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영국 청교도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은 독재자 「올리버 크롬웰」
- 역사
- 2023. 10. 30.
젠트리 계급
'올리버 크롬웰'은 1599년에 영국의 헌팅던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평민으로 '젠트리' 계급이었다고 한다. 젠트리는 귀족이 아닌 평민 중에서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와 재산이 있는 이들을 부르는 말인데, 통상적으로 중산층 정도로 평가되는 유산계급인 '요먼'과는 달리 사회 상류층으로 평가된다. 당시 영국 사회는 상당히 폐쇄적인 계급사회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회적 지위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요먼으로 취급받았으며, 어떤 지위와 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젠트리와 귀족은 따로 구분되었다. 크롬웰의 집안은 본래 양조업자인 윌리엄 집안이었는데, 올리버의 고조부인 '모건 앱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의 총리였던 '토머스 크롬웰'의 누이인 '캐서린 크롬웰'과 결혼하면서 윌리엄과 크롬웰의 성을 혼용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점차 크롬웰로 성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또 이때 집안이 크게 부흥하였는데, 당시 헨리 8세가 '수장령'을 시행하면서 수도원들이 해체되었고, 이 과정에서 모건은 토머스의 지위를 이용하여 수도원들의 재산 처리 과정에 개입할 수 있었다. 이후 크롬웰 집안은 막대한 재산을 이용해 '헌팅던셔'에서 사회적 지위를 쌓아 확고한 젠트리 계급으로 거듭날 수 있었지만, 그 재산은 많은 자식들에게 분배되면서 줄어들었고, 올리버의 아버지에게는 간신히 젠트리 계급을 유지할 정도의 재산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젠트리 계급에 대한 이야기로, 올리버는 어린 시절부터 충분히 풍족한 생활을 누렸을 것으로 생각되며, 헌팅던의 문법학교를 마친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에서 공부하였다. 하지만 올리버는 학업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는데, 1617년 아버지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올리버가 런던에서 법정 변호사로 활동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에 대해 명확히 남아있는 기록은 없으며, 이때 그는 통상적으로 집안일을 돕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을 것으로 보인다.
잉글랜드 의회의 의원
올리버는 1620년에 런던에서 '엘리자베스 부르시에'와 결혼하였는데, 부르시에 가문은 에식스에 거점을 둔 부유한 가죽 상인으로 그녀 역시 젠트리 계급의 청교도인이었다. 이때부터 올리버는 본격적으로 크롬웰과 부르시에 가문의 힘을 이용하여 여러 정치적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치가들 뿐만 아니라 여러 상인과 귀족들과도 커넥션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1628년에는 헌팅던에서 의원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올리버의 의원 생활은 처음부터 별로 좋지 못했는데, 그는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신적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이며, 정치적 분쟁에 휘말려 조사를 받는 등 고난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듬해인 1629년에 '찰스 1세'가 의회를 해산하였고, 그 후 11년간이나 의회가 열리지 않게 된다. 올리버도 이때 재산을 대부분 매각하고 헌팅던을 떠나 세인트아이브스로 이사하였는데, 정치적 압박에서 벗어나 한동안 농장에서 가축을 키우며 생활하였고, 경제적 수준이 상당히 떨어져서 거의 요먼 계급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커다란 종교적 신념을 얻기도 하였는데, 올리버는 지난날의 일들을 자신의 잘못된 종교관으로 인해 겪은 고난으로 생각하고, 상당히 독실한 청교도로 거듭난 것으로 보이는 생각들을 서신을 통해 드러냈다고 한다. 1636년에는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풍족해졌는데, 올리버는 외삼촌으로부터 십일조 징수원의 지위를 상속받아 큰 수입을 얻을 수 있었고, 이러한 경제적인 여유를 바탕으로 다시 런던과 에식스에서 정치적・종교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한편 1639년 찰스 1세의 실정으로 스코틀랜드에서 '주교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찰스 1세가 이를 수습하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하면서 1640년 올리버는 케임브리지의 의원으로 의회에 복귀하였으며 런던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 그러나 이 의회는 불과 3주 만에 다시 찰스 1세에 의해 해산되었는데, 이러한 짧은 임기 때문에 '단기의회'라고 불린다. 