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17세기 영국 역사에 큰 소용돌이 「삼왕국 전쟁」과 「청교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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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17세기 영국의 문제들

현대 영국의 정식 명칭은 '그레이트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으로, 이를 줄여서 흔히 '연합왕국'(United Kingdom)으로 부르며 U.K.로 표기하는데, 일반적으로는 그냥 그레이트 브리튼 섬 혹은 그레이트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를 합친 것을 영국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아일랜드를 영국의 일부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통상적으로 영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4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17세기에는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 아일랜드 왕국이 따로 있었으며, 웨일스는 거의 잉글랜드 왕국에 흡수되어 있었다. 이 세 개의 왕국은 상당히 미묘한 관계에 있었는데, 아일랜드는 12세기 무렵부터 잉글랜드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1542년에는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가 아일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하기도 하였지만, 아일랜드인들의 인정을 받은 행위는 아니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관계는 그것보다 더 복잡해서 서로 견제하는 앙숙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왕족들이 혈연을 통해 연결되어 있기도 했으며, 1603년에는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에서 왕위에 올라 '제임스 1세'가 되기도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별개의 국가로 단지 같은 왕이 통치할 뿐인 상태였다. 또 이외에도 큰 문제가 있었는데, 이 시기 유럽을 휩쓸고 있던 '종교 개혁'으로 인한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갈등이었다. 당시 유럽의 대륙 국가인 프랑스나 스페인 등은 가톨릭을 옹호하여 개신교들을 탄압하고 있었는데, 반면에 영국에서는 개신교 세력이 득세하였지만,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가톨릭 박해와 '메리 1세'의 개신교 박해가 번갈아 일어나는 등 극심한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는 등 대외 문제들로 인해 심각한 재정 문제를 안고 있기도 하였는데, 제임스 1세는 지역 문제와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중간자적 입장을 취하며, 적당한 타협과 너그러운 포용으로 해결하고 있었지만, 재정에 관해서는 해결책이 없어 잉글랜드 의회와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사실 이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다른 영국의 특이한 점 때문인데, 영국은 꽤 오래전부터 통치자인 왕과 의회가 국정에 대해 협의하는 전통이 있었으며, 비록 현대의 의회와 달리 상당히 제한적인 역할을 하기는 하였지만, 왕도 의회와 의회에 결정에 대해서 존중해 주었다. 또 이 의회에는 일부 평민들도 참석할 수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특히 '젠트리'로 불리는 평민 부유층이 대거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었다.

주교 전쟁

'삼왕국 전쟁'이란 1639년에서 1651년 사시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왕국이 정치적종교적 이유로 분쟁을 겪은 것을 지칭하는데, 3개의 개별 국가가 전쟁을 벌였다기보다는, 각 국가에 속한 세력들이 각자의 이익에 따라 개별 국가를 넘나드는 분쟁을 벌였다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 커다란 분쟁에 가장 주요 인물은 바로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리던 '찰스 1세'로, 이 대단한 내전의 주요 원인은 찰스 1세와 잉글랜드 의회 간의 반목에 있다.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 1세의 아버지인 제임스 1세 시절부터 통치자와 반목하였는데, 왕은 다른 유럽의 국가들처럼 좀 더 전제적인 통치를 하려고 시도하였으며, 의회는 의회대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왕의 요구에 부정적인 반응을 하면서 점차 사이가 멀어졌고, 이 때문에 제임스 1세는 22년 동안 통치하면서 의회를 4회밖에 열지 않았으며, 찰스 1세는 11년간 의회를 닫아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특성상 이렇게 의회를 닫아두면 정상적으로 세수를 확보하기가 힘들었는데, 찰스 1세는 이러한 문제는 스코틀랜드를 이용하여 풀 생각을 한 것 같고, 그는 잉글랜드의 왕으로 대관식을 올린 지 8년 정도 지난 1633년에 에든버러에서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사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먼저 이었기 때문에 찰스 1세도 스코틀랜드 출신이라고 볼 수도 있었는데, 찰스 1세는 후계를 이은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늦게서야 겨우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이으면서도 전통적인 장로교 방식이 아닌 잉글랜드의 성공회 방식으로 대관식을 치르면서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의 불만을 샀다. 게다가 이어서 펼친 정책은 더 가관이었는데,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교회들을 성공회 기반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하였고, 성직자들도 장로 중심에서 왕이 임명하는 주교 중심으로 변경하려고 하면서 큰 반발에 맞닥뜨리게 된다. 결국 스코틀랜드에서 찰스 1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1639년 찰스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이에 대한 진압을 시도하면서 '주교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여기서 찰스 1세가 패배하면서 본격적으로 영국 전체가 휩쓸리는 대규모 내전이 시작되게 된다. 이 주교 전쟁은 사실 종교적인 이유로 찰스 1세와 스코틀랜드 의회와 종교계 간의 분쟁에 불과하였는데, 찰스 1세가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면서 일파만파 일이 커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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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반란

