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영국 개신교 국가의 가톨릭 왕, 게으른 왕 「찰스 2세」
- 역사
- 2023. 11. 5.
잉글랜드 연방의 붕괴와 왕정복고
'찰스 2세'는 1630년 영국 왕인 '찰스 1세'와 프랑스 출신의 왕비 '앙리에타 마리'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자 마자 콘월과 로세이의 공작이 되었으며, 얼마 후 정식 후계자로 웨일스 왕자의 지위에 올랐는데, 아버지인 찰스 1세의 실정으로 1639년 '주교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 지위가 점점 위태로워 졌다. 찰스 1세는 통치하면서 잉글랜드 의회와 반목을 이어갔는데, 마침내 스코틀랜드와도 불화를 일으켰고, 사태는 점점 커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사이에 혼란을 불러와 '삼왕국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찰스 2세도 후계자로서 15세 무렵인 1645년부터 명목상 지휘관으로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에는 이미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왕당파 세력이 상대인 의회파에 의해 밀리고 있던 시기로, 곧 신변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영국 영토인 실리 제도와 저지섬으로 이동하였다가, 결국 국외로 나가 프랑스로 피신했던 어머니와 합류하게 된다. 여기서 찰스 2세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노력한 것 같지만, 그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찰스 1세는 1649년에 올리버 크롬웰과 그 일파에 의해 처형되게 된다. 이후 올리버 크롬웰은 공화제인 잉글랜드 연방을 만들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도 그 안에 포함시키려고 하였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어디까지나 올리버 크롬웰과 잉글랜드 의회의 독단에 의한 것으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찰스 2세를 스코틀랜드의 정식 왕으로 인정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찰스 2세는 1650년 프랑스를 떠나 스코틀랜드를 향했는데, 이때 아일랜드를 점령 중이던 올리버 크롬웰도 이러한 움직임에 위기를 느끼고 잉글랜드 본토로 귀환하였다고 한다.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에서 대관식을 올려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올리버 크롬웰과의 전투에서 패해 다시 프랑스로 쫓겨나게 되었고, 잉글랜드 연방은 1653년 삼왕국 정쟁을 종식시키고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통치하에 두었다. 그럼에도 찰스 2세는 자신의 통치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는데, 이 시기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은 이미 올리버 크롬웰의 정부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 스페인까지 가서 도움을 청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올리버 크롬웰은 '호국경'의 자리에 올랐으며, 공화제를 표명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왕이나 다름 없는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었고, 1658년 그가 사망했을 때는 아들 '리처드 크롬웰'에게 호국경의 자리를 물려주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리처드 크롬웰은 아버지처럼 실적이나 실력이 있는 자가 아니었고,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군과 반목하게 되면서 축출되게 된다. 잉글랜드 연방은 수립된지 10여년 만에 큰 위기를 맞게 된 셈인데,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스코틀랜드에 있던 '조지 멍크'가 찰스 2세와 연락하여 왕정 복고를 준비하게 된다. 멍크는 본래 왕당파였으나 의회파로 전향했던 인물인데, 올리버 크롬웰에 협력하여 상당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지만, 혼란이 시작되자 다시 편을 바꾼 것이다. 1660년 멍크는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떠나 잉글랜드로 향했고, 런던을 장악하고 의회를 소집하여 찰스 2세가 다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
브레다 선언
찰스 2세는 잉글랜드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서 멍크와 의회의 몇가지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는데, 그가 네덜란드의 브레다에서 이를 발표했기 때문에 '브레다 선언'이라고 한다. 기본적인 내용은 의회를 존중하고, 혁명에 관련되 자들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인데, 사실 잉글랜드의 귀족들과 의원들은 이러한 약속 없이는 찰스 2세를 받아 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런던에 도착한 찰스 2세는 의회를 통하여 '망각의 법'을 제정하였는데, 이를 통해 수 많은 이들이 사면 받을 수 있었지만, 후에 13명이 처형당하 였으며 일부사람들은 종신형이나 공직에서 제외되는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또 올리버 크롬웰 등 이미 사망한 주범들에 대해서는 시신에 대하여 처벌을 하기도 하였다. 브레다 선언에는 종교의 자유에 대한 부분도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의회에 의해 인정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에서 분쟁이 있었다고 한다. 찰스 2세는 종교의 자유에 대한 부분에서는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데, 잉글랜드 연방 당시에 영국에서는 청교도들이 득세하였고, 이 때문에 같은 개신교인 성공회와의 사이에서 불화가 있었고, 이것이 불씨가 되어 왕정복고 이후 영국 국교인 성공회가 다시 득세하면서 주도권이 바뀌게 된 것이다. 또 개신교에 의한 가톨릭에 대한 차별도 계속되긴 하였으나, 당시 영국은 개신교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지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문제가 될 정도의 가톨릭 세력은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그외에도 잉글랜드 연방에서 복무한 군인들에 대한 미지급 급료를 지불하고, 필요없어진 육군을 축소하는 등 잉글랜드 연방의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찰스 2세와 의회는 과거 내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협의하였는데, 찰스 2세는 의회를 존중하고 과거 찰스 1세 때에 시행한 여러 낡은 세금 징수법을 포기하기로 하였고, 의회는 대신 찰스 2세에게 120만 파운드의 연간 수입을 보장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는 명목상 금액에 불과하였는데, 당시 영국의 재정 상태는 여전히 좋지 못 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못 미치는 금액만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찰스 2세는 상당히 호전적이었던 아버지와 다르게 의회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합의하였고, 이를 통해 의회와 왕이 서로 협력과 견제를 하는 상당히 양호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찰스 2세 본인의 성격에 의한 것도 있었겠지만, 젊었을 때의 경험과 아버지의 좋지 않은 말로를 본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흑사병과 런던 대화재
