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조조가 가장 총애한 위나라의 사천왕 「하후돈」
- 역사
- 2023. 10. 31.
한쪽 눈을 잃은 맹하후
'하후돈'(夏侯惇)은 중국의 후한말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인데, 패국 초현 출신으로 자는 '원양'(元讓)을 썼다. 당시는 황건적이 난을 일으키는 등 상당히 혼란한 시기였는데, 하후돈은 이 군웅할거의 시기에 세력을 일으킨 '조조'의 친척으로, 조조가 거병을 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 합류하였으며, '하후연', '조인', '조홍'과 함께 초기부터 조조의 휘하에서 활약한 사천왕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하후돈은 190년 조조가 '반동탄 연합군'의 일원으로 분무장군으로 있을 때 사마로 종군하여 보좌하였으며, 병사가 부족해지자 양주에 가서 모병을 통해 병사들을 모아 오기도 하였고, 백마에 주둔하면서는 절충교위에 동군태수로 있었다고 한다. 하후돈은 어렸을 때부터 강직한 성품이었던 것 같은데, 14세 무렵에 학문을 배우던 스승이 모욕당하자, 스승을 위해 그를 죽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그의 성품과 용맹함으로 조조를 가까이에서 수행하며 무장으로 활약했는데, 개인적인 용맹은 뛰어났으나 군대를 지휘하는 것에는 별로 재능이 없었던 것 같고, 주로 후방에서 조조의 주요 거점을 지키는 역할을 하였다. 194년 조조가 서주에서 '도겸'과 겨룰 때 하후돈에게 복양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장막'과 '진궁' 등이 '여포'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고, 조조의 근거지였던 연주가 완전히 여포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당시 많은 관리들과 장수들이 이들에게 호응하였으므로 상당히 위험한 상태였던 것 같은데, 견성에 있던 '순욱'이 이러한 움직임을 눈치채고 다급하게 하후돈을 불렀고, 그는 급히 병사들을 모아 반란의 무리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그 숫자가 소수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견성을 굳건히 지키며 여포를 물러나게 하였는데, 덕분에 복양은 여포에게 빼앗기게 되었지만, 견성에 있던 조조의 가족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하후돈은 한때 적에게 속아 사로잡히기도 하였는데, 하후돈의 부하 중 '한호'라는 자가 몸값을 요구하는 인질범들과 타협하지 않고 굳게 들이쳐 그를 구해내었다. 후에 이 이야기를 들은 조조가 한호를 크게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이 일이 널리 퍼진 후로는 함부로 인질을 잡고 협박하는 자가 없어졌다고 한다. 서주에서 돌아온 조조가 여포를 공격할 때도 하후돈이 함께하였는데, 그는 전장에서 눈에 화살을 맞아 한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된다. 이때 하후돈이 스스로 화살을 뽑고 부모님이 주신 것이라며 딸려 나온 눈알을 다시 씹어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연의에서 그의 용맹을 과장하기 위해 서술한 내용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이로 인해 하후돈은 애꾸가 되었고, 이후 사람들은 하후연과 구분하는 의미도 있어 '맹하후'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전장에서 상처 입은 것에 대한 존경의 의미도 담겨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막상 하후돈 본인은 애꾸가 된 것을 매우 싫어하였고, 이 때문에 거울을 볼 때마다 화를 내며 땅바닥에 내팽개쳤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에는 청동 거울을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에 쉽게 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조가 가장 신뢰하는 장군
하후돈은 다시 진류와 제음의 태수를 겸하고 건무장군에 임명되었으며 고안향후에 봉해졌는데, 비록 그가 복양을 잃기는 하였으나 견성과 주군의 가족들을 지켜내는 데 성공한 공을 평가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큰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창궐하는 등 큰 재난이 있었는데, 하후돈은 '태수'(太壽)를 가로막아 저수지를 만드는 공사에 직접 참여하여, 장병들과 함께 흙을 나르거나 벼를 심는 등 솔선수범하였다고 한다. 한편 '유비'는 도겸이 병사한 후에 서주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조조에게 패한 여포는 서주로 달아나 유비에게 의탁하게 된다. 그러나 서주에서 유비와 여포의 역학구도는 완전히 바뀌었는데, 여포가 서주를 차지하고 유비는 패성으로 밀려났으며, 198년에는 '고순'과 '장료'등이 유비를 공격하였고, 하후돈은 이를 구원하려고 시도하였지만 패배하였다. 이후 조조가 원소와 겨룰 때는 하남윤으로 임명되어 후방을 지켰는데, 하후돈은 보통 조조의 오른팔로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무장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전략적 최후방에서 거점을 지키는 역할을 주로 한 것이다. 이는 일견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역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고 오늘의 아군이 내일의 적이 되는 난세에는 매우 중요한 임무로, 개인의 능력보다도 오직 가장 믿는 사람에게만 맡길 수 있는 일이다. 조조의 세력에서 이러한 임무는 책사 중에는 가장 뛰어난 참모인 순욱이 주로 맡았으며, 장수들 중에는 하후돈에게 맡겨진 것이다. 