단기의회는 본래 주교 전쟁에서 진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 지불해야 할 배상금을 얻기 위해 연 의회였으나, 의원들은 의회가 열리지 않은 11년간의 찰스 1세의 전횡에 대해 먼저 따지길 원했고, 이에 분노한 찰스 1세가 의회를 다시 해산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해 말에 다시 의회가 열렸는데, 의원들은 가장 먼저 의원의 임기를 설정하는 등 함부로 의회를 닫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하였고, 이러한 이유도 있어 이 의회가 165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에 구분하는 의미로 '장기의회'로 불린다. 어찌 되었든 의원들은 의회의 성격이나 상황보다는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에 대한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올리버도 자신의 정치적 인맥을 공고히 하기 위한 활동에 열을 올렸으며, 종교적으로는 양심에 따른 종교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종교적 자유는 어디까지나 개신교, 특히 청교도에 대한 것으로 가톨릭이나 그 외의 종교에 대해서는 근절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잉글랜드 내전
주교 전쟁에서 패배한 찰스 1세는 장기의회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지만, 장기의회는 찰스 1세의 배상금에 대한 요구를 들어주기는커녕,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며 방해가 되는 찰스 1세의 측근들을 탄핵하는 등 독선적인 모습만을 보여주었고, 이 와중에 찰스 1세의 측근 중 한 명이었던 잉글랜드 총독이 처형되면서 잉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장기의회는 책임을 모두 찰스 1세에게 돌리려고 하였으며, 찰스 1세가 가톨릭을 옹호하려고 한다며 개신교들을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신변에 위협을 느낀 찰스 1세는 이러한 행위에 책임이 있는 5명의 의원을 구속하려고 시도하였는데, 그가 병사들을 이끌고 의회에 난입하면서 사실상 내전이 시작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의원들을 체포하는데 실패한 찰스 1세는 런던을 빠져나가 윈저성에서 지지세력을 모았고, 장기의회는 재빠르게 런던을 접수한 후에 병사를 모집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왕당파가 기존의 징병제도에 기반하여 병력을 모은데 비해, 의회파는 모병을 통해 모집하여야 했기 때문에 의원들은 지속적으로 종교적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이를 통해 개신교도, 그중에서도 특히 청교도들이 많이 합류하게 된다. 내전 후에 정권을 잡는 올리버가 청교도였던 것까지 포함하여, 이러한 이유로 잉글랜드 내전을 청교도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642년 내전이 벌어지자 올리버도 의회파로 참전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별로 기병대를 모아 참전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고, 1643년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내전 초기에는 왕당파가 우세하였으며, 그 이후로는 서로가 서로를 압도하지 못하고 지루한 소모전이 계속되었는데, 올리버는 그중에서도 '게인스버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큰 성과를 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까지 올리버는 제대로 된 군사경험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사실 올리버가 특출 난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고, 그가 군공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요소에서 찾아야 된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당시 잉글랜드 내전에 참전한 군대는 왕당파나 의회파나 사실상 민병대나 다름없는 조직이었는데, 올리버가 지휘한 기병대는 상당히 규범이 잡힌 부대였다고 한다. 이는 올리버가 독실한 청교도였던 것에 기인해 해석해 볼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부대를 엄격한 규율로 통제하여 상대적으로 느슨한 다른 부대에 비해 훈련도가 높았고, 지휘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전장을 이탈하거나 약탈을 일삼았던 다른 부대에 비해 전투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올리버는 이 공으로 아일오브일리의 지사가 되었으며 대령으로 승진할 수 있었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훈련도가 높은 '신형군'(철기대)을 조직하게 된다. 1644년에는 이러한 신형군의 활약으로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의회군이 대승을 거둘 수 있었지만, 위계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수평적 조직이었던 의회파는 내부 분열을 겪게 된다. 