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영국 1년도 견디지 못하고 퇴위한 왕 「에드워드 8세」

반응형

인물사진

영국의 왕족

'에드워드 8세'는 1894년 영국의 런던 외각에 있는 리치먼드 파크의 화이트 로지에서 '조지 5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영국의 통치자는 '빅토리아 여왕'이었는데, 여왕의 장남인 '에드워드 7세'가 그의 할아버지였고, 아버지 '조지 5세'가 왕세손으로, 그는 태어나자마자 영국의 왕위 계승 서열 3위의 위치에 있었다. 에드워드 8세의 본명은 '에드워드 앨버트 크리스천 조지 앤드루 패트릭 데이비드 윈저'인데, 에드워드라는 이름은 할아버지와 겹치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주로 마지막 이름인 데이비드로 불렸다고 한다. 에드워드 8세는 왕족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교육은 주로 가정교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1907년에는 오스본에 있는 왕립 해군 학교에 입학하였으며, 2년 후에는 다시 다트머스에 있는 브리타니아 왕립 해군 대학에 진학하는 등 영국 해군에 복무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1910년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고 조지 5세가 즉위하면서, 해군에 입대하는 것은 무산되게 된다. 이때 에드워드 8세는 다음 왕위 계승권자로서 콘월 공작과 로스시 공작 위를 받았으며, 16세 생일에는 정식으로 웨일스 공으로 임명되었고, 얼마간 'HMS 힌두스탄' 호에서의 형식적인 군 복무를 마친 후 옥스퍼드 대학교의 모들린 컬리지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에드워드 8세는 이러한 급격한 계획 변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는 교내 폴로 클럽에서 활동하는 등의 행위를 하기도 하였지만, 8학기나 옥스퍼드에서 보냈으면서도 아무런 학문적 성취 없이 학교를 떠났다.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군에 입대하였는데,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에 영국 근위대에 형식적으로 입대한 것으로 실제 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위문을 위해 가능한 한 자주 최전선을 방문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실제 참호전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에드워드 8세가 프랑스 전선을 자주 방문한 것이 비단 이러한 목적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 시기 그는 휴가 기간 동안 파리에서 파티를 즐겼으며, 파리의 매춘부였던 '마거리트 알리버트'와 사귀기도 했다고 한다.

왕세자의 연애

에드워드 8세와 알리버트의 연애는 1년여 만에 끝났지만, 1917년 그는 이번에는 서덜랜드 공작의 딸 '로즈마리 워드'에게 청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혼인은 서덜랜드 공작가의 집안 문제로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에 좌절되었고, 이 때문인지 아니면 본래 에드워드 8세의 성격적 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후로 그는 문제가 되는 연애를 계속하게 된다. 에드워드 8세는 정상적인 연애가 아닌 주로 유부녀들과의 불륜 관계를 계속하였는데, 첫 연애상대인 알리버트도 유부녀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연애관에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조지 5세는 이러한 아들의 연애 행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고, 그는 에드워드 8세에게 차라리 평생 결혼하지 말고 동생이나 조카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하거나,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이은다고 해도 1년도 못 버틸 것이라고 하는 등의 이야기를 남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에드워드 8세는 왕세자로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여러 공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외모와 패션 감각, 미혼이라는 타이틀로 많은 관심을 받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에드워드 8세가 아닌 동생 '조지 6세'가 왕이 될 수도 있다는 풍문도 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낭설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1930년에도 에드워드 8세는 여러 유부녀들과 밀회를 즐겼다고 하며, 그중에는 미국인인 '월리스 심프슨'도 있었다. 심프슨은 3년 전에 미 해군 장교였던 남편과 한번 이혼한 경력이 있었으며, 당시에는 영국계 사업가와 재혼하여 영국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즉 심프슨은 한 번의 이혼 경험이 있는 유부녀였는데, 에드워드 8세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고, 두 사람은 곧 연인사이가 되었다. 게다가 에드워드 8세는 심프슨을 버킹엄 궁전으로 데려와 부모님에게 소개하는 등 막장에 가까운 행동을 하기도 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는 심프슨과 합법적으로 결혼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에게 이혼을 종용하며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반응형

