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원수에게 의탁할 수 밖에 없었던 「하후패」

반응형

초상화

촉한과 원수진 하후패

'하후패'(夏侯霸)는 중국의 후한말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패국 초현 출신이며, 자는 '중권'(仲權)을 썼다. 위나라의 공신가문인 하후씨 일족이자, 맹장 '하후연'의 차남으로 어렸을 적부터 상당히 좋은 환경에서 자랐을 것으로 보인다. 하후패는 성장한 이후에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면 군사 경험을 쌓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하후연이 활약한 관서 지역인 양주와 옹주 일대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촉한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219년에 있었던 '한중 공방전'에서 하후연과 동생인 하후영이 전사하는 등의 일을 겪으면서 더 극심해졌을 것이다. 이후 220년에 편장군으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는데, 하후연의 후계자로 상당히 기대된 것 같고, 230년에 '조진'을 따라 촉 정벌에 참여하였으며, 이때 선봉을 맡아 자오도를 따라 진군하였다고 한다. 촉한에서도 하후패의 출전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 같은데, 당시 한중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강유'는 하후패가 선봉으로 출전한 것을 알게 되자 즉시 병사들을 보내 역공하기도 하였다. 이는 하후패의 이름을 이용하기 위한 전술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는 하후연이 사망한 지 10여 년 밖에 되지 않았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전투가 일어난 곳도 같은 한중 지역이었기 때문에, 전쟁 초기에 하후패를 쓰러트려 기세를 꺾을 의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역습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하후패는 녹각 사이에서 몸소 전투를 벌여야 할 정도로 위기를 맞았는데, 다행히 늦지 않게 구원병이 도착하면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하후패는 그야말로 아버지의 최후를 그대로 따라가게 될 뻔한 것인데, 이 일화를 보면 하후패도 아버지처럼 선두에 나서서 솔선수범하는 용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직접적으로도 촉한과의 악연을 쌓기 시작한 하후패는 이후 정촉호군(토촉호군)으로 임명되어 정서장군인 '하후현'의 휘하에서 촉한을 상대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옹주와 양주 일대의 강족과 저족 등의 이민족들을 회유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우장군에 박창정후로 봉해지는 등 생전에 아버지가 하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게 된 셈이다. 247년에는 옹주와 양주에서 이민족들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촉한에 호응했는데, '곽회'와 함께 이를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비록 많은 이민족들이 이반하여 촉한의 땅으로 떠났으나, 영내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또 기록에는 없으나 '조상'과 하후현이 중심이 되어 진행한 군사작전들에는 대체로 참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원수에게 의탁하다

하후패는 위나라에서 명문 하후씨의 일족이자, 당시 실권자였던 조상의 일파인 하후현 휘하에 있던 만큼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을 것인데, 249년에 '고평릉 사변'이 일어나면서 이러한 환경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조상을 비롯한 중앙의 실권자들은 사마씨에 의해 완전히 숙청되었고, 상관인 하후현은 정서장군에서 해임되어 중앙으로 소환되었으며, 여기에 더해 후임 정서장군으로는 하후패와 사이가 좋지 않은 곽회가 부임하게 된다. 사실 당시의 사마씨들이 어떠한 생각으로 이러한 인사를 단행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안 그래도 요주의 인물로 찍히게 된 하후패는 곽회가 부임하게 되면 어떤 트집을 잡을지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고, 궁지에 몰린 그는 결국 수하들을 이끌고 원수인 촉한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때 하후패는 하후현에게도 같이 망명할 것을 권했다고 하는데, 하후현은 이를 거절하였으며, 결국 이후 '사마사'에 의해 죽게 된다. 그러나 생각 외로 위나라에 남은 하후패의 가족들은 온전한 생활을 계속 누릴 수 있었는데, 이에 대해 위험인물이자 실력자인 하후패가 없어져서 반대로 주목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찌 되었던 하후패의 위나라를 탈출하는 여정도 쉽지는 않았는데, 그는 도중에 길을 잃고 식량이 떨어지자 타고 왔던 말을 죽여야 했으며, 이후 도보로 이동하다가 다리까지 다쳐 바위 아래 누워 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촉한에서 보낸 사자를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 사자는 하후패가 위나라를 떠난다는 소식을 알게 된 강유가 보낸 자들이라고 한다. 어찌 되었든 촉한에서 하후패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는데, 그를 만난 '유선'은 먼저 하후연이 사망한 것이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음을 넌지시 표현한 후에, 황후인 장씨가 하후패의 친척인 하후씨의 딸인 것을 들어 한 가족임을 표현하였다. 이때 하후패는 촉한에서 거기장군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당시 위장군이었던 강유보다도 높은 직책이다. 이는 사실 하후패 본인의 능력보다는 하후씨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크기도 했는데, 본래도 하후씨는 한나라의 공신가문이었으며, 적국인 위나라의 공신이 촉한으로 망명 왔다는 것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의 의미도 있긴 했지만, 하후패는 촉한에서 위나라에서 받았던 것보다 더 큰 대접을 받은 것이다.

반응형

강유의 북벌과 최후

하후패는 촉한에서 받은 환대에 마음이 움직인 것인지 이후 촉한의 장수로서 위나라를 공격하여 공을 세우는데, 그는 강유를 따라 북벌에 계속참여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명확히 기록된 것은 255년에 있었던 북벌에 참전한 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실제로 하후패가 여러 차례 북벌에 참여하였는지, 아니면 한차례만 참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가 가지고 있던 위나라군에 대한 지식과 양주와 옹주에 대한 정보는 촉한에서 요긴하게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하후패가 북벌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서술된 바가 없으나, 이때의 북벌에서 촉한이 큰 성과를 낸 것을 생각해 보면 상당한 역할을 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시기 이미 하후패는 환갑이 넘은 상당한 고령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면 직접 부대를 지휘하거나 전투에 참여하기보다는 전략적인 부분에서 조언을 했을 수도 있다. 불명확한 부분은 이것뿐만이 아닌데, 이후 하후패에 대해 서술된 기록이 없으며, 260년에 시호가 주어졌다는 이야기만 있다. 이점에서 볼 때 하후패는 255년 북벌 중, 혹은 이후에서 260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알 수 없다. 259년에 '요화'와 '장익'이 거기장군의 직을 좌와 우로 나뉘어 맡게 되는데, 이는 전임인 하후패가 사망했기 때문으로 생각되지만, 역시 이에 대한 기록이 없어 추정에 불과하다. 이처럼 중국의 삼국시대 말기의 인물들은 기록이 부족한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거나 관심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기도 하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