원소가 죽은 이후로도 하후돈은 계속 후방을 책임졌고, 202년에 하북평정이 진행되는 동안 '유표'에게 의탁했던 유비가 쳐들어 왔을 때, 하후돈은 '우금', '이전' 등과 함께 이를 방어하였다. 이때 유비는 하후돈의 군대가 내려오자 진채에 불을 지르고 박망으로 물러났는데, 하후돈은 이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비의 군대를 추격하였다고 한다. 결국 '박망파 전투'에서 하후돈은 유비의 복병에 당해 피해를 보았고, 후위에 남아있던 이전이 구원에 나서자 유비가 퇴각하게 된다. 하후돈은 204년에 업이 함락된 이후 복파장군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205년에는 병주자사 '고간'이 반란을 일으키자 '종요'와 함께 가서 이를 막았다. 하후돈의 공적을 보면 여포에게 복양을 빼앗기거나 유비에게 박망파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실패하는 모습들이 많이 보이는데, 결과적으로는 여포의 반란으로부터 견성을 사수하여 연주에 영향력을 완전히 잃지 않았으며, 유비가 퇴각함으로 후방의 안정을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처럼 후방 지키는 일은 단순히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만으로 평가받기는 어렵기도 하고, 또 개인적으로도 조조에게 상당히 편애받았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주군의 뒤를 따라간 최측근
215년에는 조조가 한중에서 '장로'를 정벌할 때 함께하였는데, 조조는 양평산 공격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자 퇴각할 생각으로 하후돈과 '허저'를 보내 산중에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통신체계나 조명도 없었기 때문에 일사불란하게 귀환하기가 힘들었는데, 밤중에 '고조'가 지휘하던 부대가 실수로 장로군의 진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어디선가 많은 사슴들이 나타나 한데 섞여버렸다고 하는데, 고조의 부대가 북과 피리를 울리며 소란스럽게 하자 놀란 장로군은 야습이 벌어진 줄 알고 모두 도망쳐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작 산중에서 병사들을 불러 모으던 하후돈과 허저도 이를 알지 못했는데, 후에 진채에 있던 '신비'와 '유엽'이 알려주고 나서야 운 좋게 이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216년에 있었던 '유수구 전투'에서는 '사마랑', '장패' 등과 함께 오나라와 싸웠으며, 전투 후 돌아오는 길에 조인, 장료 등과 함께 거소에 남아 지키게 하였고, 이때 조조는 하후돈을 26군의 도독으로 임명하고 기악과 명창을 내리는 등 사실상 위나라의 2인자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하후돈은 항상 조조에게 충성을 다하였는데, 조조도 이를 알고 그를 신임하여 항상 중요한 거점을 맡기는 등 신뢰하였다. 심지어 조조는 하후돈을 수레에 동승하게 하였으며, 사사로운 장소인 침실에 출입하는 것도 허가할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를 하였는데, 이는 하후돈의 능력이나 인척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도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하후돈은 항상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재물이 생기면 나누어 주위 사람들에게 주었고, 별도의 경제활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출정을 할 때도 막사에 스승을 모셔 학문을 닦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그의 성격과 행실이 조조의 신임에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 번은 다른 장수들은 모두 위나라의 관직을 받았는데, 하후돈만 한나라의 관직에 있었던 일이 있다고 한다. 당시는 아직 한나라 시대로 위나라보다 한나라의 관직이 더 높은 것이었는데, 하후돈은 이는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면 조조에게 위나라 관직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고 한다. 조조가 이때 넌지시 하후돈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관직이 어디 소속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을 하였으나, 그럼에도 하후돈이 계속 위나라의 관직을 청해 결국 위나라의 전장군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평소 권모술수에 능했던 조조의 성격으로 봤을 때 조조가 하후돈의 마음을 떠보고 하후돈이 의심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러한 행위를 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조조가 그만큼 하후돈을 믿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후돈이 특별취급받기 싫다고 요구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진상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후돈의 충성심만큼은 진짜였던 것 같은데, 220년 조조가 사망하고 위왕의 자리를 이은 '조비'는 하후돈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였지만, 그는 조조가 죽은 지 몇 달 후에 그 뒤를 따르듯 사망하였다고 한다. 조비도 이를 애통해해서 흰 상복을 입고 업성의 동쪽 성문까지 나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