왕좌보다 여자를 선택한 남자

1936년에 조지 5세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8세가 후계자로 왕위를 이었는데, 이로서 그는 영국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 등 대영제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가 왕좌를 차지하는데 큰 걸림돌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연인인 심프슨이 문제였다. 전통적으로 영국의 왕은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수장이기도 했는데, 에드워드 8세가 심프슨과 재혼하는 것은 성공회의 교리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행적과 문란한 사생활은 정치권에서도 문제시하였으며, 국민의 동의를 얻기도 매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8세는 심프슨과 함께 공식행사에 참석하는 등의 행동을 하였는데, 심지어 당시 심프슨은 아직 이혼한 상태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드 8세가 정부의 주요 문서를 그녀에게 보여주는 등 위태로운 행동이 이어졌는데, 그의 행동들은 보도되지 않아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이는 당시 영국 정부의 부단한 정보통제 노력의 결과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국왕의 정치적으로 위태로운 행보가 계속되자 당시 영국 총리였던 '스탠리 볼드윈' 등이 개입하게 된다. 1936년 에드워드 8세는 볼드윈을 불러 심프슨과 결혼하겠다는 마음을 본격적으로 밝혔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어서 캔터베리의 대주교까지 나서서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에드워드 8세는 심프슨이 왕비가 되지 않고 두 사람 사이의 자녀들이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는 중재안을 제시했다고 하는데, 이 제안의 경우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다고도 하며, 처질 본인이 직접 입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재안도 인정받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고, 호주와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의 총리들까지 결혼에 반대하고 나서자, 볼드윈은 영국의 왕좌와 심프슨,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선택을 강요하게 된다. 그런데 에드워드 8세는 왕좌와 여자 사이에서 여자를 선택하였다. 그는 심프슨과 결혼하지 못하면 퇴위하겠다고 선언했고, 해가 가기 전에 공식적으로 퇴위 문서에 서명하게 된다. 에드워드 8세는 조지 5세의 말처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고작 10개월 22일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고, 대신 조지 6세가 뒤를 이어 영국의 왕이 되었다. 이후 에드워드 8세는 윈저 공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이듬해 프랑스로 자리를 옮겨 심프슨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는데, 심프슨은 왕족의 지위를 일절 인정받지 못하고 윈저 공작부인의 지위만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친 나치 성향과 스파이 의혹

에드워드 8세는 왕좌에서 내려왔지만, 그렇다고 그의 명성이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 이 점을 이용하려는 세력이 접근하였으며, 그도 이를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7년 에드워드 8세는 심프슨과 함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나치 치하의 독일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심프슨이 여러 친 나치 성향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정부에서는 그녀가 나치의 스파이가 아닌지 의심했다고 한다. 실제 윈저 공작 부부가 나치의 스파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에는 영국 정보기관이 독일이 심프슨과 접촉하여 에드워드 8세를 영국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8세는 이러한 혐의를 부인했다고 하지만, 그는 프랑스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장교로 복무하면서 독일 외교관을 통해 영국의 전략을 누설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고, 프랑스가 침공당해 위기인 상황에서 영국으로 후퇴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남부를 통해 스페인으로 도주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영국 정부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윈저 공작 부부를 붙잡아서 강제로 바하마의 총독으로 삼아 바하마로 보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에드워드 8세는 바하마에서도 미국 기자들을 불러 놓고 나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 등 친 나치 행보를 이어나갔고, 결국 그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프랑스에서 지내게 된다. 에드워드 8세는 개인적으로도 인종차별 주의자였으며, 심프슨과의 결혼을 강행하여 왕실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는데, 친 나치 행보까지 더해지자 왕실에서의 입지는 매우 좁아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간혹 왕실의 행사를 위해 영국을 방문하더라도 다른 왕족들로부터 외면받았다고 한다. 조지 6세는 에드워드 8세가 자신의 허락 없이 영국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고, '엘리자베스 2세'는 대관식의 참석 요청을 거부할 정도로 거리를 두었으며, 결국 그가 1972년에 후두암으로 프랑스에서 사망한 이후에야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에드워드 8세는 평생 심프슨과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고 하는데, 그가 왕좌를 포기하고 심프슨과 결혼한 일을 포함하여 상당한 로맨티시스트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상당히 문란한 사생활을 보냈다는 것을 보면, 그것이 진짜 사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서로를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는 당사자들 밖에 알 수 없을 것이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