의회파에 속해있는 청교도들은 크게 '수평파'와 '독립파'의 두 개 파벌로 나뉘어 있었으며, 의회파에는 그 외에도 스코틀랜드에 기반을 둔 장로교 중심의 '언약도'와 찰스 1세의 전횡에 반대하는 성공회나 귀족들까지 속해 있었기 때문에 지휘체계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군사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의회의 지위나 귀족 지위 등을 이용하여 지휘관을 맡고 있기도 하였고, 1645년 의회는 이러한 비효율적인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의원과 지휘관은 서로 겸임하지 못하도록 법을 통과시키기도 한다. 이는 군사작전을 더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함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로서 군부와 의회가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심지어 올리버는 이에 대해 예외로 취급되기까지 한다. 또 올리버와 한편이었던 '토머스 페어팩스'는 그의 도움을 얻어 임기제로 신형군의 사령관을 맡으면서, 기간제이기는 하나 지휘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올리버는 부사령관이자 기병대의 대장으로 중장이 되어 사실상 의회군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찰스 1세의 처형과 정권 장악
1645년 '네이스비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의회군은 완전히 승기를 잡을 수 있었고, 이후 왕당파는 연패를 거듭하면서, 1646년 찰스 1세는 저항을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온건하다고 판단한 스코틀랜드에 항복하게 된다. 내전이 종료된 이후에 올리버는 한 달 정도 병으로 의회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 사이 의회에서는 내전 종식으로 유지가 필요 없어진 신형군의 해산, 스코틀랜드에 주교 전쟁에 대한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과 찰스 1세에게 개신교인 장로교를 인정하도록 하는 것을 요구하는 조건으로 복위하는 내용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당연히 신형군을 주도하고 있었던 청교도들에게 불만을 가져왔는데, 여기에 더해 의회가 신형군에 대한 급료 지급을 미루면서 일부 급진파들이 찰스 1세가 구금되어 있던 저택을 습격하여 그의 신병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이때 올리버를 중심으로 한 청교도 세력은 행정부의 권한에 대한 견제나 정기적으로 열리는 의회 등 여러 현안을 담은 헌법을 만드려고 시도했다고 하는데, 결국 자신들 내에서의 의견도 조율하지 못하고 합의에 실패하게 된다. 그사이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의회와 접촉하여 장로교를 허용하겠다는 조건으로 구명을 요청하였고, 1648년 스코틀랜드군과 일부 왕당파의 잔당에 의해 제2차 잉글랜드 내전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상황은 찰스 1세에게 별로 좋지 못하였는데, 신형군은 임금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의회의 편에서 싸웠고, 결국 두 번째 내전에서도 의회파가 승리하면서 찰스 1세의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게 된다. 혹자들은 이러한 찰스 1세의 행동이 더욱 안 좋은 결과를 불러왔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왕권뿐만 아니라 목숨도 위협받는 상태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찰스 1세의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당연히 취할 수 있을 만한 행동이기도 하다. 또 그의 신병을 인수하고 있던 의회군이 오랜 기간 상당히 느슨하게 관리했다는 점에서 찰스 1세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한 것 같다. 어찌 되었든 올리버와 청교도 세력은 이 모든 책임을 찰스 1세에게 떠넘기기로 결정하였는데, 그들은 '프라이드의 숙청'을 일으켜 자신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의원들을 장기의회에서 축출하여 '잔부의회'를 구성하게 된다. 이후 찰스 1세를 처형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동의할 것으로 판단되는 135명의 사람들을 추려 특별법정을 꾸렸는데, 그중에서도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많아 결국 68명만 참석했다고 한다. 사실상 시작되기도 전에 처형이 결정되어 있던 이 재판에서 그나마도 동조하지 않는 인원들이 있었는데, 최종적으로는 59명만이 재판 결과에 서명하였고, 내전 동안 의회군을 이끈 토머스 페어팩스는 공개적으로 서명을 거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권은 이미 올리버와 신형군의 군부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1649년 찰스 1세는 결국 처형되었다. 이후 올리버는 '잉글랜드 연방'을 선포하고 잔부의회를 이용하여 전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내전 이전부터 형성했던 정치적 인맥을 이용하여 여러 의원들에게 복귀를 요청하였지만, 이에 응한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침공