1662년 찰스 2세는 포르투갈의 공주 '카타리나 드 브라간사'와 결혼하였는데, 지참금으로 인도의 뭄바이와 지브롤터 해협의 탕헤르를 받았다. 이곳은 이후 영국의 중요한 무역거점이 되었지만, 가톨릭 신자를 왕비로 맞게 된 영국에서는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찰스 2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했을 때도 크게 문제가 됬던 부분이었는데, 그러나 사실 당시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가톨릭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 신자와 결혼하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쨌든 결국 이 결혼은 찰스 2세의 통치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였는데, 찰스 2세가 성공회를 존중하며 별다른 종교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찰스 2세와 그녀 사이에 자식이 없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후 별도로 후계자 문제로 번지게 된다. 1665년에는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벌어졌는데, 영국은 자국의 무역과 어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해협을 봉쇄하고 해외의 네덜란드 영토를 점령하는 등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의 승패는 전투와는 다른 방향에서 결정되었는데, 1665년 런던에서 흑사병이 발병하면서 영국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또 이듬해인 1666년에는 '런던 대화재'가 발생하는 등 내부에서 큰 악재가 연이어 발생하였고, 1667년 네덜란드 함대가 템스 강 하구를 장악하면서 영국이 패배하게 된다.
종교 갈등과 후계자 문제
찰스 2세가 통치하는 동안 의회와 가장 크게 부딫힌 부분은 바로 종교 문제였는데, 1672년 찰스 2세는 가톨릭을 포함하여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을 처벌하는 것을 정지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의회는 이것이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았다며 압박하였다. 또 네덜란드를 침략하는 프랑스를 돕기 위하여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역시 의회의 견제로 자금을 조달하기 힘들었고, 결국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전쟁이 종식되기 전인 1674년에 영국은 전쟁을 끝내게 된다. 이 전쟁의 명분은 네덜란드의 무역 독점에 대한 타파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이 네덜란드로 망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종교적으로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찰스 2세의 후계자 문제였는데, 찰스 2세는 많은 애인들과 사이에서 사생아들을 낳았지만, 이들은 정식 후계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가톨릭 교도인 동생 '제임스 2세'가 유력한 후계자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개신교도들 사이에서는 제임스 2세를 배제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1678년에는 '타이터츠 오츠'라는 자가 가톨릭 교도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거짓 고발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가톨릭 교도들이 찰스 2세를 암살한 후에 제임스 2세를 옹립하여 개신교를 박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거짓 고발을 하였고, 이 때문에 영국 곳곳에서 가톨릭 교도들이 심한 박해를 받았으며, 제임스 2세는 스코틀랜드로 잠시 피신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고발이 날조 된 것으로 드러나기는 했으나, 이 시기까지도 영국 내에서 가톨릭에 대한 반발이 매우 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1679년 결국 의회에서는 다음 군주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문제 삼아 가톨릭 교도는 왕위에서 제외하는 법안을 제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책은 상당한 논란이 되었던 것 같은데, 의회는 법안에 찬성하는 '휘그당'과 반대하는 '토리당'으로 나뉘어 논쟁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찰스 2세는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결국 1680년과 1681년에 두 차례나 의회를 해산하는 등 강경책을 내어놓았고, 이후 다시 의회를 열지 않게 된다. 이런 찰스 2세의 강경책은 당연히 부작용을 불러왔는데, 1683년에는 개신교 세력이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를 암살하려는 '라이 하우스 음모'를 기획하기도 하였으나 불발로 끝났다. 여담이지만 토리당과 휘그당은 이후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 정치하는 정당 정치가 발전한 것으로 여겨지며,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는 미국의 정치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개신교 국가의 가톨릭 왕
찰스 2세는 1685년 5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고, 개신교도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2세가 그 뒤를 이었다. 이후 사생아들 중에 장남인 몬머스의 공작 '제임스 스콧'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되기도 하였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가문을 잘 유지하여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공작가가 남아있다고 한다. 또 찰스 2세는 생전에 성공회 신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가톨릭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죽기 직전에 사제에게 몰래 자신이 가톨릭 신자였다며 고해성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영국의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 2세가 영국의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시도 하였지만, 실제로는 이미 가톨릭 신자가 왕으로 있었던 셈이다. 그는 의회를 신임하여 대부분의 정책을 맡겼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게으른 왕'(Lazy King)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고 하며, 한번은 그가 취미로 설계한 함선의 진수식에서 시종에게 자신의 설계능력을 자랑하자, 시종이 본업보다 훌륭하다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외에도 예술과 과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는데, 영국의 '왕립학회'가 창립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아이작 뉴턴'이 이 시대 사람이기도 하다. 찰스 2세의 통치 시기에 '인신 보호'에 대한 법률이 통과되어 유죄가 인정되기 전에 죄인의 권리가 보장 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기도 하였는데, 이처럼 이 시기는 아직 왕이 통치하는 중세 국가처럼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근대화를 위한 사회 발전이 차근차근 마련되고 있는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