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의 14대 황제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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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

트라야누스의 후계자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는 전 황제인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의 후계자로 황제의 자리를 승계했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친척으로, 어린 시절부터 트라야누스와 함께 로마의 속주였던 '히스파니아 바이티카'의 '이탈리카'라는 도시에서 지냈다. 하드리아누스 일가는 트라야누스의 집안보다 로마에서 더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에서 출세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트라야누스가 일찌감치 군 생활을 시작하며 공직에 투신한데 반해,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였고 고향에서 사냥을 다니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로 원로원 의원이자 법무관으로, 로마에서 상당한 부과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만, 하드리아누스가 10살 때 사망하게 된다. 이때 트라야누스와 동향이었던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에게 후견인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몇 년 후 트라야누스가 방탕한 생활을 하던 하드리아누스를 이탈리카에서 로마로 불러들여서 공직에 올려 군 생활을 시키면서, 하드리아누스가 로마 정치계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2대 황제였던 '네르바'가 사망하면서 트라야누스가 새로 황제에 취임하게 되는데, 하드리아누스가 그 소식을 제일 처음으로 트라야누스에게 전해주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가까이 지내게 된다. 그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신임을 받으며 함께 '다키아 전쟁'에 참전하는 등 친족이 별로 없는 트라야누스의 최측근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러나 집권 말기에는 약간 소원한 모습이 보이는데, 트라야누스의 마지막 원정이 된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는 직접 참전하지 않고, 시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원정군을 지원하는 역할에 그치게 된다. 그 직위도 트라야누스의 아내였던 황비 '폼페이아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지지로 인해 얻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황제 취임과 숙청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공략하고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하는 등의 업적을 이루며 로마 제국 사상 최대의 세력권을 만들었지만, 이러한 무력을 통한 팽창 정책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파르티아와의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 전인 117년,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중 병으로 인해 사령관 자리를 하드리아누스에게 위임하고, 로마로 돌아가는 중 병사하게 된다. 당시까지도 트라야누스는 명확하게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으며 자식도 없고, 양자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후계자라고 알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외지에서 황제가 사망하고,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입적과 황제 승계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짐으로 인해 당시 로마에서는 많은 소문이 생겼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는 비록 트라야누스의 친척중 가장 가까운 남성이었지만, 황제가 죽을 때까지도 후계자로 선언되지 않았기도 했고, 마지막 파르티아 원정에서 제외되는 등, 거리를 두는 모습이 보였고, 트라야누스가 후계자를 지명하고 사망하는 순간에, 그 근처에 황후를 비롯한 적은 수의 사람만이 있었다는 것 때문에 자칫 승계 문제로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으로 치닫았다. 트라야누스의 황후였던 플로티나도 하드리아누스와는 친척으로 둘의 사이는 상당히 가까웠던 것 같은데, 플로티나가 주도적으로 진행했는지 하드리아누스의 정치적 결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승계 문제를 완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상당히 무서운 정치적 결단을 하게 된다. 먼전 트라야누스의 사망과 승계에 대한 유언이 같은 날 이루어졌음에도, 로마에는 먼저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입양한다는 선언의 편지가 황후 플로티나의 명의로 원로원에 도착하게 된다. 그 후 3일이 지나 트라야누스 황제의 사망 소식이 편지로 도착한다. 뿐만 아니라 그가 전쟁터에서 로마로 도착하기 전에, 저명한 원로원 의원이자 트라야누스의 측근이었던 4명의 사람이 국가 전복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 처형을 주도한 것이 트라야누스와 함께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으로 지명되었던, 아킬리우스로 당시 황제의 친위대 사령관이었다고 한다. 비록 숙청이라는 수단으로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불안과 불만을 공포 속에 잠재워 두긴 했지만 하드리아누스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는 빠른 시간 안에 로마로 귀환해서 황제를 계승해야 하는 것과 동시에 파르티아를 비롯한 동방 원정을 원만하게 종식시킬 의무가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황제 즉위날 트라야누스가 사망한 '셀리누스'로 가서 조문을 표한 후, 바로 시리아로 돌아가서 파르티아 전쟁으로 로마에 귀속되었던 메소포타미아 속주와 아르메니아 속주를 포기함으로써 눈앞의 파르티아를 진정시키고 당장 동방 문제를 봉합하였다. 이로 인해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의 성과 자체가 흔들릴 정도의 일이긴 하였으나, 시간이 없는 하드리아누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는 다른 시각에서 하드리아누스의 팽창억제 성향으로 분석하기도 하는데,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영토의 팽창보다는 로마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번영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트라야누스와 의견이 엇갈려서 사이가 멀어졌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후 이민족으로 인해 정세가 불안하던 다키아와 '모이시아'를 재편성하여 방비를 굳히고는 1년 만에 로마로 귀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반대세력의 구심점이 될 만한 인물들은 숙청되었고 그의 승계는 별문제 없이 이루어진 것 같다. 하드리아누스는 전 황제였던 네르바나 트라야누스와는 다르게 이후로도 종종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해가 되는 인물의 숙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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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 방벽과 제국 순방