영국은 현대는 하나의 나라로 받아들여지지만, 당시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의 각각의 왕국으로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자 아일랜드의 군주였던 찰스 1세가 사망하면서 각각의 왕좌는 사실상 공석이 되게 된다. 또 올리버와 잔부의회는 잉글랜드에서의 통치권을 가질 수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갖지 못하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올리버는 이러한 사실은 몰랐거나, 혹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은데 그는 1649년 잉글랜드 연방의 당면한 과제 중 가장 시급한 것으로 아일랜드 정복을 꼽았다. 당시 아일랜드는 이전의 반란 끝에 '아일랜드 맹방'이 생겼으며, 본래 아일랜드에 살던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에 더해, 잉글랜드에서 밀려난 가톨릭 세력과 찰스 1세를 지지하던 왕당파 잔당들이 건너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올리버는 이들이 잉글랜드 연방에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전면적으로 아일랜드 침공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 내에서도 이에 대한 반발이 컸는데, 특히 그동안 긴 내전으로 인해 피로감이 쌓인 신형군들이 아일랜드 침공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들의 요구는 사실 정당한 것이었는데, 이들은 복무가 의무 되는 정규군도 아니었으며, 실제 전투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거나 정책에서 소외당하는, 말 그대로 이용만 당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사령관인 올리버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는커녕 강경진압에 나섰고, 항명을 일으킨 주모자들을 처형하거나 탈영병이 숨어있는 마을을 통째로 포격하는 등 가혹한 진압을 하였고, 체포된 탈영병 중 400여 명을 총살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올리버의 강경한 기조는 아일랜드에서는 더욱 심해졌는데, 그는 저항하는 이들은 종교나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학살하였고, 이들을 감싸는 성직자들을 살해 거나 교회를 불태우기도 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아일랜드가 완전히 정복된 이후에는 원주민들의 땅을 모두 뺏어 자신들이 나누어 가졌으며, 원주민들에게는 늪지대 같이 쓸모없는 땅만 나누어 주는 등 사실상 이후 잉글랜드에 만연한 아일랜드 차별의 기조가 만들어지는데 큰 몫을 하였고,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의 반잉글랜드 기조가 생겨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또 이러한 과정에서 올리버는 청교도를 포함한 개신교도들도 학살하였는데, 이는 그가 종교적인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고 하는 것에 비추어 봤을 때도 너무 과해 보인다. 한편 올리버가 아일랜드를 침공하는 동안 스코틀랜드에서는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적법한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선포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그는 급히 잉글랜드로 복귀하여 스코틀랜드 침공을 준비하였다.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잉글랜드 연방은 스코틀랜드에도 그 어떤 권한도 없었지만, 1650년 올리버는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였고, '던바 전투'와 '우스터 전투'에서 승리하여 스코틀랜드를 장악하는데도 성공한다.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끝낸 1651년에는 '항해법'을 반포하여 네덜란드와도 갈등을 겪었는데,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무승부에 가깝게 끝나기는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네덜란드의 무역 독점을 상당 부분 해소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도 영국과 같이 유럽에서 얼마 안 되는 개신교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이익을 위해 과감하게 공격한 것을 보면, 그는 종교적 신념보다는 젠트리 계급으로서 경제적 신념이 더 뛰어났던 것 같으며,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젠트리 계급의 지지가 필요했던 것 일지도 모르겠다. 올리버는 이후 잔부의회를 이용하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통합 정부를 구성하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논의가 길어지자 1653년 무력을 통해 의회를 해산해 버린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이 찰스 1세가 의회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호국경
