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영국 의회에 의해 처형된 왕 「찰스 1세」
- 역사
- 2023. 10. 27.
아버지와 다른 아들
'찰스 1세'는 1600년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1603년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여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런던으로 이주하였다. 본래 찰스 1세는 차남으로 왕위와는 한발 멀리 있었는데, 1612년 형인 '헨리 프레더릭'이 18세의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면서 후계자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영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한 번에 통치하는 첫 번째 왕이었으며, 그 안에서 '종교 개혁'으로 갈등을 빚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사이를 중재해야 했고, 마지막으로 의회에 맞서 왕권을 강화하여 전제군주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제임스 1세가 왕이었음에도 의회와 권력을 두고 다투었다는 것은 조금 이상해 보이기도 하는데, 영국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의회가 어느 정도 실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부 평민들도 의회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도 하였고, 특히 이 시기에는 '젠트리'라고 불리는 부유층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과 의회가 대립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었는데, 왕은 권위와 증세를 원하였고, 반대로 의회는 자신들의 권력 증대와 더 적은 세금 부담을 원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제임스 1세는 22년간 통치하면서 4번밖에 의회를 열지 않을 정도로 상당한 마찰을 겪었으나, 대신 다른 부분에서 유연하고 관대한 태도를 취하면서 왕으로서의 권한을 계속 존중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625년 그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찰스 1세는 의회와 마찰을 빚은 것은 물론, 종교계와 스코틀랜드와도 마찰을 빚는 등 아버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서서히 고립되게 된다.
적을 만드는 처세술
찰스 1세는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독실한 신자였다고 하는데,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와의 결혼을 추진하면서 국내 종교계와 불화를 겪기 시작하였다. 찰스 1세는 이 혼인이 의회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을 예상하여 아예 의회를 해산시키고 멋대로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의회를 무시하는 태도였고, 즉위하자마자 의회와의 갈등도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앙리에트 마리는 개신교의 방식이라는 이유로 찰스 1세의 대관식에도 불참하였으며, 이후로도 그 이유로 찰스 1세와도 개인적으로 불화를 겪게 된다. 찰스 1세가 이 결혼을 통해 어떤 정치적 이익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임스 1세로부터 총애를 받은 버킹엄의 공작 '조지 빌리어즈'의 의향이 많이 반영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제임스 1세 시절부터 추진했던 대외적인 중립 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와 정 반대되는 행동도 하였는데, '30년 전쟁'에서 팔츠 선제후국에 있던 누나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를 돕기 위해 의회에 스페인과 전쟁을 위한 지원을 요구하여 예산을 받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의회는 스페인과 전면 전쟁을 하기보다는 사략 활동을 하는 방식을 선호하였고, 찰스 1세가 요구한 금액의 극히 일부분만을 책정하였다고 한다. 또 의회는 국왕의 권한이었던 '해운조세권'에 대해서도 의결을 미루었는데, 결국 찰스 1세는 됭케르크 인근의 해적을 소탕한다는 구실을 들어 의회를 건너뛰고 해운조세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나마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는데, 조지 빌리어즈가 함대를 이끌고 스페인의 카디스를 기습 공격하였지만 막대한 피해만 입고 실패하였다. 또 이 결과로 조지 빌리어즈가 의회에 의해 탄핵될 지경에 이르자,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여 그를 보호하려고 하였는데, 이런 식으로 찰스 1세는 시작부터 의회와 심하게 갈등을 겪었고, 대신 편법을 통해 세수를 확보하려고 하면서 인심을 계속 잃게 된다. 한편 종교계에서도 '칼뱅주의'를 반대하는 신학자 '리처드 몬터그'를 지지하는 등 주요 개신교 분파였던 '청교도'들과도 갈등을 겪었으며, 프랑스 라로셸의 개신교도인 '위그노'들을 구출하도록 조지 빌리어즈를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가면서 국왕이 일부로 개신교도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다. 1628년에는 의회가 찰스 1세의 편법적인 세금 징수를 막기 위해 '권리청원'을 선언하기도 하였는데, 찰스 1세는 한번 동의하기는 하였으나 곧 다시 자신의 징수 권리를 주장하였다. 몇 달 후 조지 빌리어즈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찰스 1세는 이 사건으로 매우 우울해하였지만, 앙리에트 마리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으며, 의회와의 관계도 다소 회복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상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찰스 1세와 의회는 서로 양보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입장만을 고수하였고, 이러한 기조가 바뀌지 않고 계속되면서 점차 파국을 향해가게 된다. 반면 종교계 쪽은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는데, 찰스 1세의 행동보다는 그 해석이 앞서가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의회나 혹은 다른 찰스 1세의 정적들에 의해 다소 과장된 면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전히 종교적인 부분에서도 찰스 1세는 자신의 정책만을 고집하였고, 이러한 적을 만드는 처세술은 결코 좋은 결과를 불러오지 못했다.