실제 하드리아누스의 생각이 어떠했든간에, 실제로 로마의 팽창정책은 끝났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영토를 순방하며 속주들을 안정시키고 병력을 재편하고 공공시설물들을 건축하는 등 내부를 다지기 시작했다. 하드리아누스의 순방은 121년 갈리아와 레누스(현재의 라인강 부근) 일대를 시작으로 브리타니아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공사계획을 직접 점검하였다고 한다. 이후 파르티아와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동방으로 이동하였고, 속주에서 직접 군대를 사열하고 행정과 외교 업무도 지시했다고 한다. 그는 속주를 돌아다니면서 현지를 점검하고, 총독들의 비리와 실정을 파악하고 조정하며, 일종의 감찰을 하고 다녔던 것 같다. 이런 순방은 재정을 비효율적으로 소모하고 황제의 의무를 소홀히 한다며 원로원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이후 로마가 흔들리던 시기에도 버텨낼 수 있는 기반을 쌓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하드리아누스의 그리스 사랑을 이때도 계속되었는데, 당시 로마도 사실상 그리스 문화권 아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로마는 로마로서의 부분을 포기하지 않고 고집스러게 지키는 모습도 보여줬는데, 그중에 하나는 바로 수염이었다. 로마인들은 수염을 기르는 것을 깔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싫어하였는데, 하드리아누스는 황제로서 최초로 수염을 기르고 다녔으며, 이후 로마 황제들이 수염을 기를 수 있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그는 순방 중에도 그리스의 아테나이에 머무르면서 축제를 주관하거나, 신전을 건설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딴 도시를 새로 건설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그리스에서 유행했던 동성애를 즐기기도 하였는데, 그가 사랑한 그리스인 '안티누스'가 이집트 방문 중에 나일강 유람을 하다 익사하자 크게 슬퍼하여 안티누스를 신격화하고, 그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그이 조각을 다수 만들어서 설치했다고 한다. 이러한 하드리아누스의 행보는 속주 주민들에게도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하였는데, 그는 속주의 전통과 법을 무시하고 본인의 필요와 취향대로 명령하였기 때문에 독선적이라고 비판받았다고 한다. 또한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부터 문제가 된 유태인 반란이 큰 골칫거리가 되었는데,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이 132년 대규모 반란인 '바르 코크바의 난'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였으며, 아예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고 바꿔버렸다. 로마의 유대인에 대한 인내심은 완전히 없어진 것으로 보였으며 속주의 이름을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바꾸었고, 예루살렘에서 '야훼' 숭배가 금지되면서, 유대인들은 이때부터 제국 각지로 이산 되면서 유대민족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법률의 정비와 사회 개혁

군사적으로 뛰어났던 하드리아누스 였지만 내정면에서도 그 못지않은 업적이 많이 있다. 법 제도의 정비를 추진하여 '영구고시록'이라 불리는 법전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는 당시에 법무관들이 내리던 고시를 집대성한 것으로, 후에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현대 유럽 일부 국가들의 법이 기본적으로 로마법에 준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정책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대 로마의 건축물 중에 현대에도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평가되는 '판테온'을 재건하였다. 원래 판테온은 로마 제국 첫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심복이었던 아그리파가 건설하였지만, 80년 로마 대화재 때 소실되었던 것을 수복한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관료제를 개편하여 로마의 행정능력의 향상을 꾀하였으며, 관료들의 보수를 상향하고 능력에 따라 차등지급하는 등 새로운 시스템도 도입하였다. 또한 법무관들의 과중한 업무를 완하하고, 일부 소송을 전담하는 순회판사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개혁은 로마 시민들에게는 환영받았지만, 결과적으로 황제와 관료제 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가게 되기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은 불만이었던 것 같다.

후계자 문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와 마찬가지로 친척이 많지 않았고, 승계를 통해 로마의 권력을 자신의 손 안에 두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하드리아누스는 말년에 여러 번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하게 되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로마 국정의 일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승계에 대한 부분도 로마 시민이나 황제로서의 의무로 생각한 것 같다. 하드리아누스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라는 에트루리아 출신의 로마 귀족 청년을 양자로 입양하고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좋은 집안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드리아누스가 승계할 때 숙청당한 4명 중 한 명인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의 사위로, 원로원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 사후에, 원로원과 사이가 안 좋았던 자신을 대신해서 평탄하게 승계하고 로마를 이끌어 갈 것을 걱정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매부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루수스 세르비아누스'와 자신의 누나의 손자였던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를 국가 반역죄로 기소하였다. 당시 90세의 매부와 18세의 손자가 반역을 도모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우며, 그런 위협요소가 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의 정신건강 상태에 대해 의문이 나오기도 하는데, 트라야누스 사망 시의 승계 방법이 소문처럼 조작되었다고 한다면 하드리아누스의 과도한 걱정이 이해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콤모두스는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였다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만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때 상당히 실망했던 것 같다. 결국 138년 그는 '안토니누스'를 다시 양자로 들이게 된다. 안토니누스는 먼 친척이긴 하지만 하드리아누스와 인척 관계에 있었고, 부유한 원로원 의원이면서 온화한 성품으로 유명하여 큰 반발 세력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사망하였는데, 원로원에서는 하드리아누스의 생전 정책들에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신격화를 거부하였는데, 하드리아누스가 '도미티아누스'처럼 '기록말살형'에 처해질까 두려웠던 안토니누스가 눈물을 흘려가며 원로원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결국 원로원은 안토니누스의 간곡한 호소에 하드리아누스의 신격화에 동의하였고, 이후 안토니누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경건한 안토니누스)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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