올리버는 청교도들을 추려서 새로운 의회를 차렸는데, 이는 '베어본 의회'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의회 또한 올리버를 만족시킬 만큼 순조롭게 운영되지 못했는데, 이들은 종교적 문제를 두고 내부에서 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해가 가기 전에 자진 해산하게 된다. 이 시기 올리버는 '호국경'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때부터 그는 명실공히 잉글랜드 연방의 통치자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는 자신이 어디까지나 공화국의 수반으로 왕이 아니라는 것을 부각했지만, 사실상 왕이나 다른 없는 권한을 가지고 행동하였다. 사실 당시에는 공화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이라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는데, 비슷한 지위에 있었던 미국의 '조지 워싱턴'이 취했던 행동과 비교해 보면 큰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후로도 올리버는 의회라는 절차를 이용하여 명분을 얻으려고 하였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가 나오면 해산해 버리는 등 사실상 찰스 1세나 다름없는 행동을 이어갔으며, 그가 군권을 이용하여 무력으로 군부통치를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 악질적이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또 올리버는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고심했는데, 그는 귀족과 젠트리, 요먼 등으로 구성되는 신분체제를 사실상 인정하였으며, 내전동안 그에게 큰 도움을 준 요먼들의 참정권 요구를 배신하는 등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청교도들이 많이 진출한 식민지를 억압하는 등의 행위도 하였고, 잉글랜드를 15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군인들을 파견하여 지배하였는데, 동시에 열정적인 청교도들로 구성된 자치위원회를 두어 통치하도록 하였으며, 파견된 지휘관들의 임기를 1년 이하로 하는 등 권력에 위험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였다. 그러면서 본인은 파견된 지휘관들에 대한 명령권을 독점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불러들이는 등 정치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손잡는 등의 올리버의 행동은 그가 청교도로서 신심에 의해 행동했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청교도법을 시행하여 축제나 행사를 열지 못하도록 하는 등 도덕성을 방편으로 국민들을 억압하는 데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상황에 따라 신앙을 취사선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그의 정책은 당연하게도 국민들의 지지를 빠르게 잃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지위의 승계와 죽음
1657년 의회가 올리버에게 왕으로 즉위할 것을 권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6주 동안 고민한 끝에 거절했다고 한다. 왕을 처형한 그가 다시 왕위에 올랐다면, 그 끝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짐작하기 쉬워 보이지만, 어떤 이유에서는 그는 끝까지 왕좌에 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호국경으로 재임되는 자리에서는 왕이 대관식에 사용하는 의자에 앉거나 왕홀을 들고 보라색 망토를 입는 등,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보여준다. 그래도 올리버가 맡은 호국경의 지위는 왕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법적으로 그 지위가 승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지켜지지 않았는데, 1658년 올리버는 갑작스럽게 병사하면서 호국경의 지위를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에게 넘겨주었고, 호국경은 단지 이름뿐으로 사실상 왕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 되었다. 올리버가 사망한 후에 잉글랜드 연방은 즉시 흔들리기 시작하였는데, 공포정치나 다름없는 군부통치를 하던 잉글랜드 연방은 실상은 올리버 일인의 실력으로 유지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제대로 된 체계가 없는 국가였고, 그마저도 리처드가 군부 장악에 실패하면서 축출되게 된다. 이후 영국은 잠시 혼란에 휩싸였다가 찰스 2세가 돌아와 왕정보고가 이루어지면서 영국은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올리버가 어떤 의도로 왕을 처형하고 권력을 찬탈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그는 내란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은 독재자로 변질되었다. 그의 행위 덕분에 영국은 입헌군주제라는 왕과 의회가 공존할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의 정치체제로 발전할 수 있었지만, 반면에 영국은 현대까지도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