대립과 확산
1629년 재개된 의회에서 찰스 1세는 다소 유화적인 태도로 바뀌었으나, 해운조세권의 문제로 하원과 갈등을 겪었고, 하원이 권리청원에 따라 이를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하자 의회를 해산시키게 된다. 그러자 하원 의원들이 찰스에 대해 거세게 비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은 세금 문제와 종교 문제를 엮어 찰스 1세를 비난하였고, 이에 분노한 찰스 1세가 9명의 의원을 체포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이때 찰스 1세는 사실상 의회와 완전히 갈라설 생각을 한 것 같다. 이후 11년간이나 의회를 열지 않았으며 통치하였지만, 이를 위해 적성국이었던 스페인, 프랑스와 평화를 유지해야 했으며, 각종 편법을 이용하여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래도 아직까지 완전히 파국으로 치달은 것은 아니었는데, 의회는 어쨌든 찰스 1세의 왕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였으며, 찰스 1세도 세금 신설이나 세율 인상 등 전통적으로 의회의 동의가 필요한 행위에 대해서까지 침범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스 1세의 편법적인 세금 징수는 결코 환영받는 행위가 아니었고, 그 행위는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여론이 안 좋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찰스 1세는 이러한 문제를 확산시켰는데, 그는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고 한참이나 지난 1633년에야 에든버러를 방문하여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게다가 여기서 또 문제를 일으켰는데,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주류인 장로교의 방식이 아닌 잉글랜드의 성공회 방식으로 대관식을 진행하여 인심을 잃게 된다. 또 스코틀랜드의 교회들을 성공회로 바꾸려는 시도를 하였는데, 그 결과 스코틀랜드는 반란을 일으켜 '주교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1638년 스코틀랜드의 교회와 의회는 본격적으로 반란을 선포하였고, 찰스 1세는 이듬해인 1639년에 군대를 출정시켰는데, 잉글랜드의 의회는 해산 중이었기 때문에 찰스 1세 혼자의 힘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결국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패배하였고, 찰스 1세는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의회를 강제로 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극심한 의회와의 갈등
1640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지불해야할 배상금을 얻어내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였지만, 그에게 협력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의회에서는 오히려 그가 그동안 집행한 편법적인 세금에 대해서만 논의하려고 하였다. 결국 찰스 1세는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의회를 해산해 버렸는데,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스코틀랜드에서는 배상금 지급을 압박하기 위해 다시 진군을 시작하였고, 이렇게 시작된 제2차 주교전쟁에서도 찰스 1세가 패배하면서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다. 이후 새로 열린 의회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하였는데, 먼저 왕이 의회를 함부로 해산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과 왕의 의사와 관계없이 의회를 소집하는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찰스 1세의 측근들을 하나하나 파면시켰는데, 그 와중에 아일랜드의 총독인 '스트래퍼드 백작'이 처형되었고, 이를 계기로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사실 이때 의회에서 스트래퍼드 백작을 반역 혐의로 기소하였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선고되었는데, 찰스 1세가 그를 구명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의회는 재판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그를 처형해 버렸다. 이것은 의회에 어떠한 대의명분이 있었다기보다는 구성원인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단체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으로, 1641년 찰스 1세는 이러한 의회의 요구들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동시에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과 함께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할 준비를 하게 된다. 아일랜드의 반란의 경우 가톨릭 세력과 아일랜드 토착 세력이 잉글랜드의 개신교 세력을 위협으로 받아들여 일으킨 반란이었는데, 그들이 잉글랜드 의회에 대항한다는 것을 표명하고 찰스 1세에 대한 충성을 표방했기 때문에, 찰스 1세가 이러한 움직임에 편승하려고 시도하였을 것이다. 의회는 이에 대해 '대간주'를 발표하여 찰스 1세의 실정을 정면으로 비난하였으며, 찰스 1세와 앙리에트 마리가 가톨릭 세력을 옹호하려고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개신교 세력의 지지를 얻으려 하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찰스 1세는 문제가 되는 5명의 의원을 체포하려고 시도하였는데, 병사들을 이끌고 의회를 급습하였으나 그들의 신병을 확보하는데 실패하였고, 결국 찰스 1세와 잉글랜드 의회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잉글랜드 내전
