑자기 없어져 버린 초대 왕인 '로물루스'의 뒤를 이어갈 다음 왕을 선출하는 일로 상당히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로마'라는 것은 참 재미있는 국가로, 초기 왕정 로마에서 제정 로마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는 '세습'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다. 전세계 모든 국가 중 세습의 생각이 없는 왕정은 드물다. 고대부터 시작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의 영국이나 일본의 왕실에 이르기까지 세습제가 기본이다. 로물루스가 사라진 후에도 로물루스의 혈족이 뒤를 이은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는 로마인과 사비니족의 병합한 형태의 국가였기 때문에, 로마인을 다음 왕으로 선출하고 싶다는 일파와 사비니족 사람을 왕으로 선출하고 싶다는 일파로 원로원이 나누어진 것 같다. 고대의 로마부터 현대의 대기업까지 인간이 하고 있는 일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때에는 가능한 한 무욕인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거기서 선택된 것이 누마 폼필리우스라는 40세의 아저씨였다. 지금의 40세는 젊지만, 당시의 평균 수명으로 생각하면 할아버지의 정도였을 것이다. 누마는 꽤 욕심이 없는 인물인 것 같다. 사비니족의 대부분은 로마에서 도시의 생활을 영위하였지만, 누마도시를 떠나 농사를 지으며 명상을 하거나 철학에 빠진 인간이었다고 한다. 일단 사비니족의 왕의 딸과 결혼하였었는데, 권력욕이라든가 그런 것은 일절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 그의 통치 중이었던 43년간은 전쟁이 없는 기간이었다고 한다. 평화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다. 로물루스가 싸움으로 평생을 보낸 것과는 상당히 대칭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덧붙여서 누마가 피타고라스 학파의 연구에 빠졌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피타고라스는 누마보다 후의 인물이므로 아마 창작일 것이다. 누마는 왕이 되는 것을 3번 거절했다고 한다. 아마 정말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싶은 타입이었을 것이다.
달력 개혁과 종교 개혁
로마 제국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누마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폭력과 전쟁으로 초석을 쌓은 로마에게 법과 관습에 의한 확실성을 주려고 했다”. 누마가 한 일중에 대표적인 것은 달력의 개혁과 종교의 개혁이다. 누마 이전에는 1년을 10개월로 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12개월로 바꿨다. 다만 1년을 355일로 계산했었기 때문에 20년마다 조정을 했던 것 같다. 이 누마가 정한 달력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한 율리우스력이 도입될 때까지 600년 이상이나 계속 사용되었기 때문에 대단하다. 조선왕조도 500년 이었다고 하니까 600년 후의 세계라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여담을 하자면 영어로 10월은 「October」로, Oct는 8을 나타내는 숫자이므로 8번째 달이 된다. 마찬가지로 Nov은 9, Dec는 10. 이것은 10개의 월이었던 것 앞에 2개의 월을 넣었기 때문으로, 누마가 도입한 달의 이름은 현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공적으로서는 실로 대단하다. 그렇지만 누마의 공적으로서는 종교의 개혁을 한 점이 더 클지도 모른다. 로마는 다신교 국가이다. 로마인은 그리스인과 같은 신들을 믿었다. 부르는 이름은 각각 '제우스'가 '유피텔'이 되거나 '헤라'가 '유노'가 되기도 하지만 같은 신이다. 그리스 신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마치 인간 같다.인간이 신들 같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좋든 나쁘든 자유롭다. 이것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신이 규율 등을 중시하는 것과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누마는 신관 조직을 정비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의 신관은 전업의 신관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관 등은 전업이 압도적으로 목사와 신부도 기본은 전업이지만, 일부 일본의 승려라던가 겸업으로 하는 행태도 있다. 이 신관직은 선거에서 선출되었다고 한다. 현재 국회의원 등과 같다. 그런 식으로 신관을 선출해도 좋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원래부터 로마의 신들도 자유로운 행태인 만큼 그 근처는 적당한 감각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이 제도 때문에 로마에서는 신관세력이 권력을 갖지 않았다. 중세 유럽에서는 신관 세력이 너무 비대해져 왕권을 능가하고 있었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관 세력이 왕을 배제하는 것도 있었지만, 적어도 로마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계급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한 예이며, 이후 역사가 중에는 “로마가 발전한 가장 큰 이유는 종교에 대한 생각이다”라고 말한 인간도 있었을 정도다. 어떤 의미 로마의 번영의 기초는 이 누마 폼필리우스가 쌓았다고 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누마는 후의 영웅 카이사르처럼 암살되지도 않고 평화로운 일생을 보냈다. 50년간 20회 이상이나 황제가 바뀐 '군인황제시대'와도 크게 다르다. 고대시대에 있어 40년간이나 전쟁하지 않았던 누마 폼필리우스는 좀 더 평가가 높아도 좋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