주교 전쟁의 패배로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는데, 의회를 닫아두고 편법으로 세금을 징수하던 그에게는 그만한 금액을 조달할 만한 금전적 여력이 없었고, 결국 잉글랜드 의회는 닫힌 지 11년 만인 1640년에 다시 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배상금 문제로 상당히 급한 처지였지만 의회는 그에게 협력할 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의회에서는 찰스 1세의 배상금 문제를 논의하기는커녕, 그동안 찰스 1세가 편법적으로 징수한 세금의 적법성을 논하며 따지고 들기만 하였다. 결국 화가 난 찰스 1세는 의회가 열린 지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의회를 다시 닫아 버렸고, 이러한 찰스 1세의 조치에 잉글랜드 의회의 의원들도 본격적으로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된다. 이 과정을 보고 있던 스코틀랜드군은 배상금 지급을 압박하기 위해 다시 진군을 개시하였는데, 찰스 1세는 이를 저지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다시 한번 패배하였다. 결국 막다른 곳에 몰린 찰스 1세는 이 해 말에 다시 한번 의회를 열었는데, 그의 행동에 단단히 화가 난 잉글랜드 의회의 의원들은 의회가 열리자마자 의회와 의원의 임기 정하고, 왕의 허가 없이 의회를 열 수 있는 권한을 만드는 등 왕의 독단에 대항할 수 있는 법안을 추진하였다. 또 찰스 1세의 측근들을 하나하나 파면시켰는데, 그중에는 아일랜드의 총독인 '스트래퍼드 백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문제가 이렇게 커진 것은 찰스 1세가 의회와의 협의를 거부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도 있지만, 동시에 의회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왕권에 도전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양쪽 모두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점차 갈등이 격화된 면이 있다. 어찌 되었든 이 과정에서 스트래퍼드 백작은 의회에 의해 반역죄로 고발되었는데, 그의 혐의에 대해 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하였고, 찰스 1세도 그의 구명을 위해 상당히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는 그의 처형을 강행하였다. 이 때문에 아일랜드에서는 반란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는데, 잉글랜드 의회는 '대간주'를 발표하여 찰스 1세의 잘못을 비난하는 등 사실상 모든 잘못을 찰스 1세에게 덮어씌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1641년에 아일랜드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그들은 반란이 잉글랜드 의회에 대한 것이며 찰스 1세와는 상관이 없다고 선언하게 된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의회는 지지세력을 얻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트렸는데, 그들은 찰스 1세가 프랑스 출신 왕비 '앙리에트 마리'와 함께 가톨릭 세력을 옹호하려고 한다고 주장하며 개신교 세력을 끌어들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찰스 1세는 병사들을 이끌고 의회로 쳐들어가서 문제가 되는 5명의 의원을 체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어느 것이 진실인지 분간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찰스 1세와 잉글랜드 의회의 행동은 서로 간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만들었고, 이는 결국 쌍방 간에 무력 충돌을 불러오게 된다.

잉글랜드 내전

1642년 잉글랜드는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왕당파와 잉글랜드 의회의 의회파로 나뉘어 내전을 시작하였는데, 서로 간에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것에 실패하였고, 그 결과 내전은 오랜 기간 동안 지루한 소모전의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 사이 찰스 1세는 독자적으로 새로운 의회를 소집하는 등의 시도를 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였고, 1644년에 '올리버 크롬웰'과 '신형군'(철기대)이 등장하면서 전세가 의회파로 넘어가게 된다. 의회파는 '마스틴 무어 전투'와 '네이스비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완전히 승기를 잡았고, 1645년 패배를 직감한 찰스 1세는 보다 온건파로 생각되는 스코틀랜드군을 찾아가 항복하게 된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의 목적은 그저 지난 전쟁에서 못 받은 배상금을 받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잉글랜드 의회에게 배상금을 받기로 하고 찰스 1세의 신병을 넘겨버렸다. 사실 이 내전은 찰스 1세의 왕실의 세금 징수권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와 잉글랜드 의회의 의회를 존중하고 법과 절차를 지켜달라는 생각보다 단순한 문제로 인해 시작된 것인데, 분쟁이 길어지는 동안 이 목적은 상당히 변질된 것 같고, 특히 찰스 1세는 이 과정에서 신변의 위협을 크게 느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가 굳이 스코틀랜드군을 찾아가서 항복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으며, 잉글랜드 의회에 신변이 넘어간 이후로도 의회에 협조하는 모습보다 자신을 구명하려는 시도에 필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내전이 끝난 이후에도 신형군은 해산하지 않고 계속 남아있었는데, 의회파에서는 그들에게 밀린 급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고, 이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찰스 1세가 구금되었던 곳을 압박하여 그의 신병을 넘겨받기도 하였다. 찰스 1세도 이러한 의회파 사이의 내분을 이용하여 외국으로 도피할 생각을 하였지만, 그를 결국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다시 연금되게 되었고, 이번에는 스코틀랜드를 끌어들여 2차 내전을 일으켰지만, 1648년 '프레스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1년 만에 다시 실패하게 된다. 의회파가 언제부터 찰스 1세를 처형하려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 올리버 크롬웰을 위시로 한 급진파가 주도권을 확보하였고, 그들은 '프라이드 숙청'을 일으켜 반대파 의원들을 몰아내고 자신들만의 '잔부 의회'를 소집하였다. 이후 재판을 열어 찰스 1세를 처형하였는데, 이 재판에는 총 135명의 의원 중 68명 밖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최종적으로 사형명령에 서명한 의원은 그중에서도 59명밖에 안되었고,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파의 군대를 지휘한 '토머스 페어팩스'도 공개적으로 서명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 결과로 1649년 찰스 1세는 처형되었고, 잉글랜드 왕국은 공화제의 잉글랜드 연방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잉글랜드 내전의 일련의 과정을 '청교도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당시 의회파의 군대에 청교도들이 많이 참여한 것은 사실이나, 내전 자체가 청교도들에 의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이 내전은 청교도들의 이익을 위해 벌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내전 후에 청교도들의 목적이 달성된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의회의 프로파간다에 속아 전쟁터에 동원된 것에 불과하다. 사실상 이 내전은 왕과 의회 간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지만, 도중에 그 성격이 크게 변질되었고, 결과적으로 올리버 크롬웰과 그 일파의 권력 쟁탈을 위한 쿠데타로 막을 내리게 된다.