의회는 재빠르게 런던을 장악하였고, 찰스 1세는 윈저성으로 거쳐를 옮기고 아내와 아이들을 프랑스로 피신시켰다. 이후 두 세력은 본격적으로 무장을 시작하였는데, 찰스 1세는 왕의 권한으로 전통적인 징집방식을 택한 것 같고, 의회는 모병을 통해 민병대를 결성하였다고 한다.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초반에는 찰스 1세의 왕당파가 우세한 듯하였지만, 개전 후 몇 년 같은 어느 쪽도 결정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전쟁은 교착상태를 유지하였다. 1644년에 찰스 1세는 별도로 의회를 소집하기도 하였는데, 여전히 하원에서는 별다른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 사이 '마스틴 무어 전투'에서 의회파가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때 '올리버 크롬웰'과 그가 지휘하는 '신형군'(철기대) 큰 활약을 하였다. 이듬해인 1645년에도 '네이스비 전투'에서 신형군을 주력으로 하는 의회파가 선전하였고, 이후 왕당파가 패배를 거듭하면서 찰스 1세는 상대적으로 온건해 보이는 스코틀랜드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는데, 스코틀랜드가 이 전쟁에 참전한 목적은 본래부터 이전에 받기로 한 배상금 때문이었고, 잉글랜드 의회가 긴 협상 끝에 10만 파운드의 배상금과 추가적인 금액의 지불을 약속하자 그대로 찰스 1세를 넘겨주게 된다.
처형당한 왕
결국 찰스 1세의 신병은 잉글랜드 의회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의회 쪽도 이권을 둘러싸고 내부 갈등이 있었고, 한동안 그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여러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이것이 그의 최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찰스 1세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나 프랑스로 탈출하려고 하였지만, 도중에 아일오브와이트주의 지사에게 연금되고 고발되었으며, 스코틀랜드와 접촉하여 잉글랜드를 공격하게 획책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의회파가 전투에 승리하면서 이 시도도 허사가 되었다. 이러한 찰스 1세의 시도가 악영향을 미친 것인지, 아니면 의회파에서 처음부터 찰스 1세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1648년에 열린 의회에서 찰스 1세와 협상을 지속해야 한다는 의견이 129대 83으로 우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버 크롬웰을 필두로 한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올리버 크롬웰은 먼저 아일오브와이트주의 지사를 해임시키고 투옥하여 찰스 1세의 신병을 확보하였으며, '프라이드의 숙청'을 통해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배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올리버 크롬웰이 지휘하는 하원 의회는 찰스 1세를 반역죄로 기소하도록 요청하였는데, 상원에서는 이를 거부하였으며, 법원에서도 왕을 기소하는 행위 자체를 불법으로 판단하였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멋대로 새로운 법을 만든 후에 자신들에게 동의할 것으로 생각되는 135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특별법정을 설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조차 파행을 겪었는데, 다수의 의원들은 사임하거나 참석을 거부하였고, 1649년에 열린 찰스 1세를 재판하는 법정에는 68명 밖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찰스 1세의 사형 집행에 서명한 의원은 그중에서도 59명 밖에 되지 않았고, 심지어 잉글랜드 내란에서 의회파의 군대를 지위한 '토머스 페어팩스' 조차 공개적으로 서명을 거부했다고 한다. 결국 찰스 1세는 처형되어 최후를 맞았으며, 영국은 '잉글랜드 연방'으로 공화제를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얼마 가지 못하였는데, 정권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은 '호국경'이 되어 권력을 전횡하며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행세를 하였고, 그가 사망한 후에 호국경의 지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기까지 하였다. 이후 곧 잉글랜드에서는 왕정복고가 일어나게 되었고,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다시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