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해적의 황금시대 국가 공인 해적 「사략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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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

바다의 약탈자 해적

'해적'(Pirate)이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바다 위에서 도적질을 하는 자들을 뜻하는 말로, 산에서는 '산적', 들에서는 '초적', 바다에서는 해적이라고 부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무력을 이용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는 이들은 중범죄자로 취급되며, 그에 따라 체포될 경우에는 가혹한 처벌을 받았고, 이는 오늘날의 문명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죄질이 조금 나아진 만큼 처벌도 관대해졌지만, 그들이 여전히 범죄자로 구제되어야 할 대상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러한 해적들의 역사는 인류가 배를 타기 시작한 역사와 비슷하게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들은 작게는 어선이나 소형 무역선을 약탈하는 일부터, 크게는 군함을 공격하거나 해안도시를 습격하는 일까지 다양한 범죄를 일삼았다. 그러나 해적들은 명백한 범죄자이지만 이들을 부정적으로만 생각치 않은 자들도 존재하였는데, 일부 국가나 권력자들은 해적들을 하나의 무장세력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무력을 정치적경제적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포섭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왜구'들로 이들은 국가에 의해 조직되거나 승인된 조직은 아니었지만, 그 중 일부는 다이묘나 유력자들의 지원을 받거나 유착관계 이기도 했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유명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여 그 명성을 쌓았지만,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피우스'는 로마 정계에서 밀려난 후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에 대항하기 위해 시칠리아 섬을 거점으로 하여 이탈리아 해안을 약탈하는 해적질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을 배를 타고 해상에서 약탈을 하는 만큼 어느 정도 규모의 무리를 이루고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특성 때문에 준군사조직으로 평가되기도 하였고, 실제 군사조직이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해적이 되거나 해적질을 하기도 하였다.

국가 공인 해적

이러한 준군사조직에 가까운 해적들에게 눈독을 들인 국가들 중에서 오스만 제국이 대표적인데, 오스만 제국은 전통적인 내륙지방의 유목 민족 출신인 투르크족이 중심이 되서 세운 국가로,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해양에서는 취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양 세력을 포섭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지중해에서 활동하던 '바르바리 해적'들 이었다. 그러나 바르바리 해적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원과 보호를 받으며, 제국의 이익을 위한 활동을 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암묵적인 관계로 해적들이 오스만 제국의 소속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관계는 일종의 공생관계로 해적들은 오스만 제국의 협력하는 것을 통해 안전한 항구와 피신처를 제공받을 수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은 필요에 따라 이들의 무력을 제공받아 지중해에서 적대국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가 개별 무력집단의 범죄 행위를 용인하고 대가로 이익을 취하는 행태를 여러 다른 나라에서도 효율적이라고 받아 들인 것 같은데, 영국과 프랑스 같은 대표적인 유럽국가들이 이를 이용하기 위해 '사략'이라는 제도를 만들어내게 된다. 사략이란 국가가 특정 일반 개인에게 면허를 발급하여 해적질을 공인하는 것인데, 오스만 제국이 본래 해적이었던 자들을 이용한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이 면허를 받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 했으며, 해적질의 대상이 전쟁 중인 국가로 제한된다던가, 약탈물의 일부를 국가에 납부해야 하는 등 몇몇 제한 사항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본래 해적이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발급한 다는 것으로, 이 때문에 사략이 하나의 사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해운 회사들이 사략 사업을 시작하거나 귀족들이나 부자들이 사략선에 투자하기도 하였으며, 해군의 군인들이 부를 얻기 위해 휴직하거나 퇴역하여 사략선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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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의 나라 영국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이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영국은 이러한 사략선에 더해 일반 해적들까지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대서양에서 라이벌인 스페인이나 프랑스를 괴롭히며 큰 이익을 보았다. 영국의 대표적인 해적으로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나 '헨리 모건', '윌리엄 키드' 같은 이들이 있으며, 그 외에도 유명한 해적들 중에서는 유독 영국 출신들이 많고, 이들은 카리브 해를 포함하여 대서양, 서아프리카, 인도양 등을 누비며 해적질을 일삼으며 악명을 날렸다.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격파하고 해상을 장악할 수 있었던 데에 대해서도 해적의 역할이 컸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바친 제물은 당시 영국의 일년 세입을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고도 한다. 해적들이 영국의 국력에 기여한 바가 얼마가 되는지 정확히 수치화 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영국 왕실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해적을 사면하는 등 그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기도 하였고, 그들 중 일부가 영국에서 작위를 받거나 해군에 임용되기도 하는 등 국가적으로 그 공적을 인정받았다. 또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호평을 받았는데, 그들은 범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적을 무찌른 영웅 취급을 받았으며, 그들의 해적 행위로 인한 범죄도 사면 받는 등 특별 취급을 받기도 하였다.

해적의 폐해와 사략선의 몰락

영국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은 해적들을 이용하여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었는데, 해적질은 본질적으로 범죄이며,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해적 행위를 일삼는 사람들도 결코 선량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해적들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물리적 피해를 입었으며,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손실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가 소속으로 약탈의 범위를 제한받고 있던 사략선들도 문제였는데, 그들 중에는 본래 해적출신이었던 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렇지 않은 이들도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범법적인 약탈 행위를 일삼았다. 먼저 각국의 정부에게는 그들을 통제할 만한 힘이 없었으며,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통제할 수 있는 수단조차 없었다. 먼 바다에 나가 활동하는 사략선들은 국가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해적질을 일삼았으며, 그것이 알려지지만 않는다면 처벌받지도 않았다. 또 각 국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불법적인 약탈 행위를 저지른 해적들도 얼마든지 사면했으며, 사략선들이 그러한 행위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감아 주었다. 국가가 범죄를 용인하고, 그것이 하나의 사업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쟁이 종결되고, 정치외교적 상황에 따라 분쟁 상황에 대한 통제가 필요해 지면서 사략선들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럼에도 한번 뿌려진 씨앗을 단번에 모두 회수하는 것은 어려웠고, 당분간 카리브해와 인도양을 중심으로한 해적 활동이 계속되었다.

현대의 해적

1856년 파리 선언을 통배 공식적으로 사략선을 금지하기 시작하였지만, 이 선언에 가입하지 않은 미국 등의 일부 예외 국가는 아직도 법적으로 사략선을 운영할 수 있다. 그러나 1898년에 일어난 '미국-스페인 전쟁'에서도 미국은 사략선을 운영하지 않았으며, 1907년에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사략 행위 근절을 위한 국제법이 제정되는 등 실질적으로 사략 제도는 없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비슷한 행위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는데, 현대에도 소말리아와 같은 일부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암묵적으로 해적 행위를 용인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여러 분쟁지역에서는 테러단체들을 준군사조직처럼 이용하고 있기도 하다. 현대 사회에서도 여러 국가와 단체,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불법적이고 비인도적인 무력 행위를 이용, 또는 조장하고 있는 현실이다. 해적들은 한때 유럽 국가 사이에서 판도를 바꿀 정도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지만, 정보와 통신 기술이 발전한 현대에는 다시 소규모의 도적 집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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