아일랜드 침공

잉글랜드 연방은 공화제를 표방하였지만 이는 공염불에 그치고 말았는데, 올리버 크롬웰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의원들이 그의 정부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이후로도 그가 권력을 전횡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성립하지 못했다. 한편 내전에서 패한 왕당파와 잉글랜드의 가톨릭 세력들은 아일랜드로 몸을 피했는데, 잉글랜드에서 내전이 계속되는 동안 아일랜드에는 '아일랜드 맹방'이라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들은 찰스 1세에 대한 지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사실 찰스 1세가 사망한 이후 잉글랜드 연방에는 아일랜드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없었지만, 올리버 크롬웰은 그들이 심각한 위험이 될 것이라며 아일랜드 침공을 강행하였는데, 이러한 행위는 청교도인 올리버 크롬웰의 가톨릭에 대한 적개심 때문인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긴 내전에 지친 의회파 군인들은 아일랜드 출정을 거부하였고, 올리버 크롬웰은 공포정치나 다름없는 방법으로 이를 진압하였는데, 그는 항명을 일으킨 주모자를 처형하는데 그치지 않고, 탈영병들이 숨어있는 마을을 통째로 포격하는 등 400명이나 되는 인원을 총살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강경책은 아일랜드에 상륙하고 나서도 계속되었는데, 올리버 크롬웰은 전투와 민간인 학살을 병행하며 진압을 이어나갔고, 이러한 만행으로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전체 인구 중 1/4 정도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650년에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에 있던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데려와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세우자, 올리버 크롬웰은 진압군을 남겨두고 서둘러 잉글랜드로 돌아가게 된다. 아일랜드가 완전히 점령된 것은 그 후로 3년이나 지난 1653년인데, 이후 올리버 크롬웰과 의회파는 아일랜드의 좋은 영토는 모두 자기들이 나눠가졌고, 토착민들과 가톨릭 세력은 늪지대만 가득한 쓸모없는 땅으로 쫓아버렸다. 이전부터 아일랜드 사람들은 잉글랜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전쟁 이후부터 이러한 성향이 더 극심하게 변하였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침공과 독재자

잉글랜드로 복귀한 올리버 크롬웰은 다시 군대를 소집하여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갔는데, 이는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명분 없는 침략에 불과한 행위였다. 전쟁 초기에는 스코틀랜드군이 우세를 점하였으나, 퇴각하는 잉글랜드군과 맞붙은 '던바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1651년에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로 역습을 시도하였지만 '우스터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게 된다. 결국 스코틀랜드도 잉글랜드 의회파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찰스 2세는 다시 프랑스로 탈출하게 된다. 올리버 크롬웰은 스코틀랜드를 아일랜드보다는 더 유화적인 태도로 대하긴 하였지만, 독자적인 통치를 제한하고 잉글랜드의 영향 아래에 두었다. 이로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삼왕국 전쟁이 막을 내리고, 세 나라는 잉글랜드 연방 아래 통합되게 된다. 이후 올리버 크롬웰은 '호국경'의 자리에 올라 잉글랜드 연방의 실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독재자였으나 끝까지 왕좌에 앉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누렸는데, 1658년 그가 사망한 후에는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의 자리를 승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리처드 크롬웰은 호국경의 자리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었고, 이듬해인 1659년에 사임하고 도피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잉글랜드에서는 왕정복고가 일어나 찰스 2세가 다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영국은 프랑스보다 100년 이상 앞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섰지만, 이는 사실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위정자들이나 시민들의 의식도 공화제를 유지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하였다. 그 결과 공화정은 사실상 독재정으로 변질되었으며, 그나마도 독재자가 사망하자 그대로 다시 왕정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후 일어난 프랑스 혁명에서도 공화정과 제정, 왕정을 오가는 양상을 보인 것처럼, 한 나라의 정치체제가 변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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